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시차적응에 실패한 건 둘 다 마찬가지지만 나는 변방의 용병이고 영구는 제국군. 너덜너덜해진 심신을 끌고 제국에 출근해야 했다. 아이고 혼자 계셔서 어떡하나. 현관을 나서며 영구가 말했다. 몇날며칠 말없이 혼자 처박히기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짓이니 걱정말고 네 컨디션이나 챙기라 했다.

집은 너무나 고요했다. 새소리 바람소리만 아련히 들려왔다. 미국의 평일 낮시간대 집구석 원래 이렇게 소음공해 청정구역인가? 황금같은 이 침묵 한 허리를 버혀내어 서울의 내 이웃들 샷시공사할 때 굽이굽이 펼 수만 있다면 뭐라도 팔겠다. 글쓰고 낙서하고 콘티짜다 지겨워져서 TV를 켰다. 영어가 왱알앵알 쏟아졌다. 들리는 단어가 적지는 않은데 그 의미가 좀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머리통만 그냥 대충 휘젓다 나가버린다. 빡세게 공부하면 언젠간 다 들리겠지. 지금은 말고.

FUCK! ​꾸벅꾸벅 졸다 아는 단어가 튀어나와 고개를 드니 아는 얼굴. 고든램지였다. 미국까지 와서 굳이 카스 찾아먹는 기분이 들어 채널을 돌렸다. 이번엔 수의사가 주인공인 일종의 리얼리티 쇼가 나오는데 어이구야. 동물의 피 상처 뼈 내장이 그대로 다 나온다. 등에 입은 치명상이 곪아들어가는 개가 등장했다. 의사가 개 등짝을 여드름 짜내듯 양 엄지손가락으로 힘껏 누르자 알밤만한 애벌레들이 환부에서 삐져나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어떤 장면에도 모자이크는 없었다. 으와 미국TV 완전 스파르타네. 이에 비하면 시청자들 놀랄까봐 모자이크로 꽁꽁 싸맨 한국방송은 이유식이다.


_잠은 거의 못 자는데 끼니는 한국밥때 미국밥때 둘 다 적용하여 이중으로 챙겨먹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산 whole milk의 유지방이 혈관을 타고 달려 배 옆구리 허벅지에 착착 들러붙는 감각. 너무나 불쾌했다. 하지만 원치 않는 짐이 붙는 불쾌감은 아끼던 게 깎여나가는 고통보단 나은 편이었다. 통보메일 받은 이후로 깎인 고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금이 간 내 밥그릇. 한물간 내 상품성. 내 가치. 커리어 좆됨의 서막.

엊그제 했던 영구와의 대화를 곱씹는다. 미국 IT업계의 똑똑한 놈들 때문에 먹고살 길이 점점 막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술발달로 진입장벽이 벌어진 틈을 타서 얼렁뚱땅 업계에 발을 디딘 내가 할만한 푸념인가. 나도 IT기술의 수혜자라고. 혜택 만료시점이 코앞에 닥쳤다 뿐이지. 인간의 정신작용을 시청각 상품으로 만들어 복제 배포하기 점점 쉬워지는 만큼 세상은 점점 재밌어지고, 창작자 개인의 상품성은 점점 빠르게 소진된다. 수백 수천 수만개의 쥐구멍에 짧고 강렬한 볕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었다 사라진다. 지속 가능한 볕들날을 원하거든 최신 동향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볕들 거라 예상되는 지점으로 잽싸게 옮겨가 구멍을 파는 행동력을 발휘해야 할 텐데......가능할까? ‘잽싸게’는 나와 가장 거리가 먼 부사다. 내가 지금 이 글을 며칠째 붙들고 있는지 아는가. 블로그라는 화석화된 매체에 표현 어휘 맞춤법 하나하나 골머리 썩여가며 그래픽자료 한점 없는 글을 느릿느릿 써올리는 비효율적 행위에 애착을 느끼는 성향 자체가 이미 망조 아닐까. 매체를 초월하는 가치를 지닌 개인은 극소수다. 그 극소수에 들어갈 가능성? 내가 또 세상에서 제일 못 견디는 게 높은 경쟁률이다. 경쟁도 못해 느리긴 드럽게 느려 그렇다고 방맹이 깎는 노인처럼 누가 뭐라든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는 소신도 없어 우와 어떡하지? 내 인생 어떡하지? 씻으면 좀 나아질까?


_샤워를 하니 한국과 다르게 물 닿은 피부의 마찰력이 높아지고 머리칼이 뻣뻣하게 엉킨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경수와 연수의 차이인가. 십수년만에 린스를 썼다.

화장실문을 여닫다 뭔가 신경쓰이는 점이 있어 문을 다시 살펴보고 다른 방문도 확인해봤다. 모든 문짝의 아랫부분이 노트 하나쯤은 수월히 넣었다 뺄 수 있을 정도의 홈이 뚫려있다. 여기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고 안에 사람이 있나없나를 알 수 있는데, 용도가 그것뿐일까. 다른 집도 이러나. 현관문은 실리콘 같은 걸로 막혀있는데 저걸 뜯어내면 똑같이 홈이 뚫렸을까.

현관엔 신발 신는 영역과 벗는 영역이 따로 없다. 그냥 똑같이 평평한 목재 마루바닥이다. 하지만 영구네는 신발을 현관문가에서 벗고 들어가는 ‘한국식’ 생활을 한다. 다른 집들은 어떨까. 미드에서처럼 밖에서 신던 신발 그대로 침대까지 올라가는 생활을 하는 집이 많을까. 그 몰상식한 습속의 정당성을 한번도 속시원히 들어본 적 없다. 누가 좀 설명해줬음 좋겠다.

천장 쪽에서 휑-하는 바람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린다. 벽 높은 곳 여기저기에 뚫린 통풍구로 더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다. 중앙에서 보내주는 온풍과 냉풍으로 실내온도를 조절하는 시스템인가보다. 좀 덥다 싶어 벽에 붙은 온도조절장치의 액정화면을 보니 75도. 아 맞다 얘네 화씨 쓰지. 하긴 마트에서 사온 음식에도 죄다 갤런 파운드 온스 붙어있고 자동차 계기판 속도표지판은 마일. 으 성가신 도량형 야만인들.​ 네이버 켜고 화씨 섭씨 변환을 눌렀다. 화씨 75도=섭씨 23.888...도. 65도로 내렸다.

빾!!!!!!! 갑자기 공기를 찢는 경보음에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는 신호였다. 아 뭔놈의 종료음이 이렇게 공격적이여. 그러고보니까 이 집의 엘리베이터 신호음을 듣고도 흠칫 놀랐었네. 날카롭고 건조한 빾! 소리. 모난 부분 다 깎아낸 딩동-멜로디에 ‘지하 10층입니다’ 간드러진 여자의 음성이 동반되는 한국의 엘리베이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네. 공항 착륙부터 지금까지 들었던 무수한 미국의 신호음 중에 음계를 지닌 것이 있었던가. 사람을 각성시키는 목적에 충실한 외마디 빾!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과연 미국은 비트가 팔리는 나라고 한국은 곧죽어도 가락, 멜로디 장사인 건가. 시계를 보니 슬슬 영구가 퇴근할 시각.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넣고 취사버튼을 누르니 딩동댕~백미,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곱다. 눈물나게 고운 소리다. 고객님들 기죽을까봐 영롱한 멜로디에 나긋나긋한 ‘여성성’을 꼭 첨가해주는 한국의 신호음 또한 이유식이다.

별것도 아닌 걸 갖고 한국은 이런데 미국은 저렇네 비교 일반화하는 거 오지게 싼티나지만 재밌어서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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