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자동차만이 미국생활의 유일한 교통수단일 리 없다. 매체에서 숱하게 봤지 않나. 지붕뚫고 들어와서 쌈박질하는 놈들땜에 차 안이 쑥대밭되거나 차체가 통으로 납치되거나 강바닥에 처박히거나 선로이탈해서 온동네가 뭉개지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배경->다 버스와 전철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미친 짓처럼 느껴지는데 그만큼 구해주러 달려오는 히어로도 많은 동네이니 뭐 괜찮지 않겠어. 무고한 엑스트라들의 개죽음을 최소화하려는 근래의 블록버스터 트렌드까지 고려하면 겁을 좀 덜 집어먹어도 괜찮지 않겠냐 말야. 알 게 뭐냐 전철이다. 전철을 찾아보자.

_구글맵으로 보니 집에서 가까운 곳에 전철역이 있었다. 도보로 40분 거리. 샌프란시스코 업무상업 밀집지구로 향하는 칼트레인Caltrain 열차였다. 영구가 하는 말이 자기도 종종 칼트레인으로 출퇴근한다며, 말 나온 김에 내일 아침 같이 나가면 어떻겠냐 제안한다. 냉큼 그러자고 했다. 왜 이렇게 신나지. 도보-전철통근이라는 서울의 흔한 이동패턴을 여기서 재현한다는 생각만으로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

_더 흥분해도 될 뻔했다. 쨍한 하늘빛에 공기는 상쾌하고 찬란한 햇살 아래 집집마다 심어놓은 오렌지나무가 반짝반짝 빛나는...이런 말도 안 되게 이상적인 아침이라니. 그나저나 거듭 느끼지만 여기 진짜 오렌지나무를 많이들 심는다. 널린 게 오렌진데 마트에서 파는 오렌지값이 그렇게 엄청 싸지는 않은 것이 또 신기하다. 한국에선 감나무의 위상이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가지가 휘도록 주렁주렁 달린 열매하며 바닥에 퍽퍽 아무렇게나 떨어진 모습(오렌지와 달리 질퍽하게 뭉개진다는 게 아주 유감스런 차이지만) 결정적으로 정작 마트에서 사려면 그렇게까지 싸지는 않다는 것까지. 닮았다. 감. 영어로 persimmon. 아직 안 까먹었다고. 

_길따라 반듯하게 놓인 귀엽고 아담한 주택들. 차고도 있고 마당도 딸린 집에 아담하다는 표현이 적합한가 다소 의문이지만 광활한 부지에 수영장 큼직하게 파놓고 사는 내 편견 속 미국 대저택에 비하면 이곳 북캘리포니아지역 집들은 아담하다. 필요한 것만 알뜰하게 갖춘 캡슐같다. 공사중인 집을 지나치다 골조가 모조리 목조로 돼있는 걸 보고 놀랐다. 평생을 철근콘크리트상자에서 보낸 내 눈에 각목 같은 걸 짜맞춰서 집 기둥뿌리를 해올리는 건축기술은 마냥 신기하고 불안하게 비쳤다. 부실하지 않나? 화재에 취약하지 않나? 부실공사와 화재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겪어온 철콘근크리트국민 주제에 뭔 웃기지도 않는 기우질인가 싶었지만. 하지만 영구가 귀뜸해준 저 목조캡슐들의 평균시세에 이 모든 잡상은 날아가고 경악만이 남았다. 서울에서 꽤 괜찮은 위치의 신축아파트에 입주하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북캘리포니아의 미친 집값을 처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_역에 도착했다. 눈에 확 띄는 표지판도 없고 역사驛舍도 없고 역세권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상권도 없고 그냥 동네에 별 경계선 없이 푹 퍼져 드러누운 듯한 역 분위기가 재밌었다. 자동판매기에서 가고자하는 지역을 선택한 뒤 신용카드나 현금으로 값을 치르면 표가 나온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요금은 과연 비쌌다. 열차는 예정된 시각에 거의 정확히 도착했다. 2층열차의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한국 출퇴근시간의 콩나물시루지옥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래도 승객이 꽤 많았다. 태반이 젊은 IT업계 종사자로 보였다. 객실 내부는 매우 정숙했고, 잔잔한 키보드소리와 톤을 낮춘 업무통화만이 고요한 공기를 살살 흔들 뿐이었다. 내 옆에 한 인도인이 다가와 앉았다. 백에서 꺼낸 플레인요거트를 따고 뚜껑을 핥은 뒤 곧 노트북을 켜서 업무에 몰두하는 그. 흘끗 보니 핀터레스트 직원이었다. 크...멋지잖아......개흥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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