글 쓰세요


제발 글을 쓰세요


마지막 부탁입니다





글 쓸 자신이 싹 없어져서 죽어지내다 담당자의 저 말에 더럭 겁먹고 아무거나 쓰기로 했다. 신뢰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이라는 말은 무섭다. 바로 앞의 문장을 쓰고 사흘간 지뢰찾기에 몰두했다. 총 게임횟수 4천판을 넘었다. 구린 글을 쓰는 것도 모자라 전시해야 한다는 게 괴롭다. 내 문장 특유의 느낌이 너무 역겨워 죽겠는데 이걸 또 어떻게 견디냐. 이짓거릴 신이 나서 몇 시간이고 했던 때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자기애와 과시욕에 휘둘리던 시기. 잠깐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어지지만 글은 기특하게 자주 썼다. 자기애고 지랄이고 그딴 거 다 고갈된 자리를 수치심이 채워버린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수치심은 창작의 효율을 낮춘다. 망신에 대한 백신이나 보험 노릇을 하라고 깔려있는 감정일 텐데 내 것은 왜 이리 덩치만 크고 미덥지 않은지. PC 성능은 있는대로 갉아먹고 랜섬웨어엔 속수무책인 액티브엑스 공짜백신 혹은 막상 일 터지면 돈 한푼 안 주고 튀어버릴 보험회사 같은 나의 수치심....따위의 비유를 생각해냈다는 게 또 한 번 수치스럽다. 혹시 글쓰기란 원래 수치스러운 행위가 아닌가 반짝 희망을 느꼈다가, 수치심에 태생적인 정당성이 부여된다 하여 희망을 가질 건 또 뭔가 싶어 다시 가라앉았다. 근데 계속 싫다 싫다 힘들다 괴롭다 하다보니 이상하게 또 조금씩 뭔가를 쓰고 싶어졌다. 하기 싫은 일은 왠지 인생에 유익할 것 같다. 요컨대 좋은 약은 입에 쓰다 정신. 어쩌면 고생페티쉬. 암튼 가뜩이나 부족한 참을성이 근래에 더 떨어져서 하기 싫은 걸 계속 피하고만 있었다. 속 편하게 피하기만 하면 좋으련만 이렇게 살다간 끝내 인간쓰레기로 죽게 될 거라는 공포로 정신이 병들어가던 차였다. 글쓰기가 이에 효험을 발휘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요즘 건강식품에 대한 집착이 부쩍 커졌는데 글쓰기만큼 정신건강에 쓴 약도 드물다는 걸 깨달은 거지. 기를 쓰고 쪽쪽 빨아먹을 거다. 담당자가 이런 글을 바랐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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