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출국날이 갑자기 정해졌다. 여권 만료된지 기십년이라 부랴부랴 구청에 달려갔다. 귀찮고 돈아깝고 시간없어서 만원짜리 지하철 즉석사진을 찍었다. 기계에 현금구멍 카드구멍이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카드는 멕이는 족족 토해내고 현금 만원권만 얄밉게 날름 삼켰다. 순식간에 사진이 나왔다. 못 나올 줄은 알고 있었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쁘게 나오든말든 관심없어진지 오래다. 그런데 이거는 어...잘나오고 못나오고는 둘째치고 얼굴이 너무 크다. 이렇게 커도 되나? 사진에 여백이 거의 없다. 시커멓게 산발한 머리에 하필 또 검정폴라티를 입고 찍어서 목조차 없다. 거대한 쌍판만이 공중부양중이었다. 규정위반 아냐? 아 뭐 얼굴만 크게 강조되면 식별하기 좋지 않겠어 출입국 직원들 가뜩이나 구별도 안되는 동양인들 얼굴 뜯어보느라 눈도 침침할 텐데 마 내가 친절하게 확대해줬으니까 잔말말고 통과시키라고 자빠져버리면 지들이 어쩔 건데. 재촬영으로 돈과 시간을 또 날리기 싫은 마음이 대책없는 허세를 빚어냈다. 이런 건 대부분의 여행기에서 불행의 복선이 된다. 어쩌긴 뭘 발포하겠지.


_선생님 이거는, 얼굴이 너무 크고 어둡게 나온데다 목도 없어서 출입국에서 문제삼을 수가 있거든요. 가급적 새로 찍으셨음 하는데, 굳이 이 사진으로 하시겠다면, 이 사진을 선생님 본인 의지로 선택해서 한 거라고 서명을 하시고 진행하셔야 돼요.
그래서 서명했다. 여권 민원 창구 전체가 선생님이, 선생님께서는, 선생님도, 선생, 선생, 선생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모든 민원인의 호칭은 성별 연령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부 선생님으로 통일하는 것이 불만의 소지가 가장 적다는 공직사회의 합의가 있었던 듯하다. 한국 호칭 문화의 골치아픔에 대해 생각하며 구청을 나서다가 근처 사진관 창문에 붙은 문구를 보고 비명을 꽥 질렀다.

[여권사진 9천원]

푼돈에 벌벌 떠는 나에게 이만한 귀싸대기가 없다. 뺨을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귀가했다.


_여권은 제때 나왔다. 신상정보가 적힌 면을 펼치니 문제의 사진이 나왔는데 얼굴 크기는 둘째치고 피부가 완전 구리색이다. 구리도 탐스러운 구리가 아니라 지명수배전단 특유의 어떤 음산-한. 그런 구릿빛. 어릴 때 수배전단 붙은 길은 쳐다도 안 보고 멀리 돌아갔다. 사진에 감도는 기운이 너무 무서워서. 그 기운의 정체를 알겠다. 피사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진이란 으레 그런 느낌인 것이다. 근데 자꾸 보니 사진에 정이 가서 뭐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됐다. 남는 여권사진 막 이마 뺨 턱 옆통수 뒤통수에 붙이고 티셔츠에다 크게 프린트해서 입고 가면 입국심사자도 정들지 않곤 못 배기겠지 하는 쿠소망상을 끝으로 사진에 대한 더 이상의 관심을 끊었다. 이제 ESTA가 문제다. 내가 무해한 관광객임을 증명받는 절차인데 허가가 나기까지 최대 7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96시간 뒤 출국인데...신상정보 체류지 주소 등을 쓰고 마약 테러 전염병 등과 관련있냐는 질문에 모두 아니오를 누르고 수수료 14달러를 지불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웬만하면 허가가 나지만 오타 때문에 거절당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한다. 뽕쟁이 테러범 좀비조차 아니오를 누를 저 뻔한 마약 테러 전염병 관련 질문도 마우스 스크롤 실수로 아니오가 예로 바뀐 채 제출되어 망하는 경우가 꽤 있단다. 14달러 카드결제시 지불국가를 택할 때 Korea Republic과 Korea Democratic Peoples Republic 두 개가 나오는데 후자인 북한을 고르는 사람도 적지 않단다. 데모크라틱 저거 민주주읜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까 맞겠지 싶어서(이 실수는 허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저런 실수들을 했으면 어쩌지 불안해하며 다섯시간 뒤 진행상황을 조회해보니


안도감과 설렘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마음에 조금씩 불안의 싹이 돋았다.

이 여행엔 어떤 지뢰가 숨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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