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고요한 새벽 세 시. 몇 시간째 뒤척이다 와불처럼 비스듬히 머리를 받치고 누워 멍하니 천장을 봤다. 잠도 안 오고 일도 안 되고 놀지도 못하겠네. 이놈의 시차적응 대체 언제쯤 되는 거지. 머릿속에 스모그 같은 게 잔뜩 낀 느낌 너무 더럽고 싫다. 해외출장에 대한 로망이 꽤 컸는데 노는 게 이 정도로 고되면 일하는 건 얼마나 좆같을지 상상도 안 된다. 하긴 조물주가 어떤 년인데 아무 대가없이 그냥 멋있기만 한 걸 헤프게 허용해줄 리가. 억지로 잠을 청해봐야 소용도 없을 테니 가계부 정리하고 내일 외출 동선이랑 냉장고 식재료로 만들 수 있는 식단이나 짜볼까 하고 있는데,

​​​아이휴~

어린애의 한숨소리. 펄쩍 뛰어 일어나 앉았다. 뭔 소리지? 웅크리고 앉아 고막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또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휴~ 목덜미가 쭈뼛 섰다. 씨발 뭐여 이게. 좀처럼 머리에 담을 일 없었던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귀신...? 여태껏 한 번도 귀신을 못 봤다. 귀신 이야기에도 정서적 영향을 받은 일이 거의 없다. 재미도 없고 무섭지도 않고 한마디로 나한테 귀신이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가치가 매우 낮은 소재다. 까무러치게 무서운 건 예외없이 피와 욕구가 흐르는 인간의 이야기, 인간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기십년간 기별없던 귀신을 미국에서 만나? 이야 낮엔 없는 게 없는 식재료 마트로 사람 혼을 쏙 빼놓고 밤중엔 뭔 귀신 찌꺼기같은 걸 보내서 생전 처음 맛보는 공포를 선사하다니 대단하구나 미국.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있는데 또다시 들려온 아이휴~

처음과 똑같은 음량과 어조. 유아에 가까운 어린아이의 애교섞인 음색. 기성품. 공장제 목소리. 아 이거는 방에 있는 뭔가가 고장났을 확률이 크겠다. 여기가 원래 영구의 아이가 쓰던 방이니 아마도 인형, 음성장치가 망가진 채로 어디 구석에 처박힌 인형 같은 데서 나는 소리겠지. 잠시나마 귀신 운운하며 겁에 질렸던 게 쪽팔렸다. 근데 진짜 귀신이 맞는대도 뭐. 단순노동이 빠르게 기계로 대체되는 시대라지만 녹음된 멘트를 틀어놓고 영업하는 안일한 정신상태의 귀신이 무섭겠냐. 소리의 원인에 대한 확신이 빠르게 안도감을 불러왔고...


_눈을 뜨니 오전 여섯 시. 자는 줄도 모르고 잤네. 어제 내가 굉장히 중요한 생각을 하다 말았는데. 아 맞다 냉장고 식재료. 냉장고에 계란이랑 베이컨이랑 아스파라거스가 있었지. 아침 만들 생각에 신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타국에서의 요리는 어쩐지 더 재밌다. 흔한 재료를 다룰 때조차. 베이컨을 굽고 같은 팬에 아스파라거스와 계란을 지지고 냉동실에 있던 빵을 꺼내 토스트기에 넣었다. 기름진 베이컨향이 온집안에 가득하고 연기가 막 모락모락. 엉...? 뭘 했다고 연기가 모락모락씩이나. 어이구야. 가만 보니 토스트기가 정상이 아니다 싶을 만큼의 회색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식겁해서 빵을 꺼내보니 빵은 또 하얘. 그럼 이 연기의 원인은 대체...

때르르르르릉 ​파이어. 파이어. 때르르르르릉 ​파이어. 파이어.

지축을 뒤흔들 기세로 울려대는 화재경보음에 완전히 혼비백산했다. 공항 입국심사 때 여권이 자물쇠로 잠겼을 때보다 세 배는 더한 당혹감. ​​파이어. 파이어. 감정을 전혀 담지 않은 여자의 ​불이야 경고음성이 하도 묵직하고 파워풀해서 한번 들을 때마다 둔기로 심장을 후려맞는 기분이다. 미치겠네. 몰려든 동네주민과 타운하우스 관리인과 소방수들 앞에서 더듬더듬 해명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피가 말랐다. 몇초간 어영부영하다 전기렌지에 붙은 환기팬을 틀고(팬 돌아가는 소리도 엄청나다) 창문을 열고 영구를 깨워말어 일단 한글로 해명문을 쓰고 구글번역기를 돌려말어 하고 있는데...경보음이 멈췄다. 아! 조물주어머니 감사합니다!!

영구의 방문이 열렸다. 아침부터 괜히 시키지도 않은 베이컨이니 빵같은 걸 굽는다고 설치다가 화재경보 작동시켜 미안하다는 내게 영구가 말했다. 엉? 아~아까 무슨 소리난 게 그거였구나 괜찮아 우리도 전에 삼겹살 구워먹다 몇 번 소리 났어 괜찮아괜찮아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러더니 내가 차려놓은 걸 보고는 으와~~~진짜 맛있겠다!! 고생하셨네!! 너무 고마워!! 하더니 순식간에 그걸 다 때려먹고 출근했다. 진정 리트리버같은 놈이다.


_타운하우스의 주요 공용시설로는 스파가 딸린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미국의 웬만한 공동주택의 기본옵션이라 한다. 엄마는 너 거기서 수영 실컷 하고 오라는 카톡을 틈만 나면 보내는데 아니 한떨기 수줍은 동양인인 나한테 왜 자꾸... 닭장같은 헬스장에서 묵묵히 앞만 보고 달리는 게 훨씬 더 취향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찾아간 헬스장. 슬쩍 문을 열고 발을 디밀었는데, 어우 분위기가. 다들 엄청 살벌하게 운동하다 흘끗 나를 쳐다보곤 이내 자기의 움직임에 몰두한다. 여긴 뭐 하이 헬로우 이런 거 전혀 없네. 안도하면서도 약간 허전해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런닝머신 싸이클론 같은 인기기계들은 이미 만석이라 제일 소외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런데 다리 굴리기가 쉽지 않다. 자전거 안장의 위치가 미대륙의 건장한 인간들의 신체조건에 맞춰진 탓에 곧게 편 두 팔로 자전거손잡이를 잡고 최대한 뒤로 뺀 둔부를 안장에 걸치고 다리를 앞으로 힘껏 뻗어야 겨우 페달에 발이 닿는다. 이러면 몸통이 새우처럼 접힌다. 잠시 작동을 멈추고 안장을 옮겨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도로 안장에 앉아 새우자세로 자전거를 탔다. 너무 불편했다. 10분쯤 지나니 런닝머신 이탈자가 생겨 그쪽에 얼른 올라탔다. 여기 사람들도 런닝할 때 옆사람과 신경전을 벌이며 속력을 높이는 짓을 할까 궁금해하며 20여분을 달렸다. 운동을 마친 사람들이 자기 몸이 닿았던 기계를 휴지로 닦고 가기에 나도 따라했다.


_영구가 퇴근했다. H마트에 갔다. 한인마트다. 전직대통령 누구의 비자금이 이쪽으로 유입됐다는 말이 돌았다 한다(마트측은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거 참. 말 듣고 보니 간판의 H가 괜히 도드라져 보이잖아. 입구에서부터 시선을 잡은 건 또 불닭볶음면. 중국마트 한인마트 모두 불닭볶음면을 상석에 진열해놓은 게 재밌다. 오히려 본토보다 취급이 좋은 듯. 또다시 마트귀신에 씌어 이 코너 저 코너를 한없이 서성이다 전부터 궁금했던 미국 고구마 두 덩이를 골랐다. 한인마트에서 미국 고구마라니. 멍청한 소비였다.

코스트코에 갔다. 사람이 꽤 많았지만 뒷사람의 카트에 발뒤꿈치를 찍히기 일쑤인 지옥같은 코스트코 양재점에 비하면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무염 견과류믹스를 영구는 아이패드를 골랐다. 70달러 정도 할인된 가격. 코스트코에서 종종 애플 이월상품을 싸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계산을 하는데 점원이 당황하는 눈치다. 알고 보니 우리 물건이 우리 바로 전에 계산하고 간 사람의 카드로 결제되는 실수가 있었다. 상급자가 왔고 말 몇 마디가 오가고 문제 해결. 각종 장애 지체 돌발상황에서 ‘화’나 ‘짜증’ ‘역정’ 등의 독한 감정을 터뜨리는 인간을 아직 목격하지 못했다. 낮은 인구밀도만이 쾌적함의 원인은 아니었을 거다.

간판을 보자마자 절로 육성이 터졌다. 뭐?! 파리바게트!?! 너무나 친숙한 푸른빛 에펠탑 실루엣. 한국과 얼마나 다른가 궁금했다. 크로와상류가 약간 더 크고 과일장식도 약간 더 먹음직...탐스러운 듯도...? 잘 모르겠다. 곡물식빵 한봉지를 샀다. 한국보다 가격이 더 비싼 건 잘 알겠다. 영구가 저기도 유명하다며 가보잔다. 85도씨 베이커리. 소금커피가 유명한 대만계 체인이라 한다. 한국을 짧게 휩쓸고 간 대만 카스테라에 대한 모종의 연민과 그리움이 발동했다. 빵 세 덩이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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