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자동차 파는 곳이 정말 많다.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어지간한 동네는 덮고도 남을 면적에 반짝반짝한 차들이 쫙 깔렸다. 미국생활에서 차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풍경이겠다. 신발가게 같은 거지. 면허는 있지만 차가 없고 도로주행 한번을 안 해본 나는 맨발로 미국에 뛰어든 셈이다. 영구가 신발신고 일일이 들어다 놔줘야 한다. 미안해 죽겠다. 참고로 영구의 신발메이커는 혼다. 처음에는 H마크가 붙었길래 현대찬줄 알았는데 특유의 각도로 슬쩍 기울어져야 할 H가 미국선 왜 저리 펑퍼짐하게 서있나 의아해하던 차였다. 그게 혼다 마크였다. 다들 안 헷갈리나?


_내 암만 집귀신이어도 맘대로 아무렇게나 쏘다닐 기회 자체가 원천봉쇄된 건 별로 달갑지 않았다. 퇴근한 영구한테 자꾸 아쉬운 소리하기도 싫었다. 내가 백번천번 나가쟤도 영구는 천번만번 좋다고 자기도 재밌다고 하나도 안 힘들다고 할 위인이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일방적으로 부탁만 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게 유쾌해질 리 없잖아. 도보와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얼추 해결되는 관광지였다면 괜찮았을 텐데 음......그런데, 누가 나더러 나가지 말랬나? 비록 자동차위주에 총기소지가 허용된 낯선 땅이지만 인도와 신호체계를 갖춘 문명국이거늘 아무렴 벌건 대낮에 아예 나다니질 못할까. 겁 좀 작작 먹자. 심지어 구글맵을 보니 상점가가 집에서 3Km밖에 안 된다. 뭬? 3키로!? 경로도 엄청 단순해! 당장 배낭을 멨다.


_열 발짝도 못 가서 도로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마주오는 사람을 겨우 피할 수 있을 너비의 인도가 차 쌩쌩 달리는 도로 옆에 소면가닥처럼 붙어있었다. 왼쪽은 담벼락. 제발로 걷는 생물은 사방천지 나 하나였다. 총알같은 저 차들 중 하나가 인도를 덮치거나 차창을 열고 따발총을 갈기거나 칼든 놈이 다가와서 나를 해치려든대도  속수무책으로 뒤지게 생겼구나.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1/3 지점까지 개미새끼 한마리를 못 봤다. 누가 먹다버린 액티비아 플레인 요거트 껍데기가 그 길에서 발견한 유일한 인간의 흔적이었다. 그래 이왕 아무도 없을 거면 끝까지 없어라. 그때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뭘 잔뜩 싸짊어진 대추같은 동양계 할머니였다. 곁눈으로 날 재빨리 스캔한 할머니는 조금 안도한 뒤 무표정하게 갈길을 갔다. 내 행동도 거울처럼 똑같았겠지. 이곳에서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계층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_자동차천국이라지만 보행자에 대한 배려는 희한하게 한국보다 나았다. 신호등 없는 건널목이라도 보행자가 길 건널 의사를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차들이 제깍 멈춰선다. 차량의 흐름이 신호로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건너는 습관이 밴 나에겐 다소 황송한 매너였다. 운전자에게 엉거주춤 목례하고 건너편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되게 한국적 제스처네 자조하면서. 신호등이 설치된 건널목이 나왔다. 한참을 기다려도 보행신호가 안 나 주변을 둘러보니 신호등 기둥에 웬 버튼이 하나 달려있다. 이걸 눌러야 적당한 때 ‘가시오’ 신호가 떨어지는 방식이구나. 근데 미국 신호등의 가시오 인간은 자세가 좀 굽었다.


리듬을 타는 듯도...?




_처음보다는 공포가 꽤 사그라들었긴 했어도 산책을 즐길 여유를 누리긴 어려웠다. 그럴 환경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차들 매너좋고 거리도 뭐 그렇게 미친듯이 황량하고 험악하지는 않았지만 애시당초 맨몸뚱이의 도보인간을 위해 설계된 공간은 아니므로, 그로 인한 근본적인 소외감이 있다. 사람들 막 개 끌고 다니고 풀밭에 드러눕고 조깅하는 그런 곳은 대체 어딘지 그런 평화의 땅이야말로 차없으면 못 가는 곳인지 궁금해하며 길을 건너다가, 헉, 하고 놀랐다. 선명한 초록빛 잔디와 이끼의 카펫 위에 두 줄로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길. 나무 사이 탐스럽게 피어있는 형형색색의 꽃. 예고없이 펼쳐진 판타지적 장관에 어리둥절해서 이거 사람 가는 길 맞아? 하며 주춤거리고 있는데 귀에 에어팟 꽂은 조깅자가 옆을 획 지나친다. 굵은 나무뿌리를 사뿐사뿐 건너뛰며 사라지는 조깅자의 뒷모습. 와 내가 바라던 산책로를 여기서 만나는구나. 황홀경에 취해 걷다 곧 알게 되었다. 이곳이 애플 본사로 들어가는 길이었음을. 하여간 진짜 뭐든 예쁘게 연출하는 건 끝내주게 잘하는 집단이다. 길이 곧 끝나버려 아쉬웠지만.




_목적지인 중국 식료품 마트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눈을 사로잡은 불닭볶음면. “근데 여긴 껍질 깐 거밖에 없는데?” 등뒤에서 들려오는 한국말. 으 반가운 거 티내지 말자 민망하다. 한바퀴 둘러봤다. 베트남시금치 중국샐러리 용안 그외 생소한 과일채소와 소간 돼지간 닭간 소혀 돼지혀 각종내장 알 수 없는 민물생선 등등 정말 사고 싶은 것들이 너무, 너무, 너무 많았다. 간과 혀를 종류별로 사고 싶었지만 요리할 자신이 없어서 다 조리된 돼지간 통조림 하나를 골랐다. 너무 몸 사리고 있나. 한국서 구하기 힘든 파격적인 무언가 하나쯤은 사야 할 텐데. 고민하며 냉동육 코너를 살피다가 악어고기를 발견하고 멈칫. 이거다. 주저없이 바구니에 넣었다. 계산대로 갔다. 눈 한번 안 마주치고 필요한 몇 마디 단어만으로 계산을 끝낸 중년의 중국인 점원. 허허 이런...너무 좋잖아. 혈연 및 보증된 우호관계가 아닌 자에게 딱히 살갑게 굴지 않는 그 익숙한 배타성에 어쩔 수 없는 편안함을 느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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