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영구는 엔지니어다. 모든 엔지니어의 집에는 데스크탑이 있다. 따라서 평소 사용하던 스캐너와 와콤 펜마우스를 가져가서 영구의 데스크탑에 연결하면 한국과 동일한 작업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영구와 상의 한마디 않고 대충 짜버린 이 허술한 삼단논법. 초장부터 처참히 박살났다. 첫째. 영구는 데스크탑이 없었다. 회사에서 제공한 노트북으로 일했다. 둘째. 펜마우스를 안 가져왔다. 이로써 내 그림작업 청사진은 몽땅 수포로 돌아갔다. 방바닥에 등신같이 누워있는 무용지물 구형 스캐너를 노려봤다. 저 집채만한 고물을 10시간 넘게 싸짊어지고 여기까지 온 게 완벽한 삽질이 된 것도 모자라 또다시 10시간을 넘게 싸짊어지고 돌아가야 한다. 말도 못하게 화가 났다. 씨발 미친 머저리가 바보천치멍청이같이...뒤져라뒤져라뒤져...! 분노로 터질듯한 내 면상을 보고 영구가 말했다. 괜찮으면...BESTBUY 가볼래?


_보다 재밌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최첨단에 보다 저렴한 하이마트. 그게 베스트바이BESTBUY의 첫인상이었다. 축구장의 두 배쯤 되는 면적에 온갖 기계들이 탐스럽게 들어차있었다. 헤드폰 낀 젊은 남자 그러니까 속칭 geek으로 분류될만한 자들의 단위면적당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으나 가족단위 방문객도 적지 않았다. 모두가 비치된 전자제품을 자유롭게 주무르며 놀고 있다. 영구도 벌써 눈깔이 생선떼 만난 상어처럼 돌변해서는 이 랩탑 저 랩탑을 광속으로 넘나들며 우와 해상도가! 터치가! 커서 반응속도가! 감탄하는 데 여념이 없다. 나도 미쳐가지고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북으로 지뢰찾기를 하려다가 뭐 도와줄 거 없냐는 직원의 말에 흠칫 놀라 도망쳤다.

기술혁신에 대단히 관심 많지만 정작 기기 구매는 쓰던 게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시중의 제품 중 최저가를, 꼭 필요한지 아닌지를 수천 번 자문한 뒤, 죽지못해 지갑을 여는 구두쇠의 습속에 단단히 묶여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근검절약이란 최고로 시대착오적인 소비행태가 아닌가. 이렇게 살다 현존 최고의 기술을 단 1초도 못 누리고 죽으면 실리콘밸리의 원혼 되지 않겠나. 집 떠난 지 열흘도 안 돼서 자꾸 이런 생각이 들고 지갑 든 손끝이 달아오르는 걸 보니 여긴 진짜 소비로 미쳐돌아가는 용광로가 맞긴 맞는 모양이다. 그 열기에 나는 지금 뇌가 녹은 거다. 저 아이맥에 저 가래떡같이 미끈하게 빠져나온 초소형 스캐너를 갖추면 쾌적한 책상에서 신나게 일할 수 있을 거란 생각. 하지 말쟈. 녹은 뇌가 만들어낸 착각. 허상. 다 허상이댜.

싱거운 싸움이었다. 돈생각을 하자마자 허상은 즉각 때려잡혔다. 데스크탑에 종이그림을 스캔해 올리고 일일이 잡티를 보정하는 원시적인 작업방식에 집착하는 주된 이유는 돈이다. 추가비용 없이 집에 있는 도구만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굳이 비싼 돈주고 그 환경을 재현하는 건 청렴하게 살겠다며 삼백만원짜리 짚신을 맞춰신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다. 적절한 비유인가? 암튼 갑자기 정수리에 벼락맞듯 새삼 내 정체성을 자각했고 ‘​나는 구두쇠다’ 현재 손에 쥐고 있는 도구로 추가비용 없이 작업함으로써 구두쇠라이프의 일관성을 지켜내는 것이 유일한 지상과제로 급부상했다. 나에게는 영칠이가 넘겨준 태블릿PC와 펜슬이 있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영구에게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했다. 혹시 돈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실컷 쓰고 나서 귀국할 때 환불하면 된다고 영구가 말했다. 이들의 환불정책은 지극히 관대해서 60일 내라면 별다른 사유도 묻지 않고 막 물러준단다. 혀를 내둘렀다. 사람을 어떻게든 일단 쓰고 보게 만들려고 작정한 동네다. 혹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허상의 마지막 일격을 막아냈다!​



_켄지스시라는 곳에 갔다. 차창문 깨고 귀중품 훔쳐가는 도둑들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주차장 곳곳에 붙어있다. 소지품을 전부 배낭에 쓸어담아멨다. 홀에 들어서자마자 인조 벚꽃 장식이 눈에 띄었다. 이자카야 인테리어의 전형미가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영구가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는다. 알고 보니 음식을 갖다주는 미국 식당은 손님이 아무 자리나 가서 앉으면 안 되고 입구 쪽에서 담당직원의 안내를 기다려야 한다. 1분쯤 멀뚱히 서있다가 안내를 받고 착석했다. 롤 두 종류를 주문했다. 생각해보니까 미국에서 처음으로 크게 유행한 초밥의 형태가 캘리포니아 롤 아니었나. 캘리포니아. 이걸 또 본의아니게 원조동네에서 먹게 됐네. 허허 재밌구려~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커플, 가족 단위의 비동양인이 많았다. 대부분 젓가락질이 능숙했고(난 아직도 부끄러운 X자다!) 이 공간에서의 식사를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게 느껴졌다. 와 일본외식문화 진짜 많이들 좋아하는구나. 근데 밥이 좀 늦네. 뭐라도 나와야 옆테이블 애의 뜨거운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을 텐데. 금발 벽안의 3세쯤 된 꼬마. 아까부터 나와 영구를 번갈아 빤히 쳐다본다. 애를 향해 힘껏 미소를 보내던 영구가 입꼬리에 웃음기를 그대로 매단 채 말했다. 설마 인종차별...그런 건 아니겠지. 사실 나도 그 의심부터 들었는데 뭐 저 나이 애들은 제 부모랑 자기 얼굴과 다르게 생긴 걸 보면 “신기”하지 않겠냐. 동양인을 신기해하는 그 감각 자체가 문제고 대수롭지 않게 봐넘길 건 아니라 보지만 안 넘기면 여기서 뭘 어쩔...이라고 말하는 와중에 밥이 나왔다. 맛있었다!


_식사 후 산타나 로Santana Row라는 곳에 갔다. 뭔지 모를 유럽풍 건축양식에 야자나무 폭포수 조경 노천카페 레스토랑 명품샵 특급호텔 등 아름답고 값비싼 것들이 밀집된 고급상점가였다. 패션피플의 단위면적당 인구밀도가 확 높아졌다. 꽤 큰 돈을 지불한 자만을 이 아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신호가 거리 전체에서 뿜어져나오는 듯했다. 그 신호에 압도당하는 것만으로도 내 분에 넘치도록 재밌었다. 어둡고 인적 드문 여느 주택가와 다르게, 이 밤거리는 아름답고 따뜻한 빛덩이가 사방에 떠다니고 무방비하게 깔깔 웃으며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서들 노느라 집 근처에 아무도 없었구먼. 어디든 그렇겠지만 미국은 돈이 도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온도차가 굉장히 극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하던 차, 한참 앞에서 걸어가던 남녀가 점점 느릿느릿 끈적끈적 흐느적흐느적 사랑의 2인3각을 벌이더니만 우리 코앞까지 거리가 좁혀졌다. 서로의 얼굴을 감싸쥐고 불같은 눈빛을 나누던 그들은 곧 키스를 했다. 잡아먹을 기세로 미친듯이. 영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보대회 출전한 듯 그들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한블록쯤 지난 후 우리는 서로 엄지를 치켜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굿. 미 대중문화에서 숱하게 봐온 풍경을 드디어 실제로 봤다는 생각에 주책없이 흥이 났다. 드라마란 역시 술과 돈을 먹고 피어나는 꽃.



_집에 돌아와 할일을 팽개친 채 냉장고의 맥주를 전부 퍼마셨다.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큰일이다. 라거 에일 필스너 포터 스타우트 다 맛있어 미쳐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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