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라이
자꾸 속터지는 소리만 하니깨 애비얘길 꺼내는거아녀 이새꺄


_어쨌건 시차적응은 된 것 같다.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다. 뭉개진 계란과 잎채소 견과류 과일을 먹고 헬스장에 갔다. 출근시간대에 운동하는 인간은 단지 전체를 통틀어 한두 명뿐임을 확인했다. 런닝머신과 싸이클론을 실컷 썼다. 자전거는 거들떠도 안 봤다.


_마트 한번 혼자 걸어갔다온 것도 꼴에 모험이었다고 배짱이 붙었나보다. 자꾸 나가고 싶다. 단, 반경 5Km 내에서 6시간쯤 유지될 딱 1인분의 배짱. 없어지기 전에 얼른 써야지. 구글맵으로 주변정보를 열심히 쑤셔봤다. 마트, 잡화점, 음식점, 옷가게, 술집, 편의점, 서점, 카페...가고 싶은 곳은 너무 많은데 지도만 봐서는 목표지점까지 걸어가는 길이 안전한지 위험한지를 짐작하기 어렵다. 어쩌지. 모처럼 얻은 배짱이 벌써 쭈글탱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지도를 늘였다폈다하며 미적거리는데, 손끝에 푸르고 가는 줄기가 닿았다. 개울이었다. 남쪽으로 흘러흘러 상점가, 초등학교, 공원, 도서관을 스쳐지나가곤 이내 사라지는 개울. 제일 좋아했던 동네 산책길이 생각났다. 잡목과 수풀 무성한 뚝방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보면 동산에 폭 파묻힌 도서관이 나오던. 갑자기 도진 향수병에 힘입어 빠르게 외출준비를 마쳤다. 가자 개울로. 나가기 직전에 한번 더 구글맵으로 경로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선 쓸 일이 없어 맨날 지울까말까 고민했던 구글맵을 여기선 하루종일 주무르고 있다. 괜한 그리움에 네이버 지도를 켜봤다. 화면 전체가 허연 공백. 텅 비었다. 고향땅의 앱에서 내 위치정보가 통째로 증발되다니. 묘하게 울적하네. 또다른 지도앱을 켜봤다. 그 앱에서의 내 현위치는 동호대교다. 뭐임마??


_편의점 세탁소 주류판매점 등이 나란히 붙은 아담한 상점가 몇 군데를 지났다. 눌린 햄버거같이 질펀한 모양새의 단층짜리 상가건물에 넉넉한 주차공간이 붙어있다. 간판들이 멋지다. 보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데, 막상 왜 멋지냐는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힐 듯했다. 예를 들어 홍콩과 일본 상점가 간판이라 하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매력포인트들이 있지 않나. 힘차게 용틀임하는 대형 폰트랄지 현란한 원색의 네온사인, 건물벽과 허공에 정신없이 난립한 무질서의 미학 등등. 반면 내가 매료된 미제간판들은 뭐랄까 싱겁다. 연양갱처럼 길죽한 직사각형에 온순한 색깔의 별 기교없는 폰트들이 헐겁지도 빽빽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 여백을 남기고 새겨져있는 것들이다. 은근함. 정갈함. 소탈함. 군더더기 없음. 절박함 없음. 낡고 빛바랜 부자의 청자켓 같은. 어쩌면 난 있는 집 자식의 여유로움에 반했을 뿐인 걸지도 모르겠다.

단독주택이 가지런히 줄맞춰 늘어선 골목을 걸었다. 하늘 아래 유일한 이족보행자가 나밖에 없는 듯한 기분에 제법 익숙해졌다. 느긋하게 걸으며 집구경을 했다. 말로만 듣던 정원 딸린 미국집. 레몬과 오렌지나무를 참 많이들 심었다. 탐스러운 열매들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렸고 그 중 열몇 개쯤은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나무에 달린 건 말할 것도 없고 낙과들조차 상품성이 너무 좋아보였다. 저거 썩기 전에 주워먹어야 되지 않아? 듣자하니 안먹고 그냥 방치하는 집들이 많다고 한다. 세상에. 배부른 캘리포니아 놈들! 악착같은 우리 올드 코리안들이었어봐라 저 레몬 오렌지 싸그리 주워다가 배터지게 까먹고 얼굴에 팩 해붙이고 남는 건 효소 담갔지. 계속 걸었다. 온갖 꽃들로 정원을 화사하게 가꿔놓은 집이 있는가 하면 태양광 패널만한 선인장을 그득 심어놓은 집도 있고 농구대, 불상, 아기자기한 미니어처, 심지어 어떤 집은 큼직한 드래곤을 갖다놨다. 죽지못해 최소한의 관리만 겨우 하거나 아예 식물들 싹 밀어버리고 자갈을 깔아놓은 집도 물론 있었다. 구경하는 입장에선 재밌었지만 자신의 성향이 그대로 묻어나는 공간이 외부로 노출돼있는 것이 집주인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원을 방치하면 벌금도 문댔지 아마. 진짜 짜증나겠다. 개성은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사치재다. 돌봐줄 땅 한 뙈기 없는 한국 아파트의 척박한 몰개성을 찬양한다!

마침내 고대하던 개울가에 도착했다. 그런데,



물길 전체가 통제구역. 슬프고 궁금했다. 개울, 천, 호수, 강에 대한 한국의 기본적 인식은 ‘모두의 놀이터’이지 싶다. 아무나 쉽게 물에 접근 가능하다. 물이 사람을 모으고, 물길따라 행락지가 길게 생기고, 거기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인다. 접근금지는 예외적이다. 이에 비해 미국, 적어도 캘리포니아는 통제가 기본이고 접근허용이 예외조치로 보인다. 어디서 비롯된 차이일까. 기후? 지형? 이것도 주마다 다르겠지. 엊그제 영구가 미국의 모든 주에서 한번씩 살아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어떤 마음인지 알겠다.


_도서관에 왔다. 오전 10시에 열고 저녁 6시에 닫는다. 현재시각 9시 53분. 아직 개관 전이고 일찌감치 도착한 10여명이 닫힌 문앞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그 중 일고여덟명이 동양인임을 깨닫고 푹 뿜었다. 하여튼 저 개미같은 학구열을 어떻게 주체하질 못하는구나. 정각에 문이 열렸다. 우아하고도 포근한 곳이었다. 넓지만 책장과 독서공간이 적절히 배치돼 휑한 느낌 없고, 적지 않은 이용자가 수시로 오갔지만 어수선하지 않았다. 전자기기 하나씩 끼고 와서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그 일원이라는 게 약간 흥분되고 좋았다. 도서관에 온 뒤로 혈중소외감농도가 확 낮아졌다. 이용자의 상당수가 동양인인 게 단순히 이 집단 특유의 높은 학구열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흥분감과는 별개로 작업은 힘들었다. 익숙지 않은 태블릿PC에 낯선 그래픽작업용 어플 몇 개 깔고 손에 덜 익은 펜슬 붙들고 장시간을 고생했다. 이 버전의 기기들로 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하고 원시적인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렇게 쓰라고 만든 물건들이 절대 아닐 거라는 강력한 확신과, 더럽게 안 풀리는 수학 도형문제를 어떻게든 맞혀보려고 시험지 여백에다 도형을 한도끝도없이 그려나가는 노가다를 할 때와 비슷한 암담함을 안고 더듬더듬 일했다.

밥때가 훌쩍 지났다. 배가 고팠지만 나가자니 자리를 뺏길 것 같았다. 일을 마칠 때까지 붙어앉아있으려고 했으나 배에서 크고 해괴한 소리가 나서 소지품을 전부 싸안고 밖으로 나왔다. 1층 출입구 옆 벤치에 앉아 집에서 가져온 요거트와 과일 두세 쪽을 후딱 먹고 들어갔다. 나온 김에 화장실도 들렀다. 틈만 나면 미국 공중화장실의 불결함에 치를 떨던 지인이 있어 살짝 겁먹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지금까진 그럭저럭 쾌적한 편이다. 지인은 어딜 다녀온 걸까. 하나 신기한 건 화장실 변기칸의 문과 칸막이 밑부분이 굉장히 크게 뚫려있다는 점. 한국은 휴지 하나 겨우 교환할 정도이거나 그나마도 완전히 막힌 경우가 많은데 여긴 거의 옆칸으로 기어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화장실에서 딴짓거리하는 인간들(ex. 마약) 여차하면 기어들어가서 끌어내려고 이렇게 만들었나. 아니면...시선만 슬쩍 내려도 안에 들어간 사람의 다리가 잘 보이니까 굳이 노크하거나 문을 당겨볼 필요가 없어 편하던데, 혹시 이걸 노린 건가.

다행히도 아까 작업했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도로 앉아 또 한참을 쩔쩔맸다. 그래도,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아주 조금, 개미만큼의, 진척이 있었다. 몇 개의 단축키를 알아냈고 미끌미끌 불쾌한 터치감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다. ‘나아간다/발전한다’는 희망만한 양질의 에너지도 없다. 돈 빼고. 오전보다 한결 나아진 컨디션으로 작업했다. 그리하여 결국 폐관시간 전에 일을 끝마쳤다. 실로 간만에 느끼는 성취의 희열. 정말 기뻤다. 안 쓰던 도구로 달성한 성취라 더 기뻤다. 한국집에 있었음 맨날 하던대로 하고 남는 시간엔 또 맨날 하던 고민만 들입다 하다가 자빠져 잤겠지. 사람이 참 이게 편히 기대오던 관성이 무너지고 결핍이 오고 위기에 처해야 도전도 하고 극복도 하고 그러는구나. 앞으로는 새로운 환경에 자꾸 뛰어들어버릇해야지. 키오스크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히 볼케이노 치즈와퍼를 주문해먹는 할망구가 되어야지.


_퇴근한 영구에게 혼자 도서관 갔다온 얘기를 하니 엄청나게 날 대견해하면서 미국사람 다됐다고 한다. 미친 야 나 오늘 하루종일 입도 뻥끗 안 했는데 무슨 얼어죽을 미국인이야 했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계속 자긴 진작에 내가 미국생활 잘할 줄 알았다며 당장 디즈니에 입사원서 내라고 막 그러고 있다. 디즈니는 씨발 개뿔 야이 미친놈아......혹시 이 정도로 허황된 낙관성이 있어야 미국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건가. 그럼 난 바로 탈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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