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고요한 새벽 세 시. 몇 시간째 뒤척이다 와불처럼 비스듬히 머리를 받치고 누워 멍하니 천장을 봤다. 잠도 안 오고 일도 안 되고 놀지도 못하겠네. 이놈의 시차적응 대체 언제쯤 되는 거지. 머릿속에 스모그 같은 게 잔뜩 낀 느낌 너무 더럽고 싫다. 해외출장에 대한 로망이 꽤 컸는데 노는 게 이 정도로 고되면 일하는 건 얼마나 좆같을지 상상도 안 된다. 하긴 조물주가 어떤 년인데 아무 대가없이 그냥 멋있기만 한 걸 헤프게 허용해줄 리가. 억지로 잠을 청해봐야 소용도 없을 테니 가계부 정리하고 내일 외출 동선이랑 냉장고 식재료로 만들 수 있는 식단이나 짜볼까 하고 있는데,

​​​아이휴~

어린애의 한숨소리. 펄쩍 뛰어 일어나 앉았다. 뭔 소리지? 웅크리고 앉아 고막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또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휴~ 목덜미가 쭈뼛 섰다. 씨발 뭐여 이게. 좀처럼 머리에 담을 일 없었던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귀신...? 여태껏 한 번도 귀신을 못 봤다. 귀신 이야기에도 정서적 영향을 받은 일이 거의 없다. 재미도 없고 무섭지도 않고 한마디로 나한테 귀신이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가치가 매우 낮은 소재다. 까무러치게 무서운 건 예외없이 피와 욕구가 흐르는 인간의 이야기, 인간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기십년간 기별없던 귀신을 미국에서 만나? 이야 낮엔 없는 게 없는 식재료 마트로 사람 혼을 쏙 빼놓고 밤중엔 뭔 귀신 찌꺼기같은 걸 보내서 생전 처음 맛보는 공포를 선사하다니 대단하구나 미국.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있는데 또다시 들려온 아이휴~

처음과 똑같은 음량과 어조. 유아에 가까운 어린아이의 애교섞인 음색. 기성품. 공장제 목소리. 아 이거는 방에 있는 뭔가가 고장났을 확률이 크겠다. 여기가 원래 영구의 아이가 쓰던 방이니 아마도 인형, 음성장치가 망가진 채로 어디 구석에 처박힌 인형 같은 데서 나는 소리겠지. 잠시나마 귀신 운운하며 겁에 질렸던 게 쪽팔렸다. 근데 진짜 귀신이 맞는대도 뭐. 단순노동이 빠르게 기계로 대체되는 시대라지만 녹음된 멘트를 틀어놓고 영업하는 안일한 정신상태의 귀신이 무섭겠냐. 소리의 원인에 대한 확신이 빠르게 안도감을 불러왔고...


_눈을 뜨니 오전 여섯 시. 자는 줄도 모르고 잤네. 어제 내가 굉장히 중요한 생각을 하다 말았는데. 아 맞다 냉장고 식재료. 냉장고에 계란이랑 베이컨이랑 아스파라거스가 있었지. 아침 만들 생각에 신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타국에서의 요리는 어쩐지 더 재밌다. 흔한 재료를 다룰 때조차. 베이컨을 굽고 같은 팬에 아스파라거스와 계란을 지지고 냉동실에 있던 빵을 꺼내 토스트기에 넣었다. 기름진 베이컨향이 온집안에 가득하고 연기가 막 모락모락. 엉...? 뭘 했다고 연기가 모락모락씩이나. 어이구야. 가만 보니 토스트기가 정상이 아니다 싶을 만큼의 회색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식겁해서 빵을 꺼내보니 빵은 또 하얘. 그럼 이 연기의 원인은 대체...

때르르르르릉 ​파이어. 파이어. 때르르르르릉 ​파이어. 파이어.

지축을 뒤흔들 기세로 울려대는 화재경보음에 완전히 혼비백산했다. 공항 입국심사 때 여권이 자물쇠로 잠겼을 때보다 세 배는 더한 당혹감. ​​파이어. 파이어. 감정을 전혀 담지 않은 여자의 ​불이야 경고음성이 하도 묵직하고 파워풀해서 한번 들을 때마다 둔기로 심장을 후려맞는 기분이다. 미치겠네. 몰려든 동네주민과 타운하우스 관리인과 소방수들 앞에서 더듬더듬 해명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피가 말랐다. 몇초간 어영부영하다 전기렌지에 붙은 환기팬을 틀고(팬 돌아가는 소리도 엄청나다) 창문을 열고 영구를 깨워말어 일단 한글로 해명문을 쓰고 구글번역기를 돌려말어 하고 있는데...경보음이 멈췄다. 아! 조물주어머니 감사합니다!!

영구의 방문이 열렸다. 아침부터 괜히 시키지도 않은 베이컨이니 빵같은 걸 굽는다고 설치다가 화재경보 작동시켜 미안하다는 내게 영구가 말했다. 엉? 아~아까 무슨 소리난 게 그거였구나 괜찮아 우리도 전에 삼겹살 구워먹다 몇 번 소리 났어 괜찮아괜찮아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러더니 내가 차려놓은 걸 보고는 으와~~~진짜 맛있겠다!! 고생하셨네!! 너무 고마워!! 하더니 순식간에 그걸 다 때려먹고 출근했다. 진정 리트리버같은 놈이다.


_타운하우스의 주요 공용시설로는 스파가 딸린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미국의 웬만한 공동주택의 기본옵션이라 한다. 엄마는 너 거기서 수영 실컷 하고 오라는 카톡을 틈만 나면 보내는데 아니 한떨기 수줍은 동양인인 나한테 왜 자꾸... 닭장같은 헬스장에서 묵묵히 앞만 보고 달리는 게 훨씬 더 취향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찾아간 헬스장. 슬쩍 문을 열고 발을 디밀었는데, 어우 분위기가. 다들 엄청 살벌하게 운동하다 흘끗 나를 쳐다보곤 이내 자기의 움직임에 몰두한다. 여긴 뭐 하이 헬로우 이런 거 전혀 없네. 안도하면서도 약간 허전해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런닝머신 싸이클론 같은 인기기계들은 이미 만석이라 제일 소외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런데 다리 굴리기가 쉽지 않다. 자전거 안장의 위치가 미대륙의 건장한 인간들의 신체조건에 맞춰진 탓에 곧게 편 두 팔로 자전거손잡이를 잡고 최대한 뒤로 뺀 둔부를 안장에 걸치고 다리를 앞으로 힘껏 뻗어야 겨우 페달에 발이 닿는다. 이러면 몸통이 새우처럼 접힌다. 잠시 작동을 멈추고 안장을 옮겨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도로 안장에 앉아 새우자세로 자전거를 탔다. 너무 불편했다. 10분쯤 지나니 런닝머신 이탈자가 생겨 그쪽에 얼른 올라탔다. 여기 사람들도 런닝할 때 옆사람과 신경전을 벌이며 속력을 높이는 짓을 할까 궁금해하며 20여분을 달렸다. 운동을 마친 사람들이 자기 몸이 닿았던 기계를 휴지로 닦고 가기에 나도 따라했다.


_영구가 퇴근했다. H마트에 갔다. 한인마트다. 전직대통령 누구의 비자금이 이쪽으로 유입됐다는 말이 돌았다 한다(마트측은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거 참. 말 듣고 보니 간판의 H가 괜히 도드라져 보이잖아. 입구에서부터 시선을 잡은 건 또 불닭볶음면. 중국마트 한인마트 모두 불닭볶음면을 상석에 진열해놓은 게 재밌다. 오히려 본토보다 취급이 좋은 듯. 또다시 마트귀신에 씌어 이 코너 저 코너를 한없이 서성이다 전부터 궁금했던 미국 고구마 두 덩이를 골랐다. 한인마트에서 미국 고구마라니. 멍청한 소비였다.

코스트코에 갔다. 사람이 꽤 많았지만 뒷사람의 카트에 발뒤꿈치를 찍히기 일쑤인 지옥같은 코스트코 양재점에 비하면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무염 견과류믹스를 영구는 아이패드를 골랐다. 70달러 정도 할인된 가격. 코스트코에서 종종 애플 이월상품을 싸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계산을 하는데 점원이 당황하는 눈치다. 알고 보니 우리 물건이 우리 바로 전에 계산하고 간 사람의 카드로 결제되는 실수가 있었다. 상급자가 왔고 말 몇 마디가 오가고 문제 해결. 각종 장애 지체 돌발상황에서 ‘화’나 ‘짜증’ ‘역정’ 등의 독한 감정을 터뜨리는 인간을 아직 목격하지 못했다. 낮은 인구밀도만이 쾌적함의 원인은 아니었을 거다.

간판을 보자마자 절로 육성이 터졌다. 뭐?! 파리바게트!?! 너무나 친숙한 푸른빛 에펠탑 실루엣. 한국과 얼마나 다른가 궁금했다. 크로와상류가 약간 더 크고 과일장식도 약간 더 먹음직...탐스러운 듯도...? 잘 모르겠다. 곡물식빵 한봉지를 샀다. 한국보다 가격이 더 비싼 건 잘 알겠다. 영구가 저기도 유명하다며 가보잔다. 85도씨 베이커리. 소금커피가 유명한 대만계 체인이라 한다. 한국을 짧게 휩쓸고 간 대만 카스테라에 대한 모종의 연민과 그리움이 발동했다. 빵 세 덩이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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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자동차 파는 곳이 정말 많다.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어지간한 동네는 덮고도 남을 면적에 반짝반짝한 차들이 쫙 깔렸다. 미국생활에서 차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풍경이겠다. 신발가게 같은 거지. 면허는 있지만 차가 없고 도로주행 한번을 안 해본 나는 맨발로 미국에 뛰어든 셈이다. 영구가 신발신고 일일이 들어다 놔줘야 한다. 미안해 죽겠다. 참고로 영구의 신발메이커는 혼다. 처음에는 H마크가 붙었길래 현대찬줄 알았는데 특유의 각도로 슬쩍 기울어져야 할 H가 미국선 왜 저리 펑퍼짐하게 서있나 의아해하던 차였다. 그게 혼다 마크였다. 다들 안 헷갈리나?


_내 암만 집귀신이어도 맘대로 아무렇게나 쏘다닐 기회 자체가 원천봉쇄된 건 별로 달갑지 않았다. 퇴근한 영구한테 자꾸 아쉬운 소리하기도 싫었다. 내가 백번천번 나가쟤도 영구는 천번만번 좋다고 자기도 재밌다고 하나도 안 힘들다고 할 위인이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일방적으로 부탁만 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게 유쾌해질 리 없잖아. 도보와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얼추 해결되는 관광지였다면 괜찮았을 텐데 음......그런데, 누가 나더러 나가지 말랬나? 비록 자동차위주에 총기소지가 허용된 낯선 땅이지만 인도와 신호체계를 갖춘 문명국이거늘 아무렴 벌건 대낮에 아예 나다니질 못할까. 겁 좀 작작 먹자. 심지어 구글맵을 보니 상점가가 집에서 3Km밖에 안 된다. 뭬? 3키로!? 경로도 엄청 단순해! 당장 배낭을 멨다.


_열 발짝도 못 가서 도로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마주오는 사람을 겨우 피할 수 있을 너비의 인도가 차 쌩쌩 달리는 도로 옆에 소면가닥처럼 붙어있었다. 왼쪽은 담벼락. 제발로 걷는 생물은 사방천지 나 하나였다. 총알같은 저 차들 중 하나가 인도를 덮치거나 차창을 열고 따발총을 갈기거나 칼든 놈이 다가와서 나를 해치려든대도  속수무책으로 뒤지게 생겼구나.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1/3 지점까지 개미새끼 한마리를 못 봤다. 누가 먹다버린 액티비아 플레인 요거트 껍데기가 그 길에서 발견한 유일한 인간의 흔적이었다. 그래 이왕 아무도 없을 거면 끝까지 없어라. 그때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뭘 잔뜩 싸짊어진 대추같은 동양계 할머니였다. 곁눈으로 날 재빨리 스캔한 할머니는 조금 안도한 뒤 무표정하게 갈길을 갔다. 내 행동도 거울처럼 똑같았겠지. 이곳에서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계층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_자동차천국이라지만 보행자에 대한 배려는 희한하게 한국보다 나았다. 신호등 없는 건널목이라도 보행자가 길 건널 의사를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차들이 제깍 멈춰선다. 차량의 흐름이 신호로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건너는 습관이 밴 나에겐 다소 황송한 매너였다. 운전자에게 엉거주춤 목례하고 건너편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되게 한국적 제스처네 자조하면서. 신호등이 설치된 건널목이 나왔다. 한참을 기다려도 보행신호가 안 나 주변을 둘러보니 신호등 기둥에 웬 버튼이 하나 달려있다. 이걸 눌러야 적당한 때 ‘가시오’ 신호가 떨어지는 방식이구나. 근데 미국 신호등의 가시오 인간은 자세가 좀 굽었다.


리듬을 타는 듯도...?




_처음보다는 공포가 꽤 사그라들었긴 했어도 산책을 즐길 여유를 누리긴 어려웠다. 그럴 환경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차들 매너좋고 거리도 뭐 그렇게 미친듯이 황량하고 험악하지는 않았지만 애시당초 맨몸뚱이의 도보인간을 위해 설계된 공간은 아니므로, 그로 인한 근본적인 소외감이 있다. 사람들 막 개 끌고 다니고 풀밭에 드러눕고 조깅하는 그런 곳은 대체 어딘지 그런 평화의 땅이야말로 차없으면 못 가는 곳인지 궁금해하며 길을 건너다가, 헉, 하고 놀랐다. 선명한 초록빛 잔디와 이끼의 카펫 위에 두 줄로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길. 나무 사이 탐스럽게 피어있는 형형색색의 꽃. 예고없이 펼쳐진 판타지적 장관에 어리둥절해서 이거 사람 가는 길 맞아? 하며 주춤거리고 있는데 귀에 에어팟 꽂은 조깅자가 옆을 획 지나친다. 굵은 나무뿌리를 사뿐사뿐 건너뛰며 사라지는 조깅자의 뒷모습. 와 내가 바라던 산책로를 여기서 만나는구나. 황홀경에 취해 걷다 곧 알게 되었다. 이곳이 애플 본사로 들어가는 길이었음을. 하여간 진짜 뭐든 예쁘게 연출하는 건 끝내주게 잘하는 집단이다. 길이 곧 끝나버려 아쉬웠지만.




_목적지인 중국 식료품 마트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눈을 사로잡은 불닭볶음면. “근데 여긴 껍질 깐 거밖에 없는데?” 등뒤에서 들려오는 한국말. 으 반가운 거 티내지 말자 민망하다. 한바퀴 둘러봤다. 베트남시금치 중국샐러리 용안 그외 생소한 과일채소와 소간 돼지간 닭간 소혀 돼지혀 각종내장 알 수 없는 민물생선 등등 정말 사고 싶은 것들이 너무, 너무, 너무 많았다. 간과 혀를 종류별로 사고 싶었지만 요리할 자신이 없어서 다 조리된 돼지간 통조림 하나를 골랐다. 너무 몸 사리고 있나. 한국서 구하기 힘든 파격적인 무언가 하나쯤은 사야 할 텐데. 고민하며 냉동육 코너를 살피다가 악어고기를 발견하고 멈칫. 이거다. 주저없이 바구니에 넣었다. 계산대로 갔다. 눈 한번 안 마주치고 필요한 몇 마디 단어만으로 계산을 끝낸 중년의 중국인 점원. 허허 이런...너무 좋잖아. 혈연 및 보증된 우호관계가 아닌 자에게 딱히 살갑게 굴지 않는 그 익숙한 배타성에 어쩔 수 없는 편안함을 느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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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시차적응에 실패한 건 둘 다 마찬가지지만 나는 변방의 용병이고 영구는 제국군. 너덜너덜해진 심신을 끌고 제국에 출근해야 했다. 아이고 혼자 계셔서 어떡하나. 현관을 나서며 영구가 말했다. 몇날며칠 말없이 혼자 처박히기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짓이니 걱정말고 네 컨디션이나 챙기라 했다.

집은 너무나 고요했다. 새소리 바람소리만 아련히 들려왔다. 미국의 평일 낮시간대 집구석 원래 이렇게 소음공해 청정구역인가? 황금같은 이 침묵 한 허리를 버혀내어 서울의 내 이웃들 샷시공사할 때 굽이굽이 펼 수만 있다면 뭐라도 팔겠다. 글쓰고 낙서하고 콘티짜다 지겨워져서 TV를 켰다. 영어가 왱알앵알 쏟아졌다. 들리는 단어가 적지는 않은데 그 의미가 좀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머리통만 그냥 대충 휘젓다 나가버린다. 빡세게 공부하면 언젠간 다 들리겠지. 지금은 말고.

FUCK! ​꾸벅꾸벅 졸다 아는 단어가 튀어나와 고개를 드니 아는 얼굴. 고든램지였다. 미국까지 와서 굳이 카스 찾아먹는 기분이 들어 채널을 돌렸다. 이번엔 수의사가 주인공인 일종의 리얼리티 쇼가 나오는데 어이구야. 동물의 피 상처 뼈 내장이 그대로 다 나온다. 등에 입은 치명상이 곪아들어가는 개가 등장했다. 의사가 개 등짝을 여드름 짜내듯 양 엄지손가락으로 힘껏 누르자 알밤만한 애벌레들이 환부에서 삐져나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어떤 장면에도 모자이크는 없었다. 으와 미국TV 완전 스파르타네. 이에 비하면 시청자들 놀랄까봐 모자이크로 꽁꽁 싸맨 한국방송은 이유식이다.


_잠은 거의 못 자는데 끼니는 한국밥때 미국밥때 둘 다 적용하여 이중으로 챙겨먹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산 whole milk의 유지방이 혈관을 타고 달려 배 옆구리 허벅지에 착착 들러붙는 감각. 너무나 불쾌했다. 하지만 원치 않는 짐이 붙는 불쾌감은 아끼던 게 깎여나가는 고통보단 나은 편이었다. 통보메일 받은 이후로 깎인 고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금이 간 내 밥그릇. 한물간 내 상품성. 내 가치. 커리어 좆됨의 서막.

엊그제 했던 영구와의 대화를 곱씹는다. 미국 IT업계의 똑똑한 놈들 때문에 먹고살 길이 점점 막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술발달로 진입장벽이 벌어진 틈을 타서 얼렁뚱땅 업계에 발을 디딘 내가 할만한 푸념인가. 나도 IT기술의 수혜자라고. 혜택 만료시점이 코앞에 닥쳤다 뿐이지. 인간의 정신작용을 시청각 상품으로 만들어 복제 배포하기 점점 쉬워지는 만큼 세상은 점점 재밌어지고, 창작자 개인의 상품성은 점점 빠르게 소진된다. 수백 수천 수만개의 쥐구멍에 짧고 강렬한 볕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었다 사라진다. 지속 가능한 볕들날을 원하거든 최신 동향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볕들 거라 예상되는 지점으로 잽싸게 옮겨가 구멍을 파는 행동력을 발휘해야 할 텐데......가능할까? ‘잽싸게’는 나와 가장 거리가 먼 부사다. 내가 지금 이 글을 며칠째 붙들고 있는지 아는가. 블로그라는 화석화된 매체에 표현 어휘 맞춤법 하나하나 골머리 썩여가며 그래픽자료 한점 없는 글을 느릿느릿 써올리는 비효율적 행위에 애착을 느끼는 성향 자체가 이미 망조 아닐까. 매체를 초월하는 가치를 지닌 개인은 극소수다. 그 극소수에 들어갈 가능성? 내가 또 세상에서 제일 못 견디는 게 높은 경쟁률이다. 경쟁도 못해 느리긴 드럽게 느려 그렇다고 방맹이 깎는 노인처럼 누가 뭐라든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는 소신도 없어 우와 어떡하지? 내 인생 어떡하지? 씻으면 좀 나아질까?


_샤워를 하니 한국과 다르게 물 닿은 피부의 마찰력이 높아지고 머리칼이 뻣뻣하게 엉킨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경수와 연수의 차이인가. 십수년만에 린스를 썼다.

화장실문을 여닫다 뭔가 신경쓰이는 점이 있어 문을 다시 살펴보고 다른 방문도 확인해봤다. 모든 문짝의 아랫부분이 노트 하나쯤은 수월히 넣었다 뺄 수 있을 정도의 홈이 뚫려있다. 여기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고 안에 사람이 있나없나를 알 수 있는데, 용도가 그것뿐일까. 다른 집도 이러나. 현관문은 실리콘 같은 걸로 막혀있는데 저걸 뜯어내면 똑같이 홈이 뚫렸을까.

현관엔 신발 신는 영역과 벗는 영역이 따로 없다. 그냥 똑같이 평평한 목재 마루바닥이다. 하지만 영구네는 신발을 현관문가에서 벗고 들어가는 ‘한국식’ 생활을 한다. 다른 집들은 어떨까. 미드에서처럼 밖에서 신던 신발 그대로 침대까지 올라가는 생활을 하는 집이 많을까. 그 몰상식한 습속의 정당성을 한번도 속시원히 들어본 적 없다. 누가 좀 설명해줬음 좋겠다.

천장 쪽에서 휑-하는 바람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린다. 벽 높은 곳 여기저기에 뚫린 통풍구로 더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다. 중앙에서 보내주는 온풍과 냉풍으로 실내온도를 조절하는 시스템인가보다. 좀 덥다 싶어 벽에 붙은 온도조절장치의 액정화면을 보니 75도. 아 맞다 얘네 화씨 쓰지. 하긴 마트에서 사온 음식에도 죄다 갤런 파운드 온스 붙어있고 자동차 계기판 속도표지판은 마일. 으 성가신 도량형 야만인들.​ 네이버 켜고 화씨 섭씨 변환을 눌렀다. 화씨 75도=섭씨 23.888...도. 65도로 내렸다.

빾!!!!!!! 갑자기 공기를 찢는 경보음에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는 신호였다. 아 뭔놈의 종료음이 이렇게 공격적이여. 그러고보니까 이 집의 엘리베이터 신호음을 듣고도 흠칫 놀랐었네. 날카롭고 건조한 빾! 소리. 모난 부분 다 깎아낸 딩동-멜로디에 ‘지하 10층입니다’ 간드러진 여자의 음성이 동반되는 한국의 엘리베이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네. 공항 착륙부터 지금까지 들었던 무수한 미국의 신호음 중에 음계를 지닌 것이 있었던가. 사람을 각성시키는 목적에 충실한 외마디 빾!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과연 미국은 비트가 팔리는 나라고 한국은 곧죽어도 가락, 멜로디 장사인 건가. 시계를 보니 슬슬 영구가 퇴근할 시각.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넣고 취사버튼을 누르니 딩동댕~백미,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곱다. 눈물나게 고운 소리다. 고객님들 기죽을까봐 영롱한 멜로디에 나긋나긋한 ‘여성성’을 꼭 첨가해주는 한국의 신호음 또한 이유식이다.

별것도 아닌 걸 갖고 한국은 이런데 미국은 저렇네 비교 일반화하는 거 오지게 싼티나지만 재밌어서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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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누구랑 만나도 앞으로 뭐해먹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공포가 느껴져
영구 - 맞아 다 그래
나 - IT기술발달이 모든 산업의 사이클을 단축시키는 거 같애 내 수명도 덩달아 단축되는 기분이야
영구 - 소비자와 창작자의 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라잖아 이러다 진짜 뇌를 서로 직접연결하는 시대도 먼 일이 아니겠어
나 - 만인의 만인에 대한 콘텐츠 전쟁 시대인 거지 으 존나 피곤하게 진짜
몇년 전에 어떤 강연에서 청중 하나가 질문을 하는데, 자기가 아이디어는 끝내주는데 그려만 놨다하면 너무 구려서 못 봐주겠으니 상상한 게 그대로 출력되면 좋겠다는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강사가 딱 그러더라. 그럼 우린 다 좆된다고. 창작물을 내놓기까지 상당기간 지겹고 고통스런 수련을 해야 한다는 게 이 바닥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데 그게 없어지면 어쩌냐는 거야. 근데 진짜 어쩜 좋냐 점점 좆되는 방향으로 가는 게 확실시되는데
영구 - 그러니까 옛날엔 인간의 미숙함 뭐 비합리성 이런 걸로 인한 시장의 변동을 잘 이용해서 돈벌 기회가 꽤 있었는데 인제는 그런 게 점점 줄고 있어서
나 - 저새끼들 때문에

창밖에 흘러가는 나사 구글 애플 본사건물을 노려보며 그런 대화를 했다.

나 - 똑똑한 새끼들


_세이프웨이에 다시 갔다. 식료품 쇼핑은 언제든 대환영이다! 옐로우스쿼시(노란애호박) 망고 6알 IPA맥주 6병묶음(여기 세트들은 왜 이렇게 6의 배수가 많지) 전부터 궁금했던 콩으로 만든 비건 요거트를 샀다. 건강식 먹고 늘린 수명 음주로 깎아먹자는 의지가 돋보이는 구매목록이었다. 그런데 100% organic임을 어필하는 상품이 정말 많다. 신선식품은 말할 것도 없고 가공식품, 과자류, 심지어 맥주조차 오가닉 맥주가 있다. 몸에 좋고 자연친화적일 듯한 상품을 소비하고픈 욕구와 상품을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고자 하는 욕구의 야합대잔치는 여기나 저기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쿠키들을 구경하는데 왼쪽에서 감지되는 강렬한 시선. 고개를 돌리니 금발 벽안의 꼬맹이 하나가 팔짱을 딱 끼고 서있었다. 6살쯤 됐을까. 그 또래 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동작 - 찢어지는 영업미소와 함께 안녕~! 하며 두 손 흔들기 - 을 해놓고 아차싶었다. 에고 안녕이 아니라 Hi였지 참. 내 행동을 지켜보던 꼬마는 같잖다는 듯 썩소를 짓곤 제 엄마 쪽으로 달려갔다. 허허 저 맹랑한 것이 저...! 인종차별 쪽으로 잠시잠깐 생각을 뻗치려다가 쯧 뭐 굳이, 하고 돌아섰다.


_잠자코 계산만 하고 넘어가는 점원이 드물다. 가벼운 농담과 적당히 따사로운 관심을 대화에 자꾸 섞어준다. 아이구 정말 너무나도 고맙고 스윗한데, 듣기평가 실력이 엉망진창인 내게 봉투 줄까? 영수증 줄까? 이외의 말은 아무리 호의가 넘쳐도 점수깎일 위기로밖에 안 느껴진다. 자꾸만 영구의 뒤로 한발짝 물러나는 내가 싫다! 영어왕이 되고 싶다!! 하지만 저녁에 들른 중동음식점에서 나는 팔라펠 영구는 슈와마를 각기 다른 창구에서 받아와야 하는 상황이 됐고, 서버가 소스 국자를 들어올리며 나한테 뭐라고 물어본 걸 또 못 알아들었다. 진땀을 흘리며 쏘리? 하고 있는데, 내 바로 뒤 인도인이 spicy? 라고 알려줘서 다급히 끄덕끄덕 OK. 덕분에 향신료를 잘 머금은 팔라펠이 완성됐다. 음식 받고 돌아서며 뒷사람에게 개미만한 목소리로 땡큐를 날렸는데 못 들었겠지.


_배도 채웠겠다 미국에서의 첫 여흥은 뭘로 스타트를 끊을까. 영구가 이것저것 제안을 해줬는데 보아하니 영화관에 가고 싶은 눈치다. 업무와 육아에 지쳐 영화에 온전히 집중한 게 기백년 전일 테니 그럴 만하다. [알리타:배틀엔젤]을 보기로 했다. 이미 본 영화지만 자막없이 봐야 하는 점을 생각하면 한 번 봤던 게 훨씬 낫겠고 몇몇 액션시퀀스를 다시 보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미국의 관람환경이 궁금했다. Amc라는 체인영화관에 갔다. 티켓값은 보통이 대략 16달러쯤으로 한국보다 훨씬 비싼데 시간관계상 그보다 더 비싼 돌비 특별관(21달러)에서 보게 됐다. 돈값을 하더만. 안락한 좌석 앞뒤로 두꺼운 벽이 놓여있어 뒷좌석 인간의 발차기가 완벽히 차단되는 구조에 몸통이 울릴 정도로 육중한 사운드(격한 장면에서 좌석이 진동하는데 그건 몰입에 방해됐다). 영화는 2차관람이 더 좋았다. 사운드 훌륭했고 원작팬 특유의 이상한 심통과 초조함 아니꼬움 같은 것도 다 휘발됐고 자막을 거치는 과정에서 손실됐던 감정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혹시 상당수의 대사를 놓칠 각오하고 자막없이 영화관람하는 것보다 화면->자막->화면으로 정신없이 눈알을 굴리는 와중에 놓치는 영화적 재미가 더 큰 것일까. 그나저나 미국의 알리타 관객들은 한국보다 흥겹고 웃음이 많네. 강아지 나올 때 다 같이 ‘어우~❤️’ 알리타가 초콜릿 먹고 좋아할 때 ‘와하하깔깔깔’ 알리타의 전투력에 쫄아붙은 남자들의 표정이 클로즈업 될 때 ‘크핬하핬하핬하하!!’ 참 미국 극장광고는 영화예고편만 잔뜩 나오더라. 그것도 영화에 따라서는 거의 한편 다 보여줄 기세로 길게. 덕분에 궁금했던 개봉예정작 샘플러 실컷 맛봤다. 실은 무엇보다 영구가 영화에 만족해서 다행이다.


_소비대국에서 하루종일 소비하고 노닥거리니 천국이 따로 없구나. 귀가하는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메일함을 열자마자 피가 얼어붙었다. 작업물의 사이즈가 기존보다 축소되고 고료가 깎인다는 통보였다. 들떴던 기분이 바로 시궁창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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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너무도 아름다운 햇살아래 납작하고 정갈한 디자인의 주택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가로수의 나뭇가지들은 더없이 복잡하고 대담한 형세로 허공을 수놓는다. 숱많은 할머니의 파마머리 같다. 인도를 질펀하게 침범한 관목들도 많았다. 저 호방한 기세를 좀 봐. 한국의 도시식물들은 가지모양도 규칙적이고 규격을 준수하고...암튼 뭐랄까 좀 조신하게 제자리를 지키게끔 강요받지 않나. 지독히 인간편의적인 억측이겠지만 솔직히 그 강요를 그리 힘들어하는 것 같아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얌전한 정물로 기능하다 도저히 못 견딜 땐 조용히 죽어버린다. 아이구 나 지금 벌써부터 자학모드+천조국의 모든 것에 알아서 감탄할 준비가 너무 잘 돼버렸구만. 그게 좀 아무래도...기획부동산의 농간에 놀아나 덜컥 한반도를 사버린 단군X쑥마늘로 연명한 미련곰탱이의 후손이라서요.


_영구가 사는 타운하우스는 정말 아름답다. 좁지 않은 집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있고 코앞에 공용수영장, 바베큐 그릴, 헬스장, 그리고 거위가 노니는 호수가 있다. 헌데 정갈하디 정갈한 이 동네의 그 어떤 골목에도,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비친다. 유일한 보행자는 나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는데, 사람이 나타나면 그건 또 그거대로 공포였다. 저새끼는 정체가 뭔데 평일 근무시간에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야. 그쪽에서도 나를 보면 같은 생각으로 무서우려나. 아니겠지. 가장 만만한 사냥감은 겁에 질린 동양여자일 것이다. 아 씨발 빨간색 쿵후 도복이랑 황비홍 변발가발 가져올걸. 도복입고 가발쓰면 세상 다시없을 또라이 미친년처럼 보일 자신 있는데. 아 그럼 체포되려나.


_ 한국이었으면 골백번 걷고도 남았을 거리를 무조건 차로 이동했다. 사실상 차 없이는 북미 문화권을 사람답게 즐기는 것이 불가능한 듯했다. 어쩌면 총기소지가 허용된 나라에서의 자동차란 더없이 쓸만한 방탄조끼 아닌가 싶기도 했다.


_ 코스트코에서 흰계란(희한하게 한판 24개였음)과 귤 한봉지와 우유와 양고기를 사고 세이프웨이Safeway에서 펜넬과 엄청나게 뚱뚱한 가지와 겨자잎과 주전부리 약간과 맥주를 샀다. 아하 미국 마트 이런 거였구나. 이런 거였어. 내가 원했던 모든 고기 채소 맥주 향신료가 흐드러지게 진열돼있었다. 너무 황홀해 얼이 나갈 뻔했다. 코너를 도니 베이커리 파트가 나왔는데, 와 이건 그냥 천국의 풍경이로구나. 크고 먹음직한 갈색 덩어리의 향연. 어떻게 이런 압도적인...아...하여간 이들의 식료품 진열방식엔 뭔가 정말 압도적인 데가 있다. 다 먹어치우고 싶은 나머지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나왔다. 알다시피 풍요 앞에 몸둘 바를 모르는 쑥마늘의 후손이라니까요 글쎄.


_그리고 어마어마한 비닐 휴지 플라스틱 쓰레기와 음식물찌꺼기를 한데 뒤섞어 버리는 극악무도함에 기절했다. 님들 부디 저승에선 무색플라스틱 색깔플라스틱 스티로폼 종이 비닐과 게 조개 굴 새우 수박 자몽 오렌지 귤껍데기 등등을 골빠지게 분리하여 정해진 요일에 내놓아야 하는 수거지옥에 빠지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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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그렇게 작고 초라하지 않더만 샌프란시스코 공항. ​​다만 조금 어두침침했다.


_입국심사대에 줄을 섰다. 하도 흉흉한 사례를 많이 주워들은 탓인가. 시키는 거 다 했고 허가도 다 받았고 체류지 체류기간 목적 등등 누가 봐도 모든 항목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있으니 별일이야 있겠냐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지뢰를 클릭하기 직전과 비슷한 불안감이 들었다. 대기인원이 상당히 많았고 진행속도도 더뎌서 지겹기 짝이 없었으나 앞사람이 줄어들면 줄어드는대로 식은땀이 났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잖아......​맴! 갑자기 웬 경찰이 나를 불러 화들짝 놀랐다. ESTA허가를 받았냐고 묻고는 무인기계코너를 가리키는 경찰. 허리춤의 권총에 얼핏 시선이 갔다.

알고 보니 그냥 정해진 절차를 지시하는 거였는데 첫빠따가 나였을 뿐이었다. 괜히 긴장했네. 뒷사람들과 함께 우루루 기계로 몰려갔다. 여권정보를 스캔하고 얼굴사진을 찍고 지문날인을 하면 영수증 같은 데 내 신상정보가 출력돼 나오고 그걸 심사창구에 가져가면 인터뷰가 시작되는 거다. 그런데 지문이 안 찍힌다. 손가락을 서너 번 뗐다 붙여도 기계가 지문인식을 못 한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관공서에서 지문 찍을 일이 있을 때 종종 듣는다. 선생님 지문이 좀 흐리시네요. 지문이 흐리다는데 뭐라 대꾸할 말도 참 마땅찮어. 그러게요...하고 쓴웃음짓는 거 말곤 뭐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 내게 원래 흐린 사람들이 있어요, 하고 짐짓 자비로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몇번이고 지문을 다시 찍게 했던 조국의 친절공무원이 생각났다. 과연 미국도 흐리멍텅헌 지문을 가진 동양여자에게 짐짓 자비를 베풀어줄 것인가. 의문에 화답하듯 네다섯번째 시도에서 마침내 지문이 인식됐다. 쾌재를 부르며 출력된 결과를 확인하는데, 내 신상정보 전체에 대문짝만한 엑스표가 그어져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건 원숭이도 알겠다.


_구글에서 검색해보니 이 엑스표는 지문인식에 문제가 있거나 추가적인 서류 체크가 필요하거나 무작위 심사가 들어갈 경우 등등에 표시될 수 있다며 짐짓 자비롭게 위로한다. Don’t panic. 그랴......덕분에 덜 불안해졌다. 곧 인터뷰다. 드디어 영어를 입에 올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시 식은땀이 났다. 야 이렇게 새가슴이어서야. 저짝에 저 영어 한마디 못하는 인도 중국 할매들도 잘만 통과하던데 나라고 못할 게 뭐여. ​Next! 심호흡을 하고 심사관 앞에 섰다. 히스패닉으로 추정되는 울적하고 피곤한 표정의 중년남자.

질문이 시작됐다. 윽 씨발. 첫 질문부터 못 알아들었다. 송구스런 표정으로 익스큐즈 미?하고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하니 남자가 아주 그냥 지긋지긋하다는 듯 천천히 반복했다. ​하우, 아, 유. 세상에. 그렇게 부정적인 표정으로 내 안부를 물어봐주는 인간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허둥지둥 답했다. 파인, 땡큐. 앤유?를 붙일까말까 고민하다 입을 닫았다. 그것까지 붙이면 그야말로 한국식 영어공교육에 세뇌된 얼간이 인공지능처럼 보일 것 같았거니와 심사관의 안부 따위 진짜 털끝만큼도 궁금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무탈히 벗어나고픈 마음이 너무너무 커서 실성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따위에 관심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애써 물어봐줬으니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한가롭게 자문할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질문공세가 시작됐는데 한번에 이해한 게 반도 안 됐다. 발음과 억양과 스피드 전부 낯설었다. 미안한데 못 알아들었다는 말을 반복했고 심사관은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즈려밟듯 다시 물어봤다. 그제야 좀 들렸다. ​너 어디 사니. 어디서 지낼 거니. 미국에 얼마나 있을 거니. 아는 사람 있니. 그 사람 미국시민이니. 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니. 짐은 그게 다니. 달러는 몇푼 가져가니. 신용카드는 있니. 알아듣은 질문엔 제깍제깍 답했고 적절한 단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을 땐 나의 성실함과 무해함을 당신께 온전히 전해드리지 못해 속터져 죽겠다는 듯 찌푸린 미간에 손을 짚었다. 솔직한 답변에 심사관이 석연찮은 반응을 보일 때마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뒤쪽의 조사실로 끌려갈까 두려웠다. 이것저것 계속 묻고 했던 질문도 몇번씩 더 반복하던 심사관의 새로운 질문. ​너 직업이 뭐니. 순간 멈칫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Writer? Artist?(윽!!) 잠깐만 만화가가 뭐였더라......아. Cartoonist. Cartoonist. 심사관이 눈을 찌푸렸다. ​What? 카 투 니 스 트. ​Oh, you draw? 예아... 심사관은 잠시 흠, 하더니 내 여권과 기타서류를 시뻘건 주머니에 쓸어담고 주둥이에 자물쇠를 철컥 잠갔다. 헉?! ​이 주머니 가지고 A구역으로 가. 안녕. Next!

좆된 거 맞지 이거.
​​​




_A구역 입구에 infection 어쩌구 씨앗 및 식품 등 반입금지 품목 저쩌구 써놨던데 나 무슨 감염위험군으로 분류된 건가. 혼란과 공포. 그런데 담당 직원들의 분위기는 어째 아까보다 화기애애하다. 그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빨간 주머니를 건네니 가져온 짐을 전부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으란다. 배낭을 올려놓자 직원의 눈썹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과장되게 휘었다. ​Only one backpack? 예아... 짐이 진짜 하나뿐임을 확인한 직원은 동료를 돌아보며 ​one backpack~하고 피식 웃었다. 아니 다들 대체 짐을 얼마나 싸짊어지고 다니길래 저래. 일만 아니었음 비닐봉지 하나로도 충분했어 이 양반아.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한 가방이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직원이 가방을 좀 뒤져보겠단다. 슈어 하고 한발짝 물러서있는데 직원이 가방 밑바닥에서 작은 비닐뭉치를 꺼내더니 천천히 자기 눈높이로 올려들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니......??

씨발 진짜 좆됐구나.

큰엄마가 준 단감 까먹고 남은 씨앗 몇 알과 500ml 물병에 뚜껑 대신 꽂아두면 서서히 찻물이 우러나오는 원뿔형 플라스틱 티백 쓰레기였다. 지퍼락에 넣고 돌돌 말아 배낭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직원은 봉지에서 끄집어낸 씨앗을 살펴보며 다시 물었다. ​이거 뭔데? 그것은 과일...과일 씨앗... ​무슨 과일? 감인데...아 감...가만있자 감이 영어로...? 와 씨발 이걸 어쩌냐 감......감이 영어로 뭐지??!? 나는 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먹지만 내 돈 내고 사먹을 생각은 들지 않는 과일이다. 따라서 영어명에도 전혀 관심없었다. 석류! 석류는 안다! 좋아하니까! 퍼머그래냇! 아 내가 진짜 석류도 아는 사람인데...제발 석류를 물어봐줘...!!! 내 맘도 몰라주는 야속한 직원. 감씨에 시선을 박은 채 다시 묻는다. ​너 이거 심을 거야?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노우! 네버! ​흐음. 이번엔 녹차 플라스틱 티백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관찰한다. ​이건 또 뭐니? 혹시 땅에 꽂으면 싹이 나는 거니? 노우!! 그거 코리안 녹차 티백이고, 사용한 거고, 그냥 쓰레기야!! 다 쓰레기야!!! 까먹고 있었어!!! ​​​흐음... 잠깐 생각하던 직원이 짐짓 자비롭게 말했다. ​그럼 다 버려도 되지? 이것들을 갖고 있는 건 좋지 않아. 오 물론이지...땡큐...! 감씨와 티백을 쓰레기통에 버린 직원은 빨간 주머니의 자물쇠를 열어 내 여권과 서류를 꺼내줬다. 와. 긴장이 탁 풀렸다. 살았구나. ​잘 가. 땡큐를 외치며 꾸벅 인사했다.


_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영구와 상봉하고 바로 우버를 호출했다. 2분도 안 되어 빨간 토요타가 왔다. 영구의 집으로 출발. 뭐라고 표현할까. 그냥 이게 다 뭔가 싶고 모든 게 현실감이 없었다. 퍼뜩 정신차리고 네이버 검색창을 켰다. ‘감을 영어로’ 아. persimmon. 퍼시먼이라고 하는구나. 되게 감같지 않네. persimmon. persimmon.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숱하게 보아왔던 주택, 상점, 도로, 간판과 광고판의 폰트, 나무와 수풀이 차창 밖에 흐르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persimmon. persimmon. 평생 까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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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여벌옷 하나에 기초세면도구만 챙기고 집에 있는 작업도구(오래된 평판 스캐너, A4 연습장, 펜마우스, 이면지 약간, 태블릿PC, 스마트폰 공기계)를 싹 다 구겨넣으니 배낭 하나가 꽉 찼다. 여기다 추가로 뭘 더 달고 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이걸로 끝냈다. 가방 깊숙이 여권과 허가서류를 밀어넣었다. 한국여권은 쓸모가 많아 노리는 자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_공항철도에서 시선을 잡아채는 미모의 소유자들은 대개 한국 승무원이다. 인천공항의 미모 또한 대단하다. 있는 힘껏 화려하고 쾌적하고 매끄럽고 반짝인다. 한국 공항 정말 좋지? 아마 미국 도착하면 실망할지도 몰라. 공항이 너무 작고 초라해서. 영구의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이라면 그게 진정한 멋이네. 예쁘장할 의무를 못 느끼는 존재의 자유와 위엄. 근데 그런 자유야 아직 뭐 딴나라 얘기고, 당장은 눈앞에 펼쳐진 내 조국의 가련한 으리으리함에 혹하고 봐야겠다. 면세점 술담배 선물용 초콜릿 영양제 미니자개장 색동치마저고리를 입은 구닥다리 인형 따위를 대충 둘러보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길안내 로봇을 쫓아다니며 말 몇 마디 걸어보고 VR체험카페에서 게임을 좀 하다가 기계팔뚝이 내려준 2천원짜리 커피를 마셨다. 맛있었다. 엄청 미래인간된 기분이었다.

내심 걱정했던 건 공항 내 음식값이었다. 성의없는 국밥 비빔밥따위를 이삼만원주고 사먹어야 되면 어쩌지. 차라리 굶자. 나름 비장하게 각오했는데, 눈앞에 떡하니 편의점이 나타났다. 쌍수들고 달려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익숙한 공장제 저가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인천공항이 이루어낸 최고의 진보라고 느낄 정도였다. 체류지에서 먹을 가능성이 가장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부초밥을 사먹었다.


_영구와는 좌석이 떨어져있었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영구는 정말 착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주저없이 꼽을만큼 무골호인이지만 죽고 못사는 사이라도 10시간 붙어있는 건 부담된다. 머리 위 선반에 배낭을 밀어넣고 선반 뚜껑을 힘껏 닫는데 콱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놀랐다. 다들 선반에 짐을 놓고 뚜껑을 슬쩍 누르듯 닫는 걸 보니 큰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잘 잠기게끔 설계되어있나보다. 그런 걸 나는 무슨 찦차 트렁크문마냥 후려닫았으니...... 내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미숙하게 느껴졌지만 괘념치 않으려 애썼다. 자학하지 말자. 자학하지 말자.


_십몇년 전 이코노미석은 상당히 불편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의외로 편했다. 십몇년 전 이륙 땐 기체 진동이 심해서 이대로 공중분해되겠다 싶었는데 이번엔 덜 무서웠다. 미국행 비행기가 더 좋은 건가 나이 탓에 적당히 무뎌져 그런 건가. 다 나름 영향을 미쳤겠지만 인간의 집중력을 빨아먹는 데 갈수록 능숙해지는 IT기술이 주된 원인인 것 같다. 영화/TV/다큐/스포츠/게임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체 전방과 하방의 실시간 상황도 관찰 가능했다. 이것저것 눌러보다 영화에 안착했다. 라인업이 좋았다. 궁금하긴 한데 극장 가서 볼만큼의 강렬한 끌림은 없었던 영화들이 알차게 모여있었다.

​[그린북] 양아치 백인과 교양있는 흑인의 로드무비라는 시놉시스를 듣자마자 자동연상되는 모든 장면이 담겨있다. 어처구니없을 지경으로 뻔했지만 누누히 말했듯 뻔한 건 잘 먹힐 확률이 높다. 막판의 크리스마스 장면 진짜 최고로 뻔하고 역하고 근지러웠는데 보다 울었다. 다른 인종끼리 막 정을 나누고...상부상조하고...그런 거 너무 흐뭇하잖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기만적인 영화였다. 현실의 불미스런 잡음을 알고 보니 더더욱.​ [미스터 스마일]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영화를 각잡고 본 건 처음인데 하필 그게 은퇴작. 와 근데 너무나 곱고 우아한 할아버지다. 할배가 웃으면 정말 사방천지가 봄햇살 내리쬐듯 환해지며 뭐든 퍼주고 싶어진다. 젊었을 때 영화를 더 찾아봐야겠다. 상대 할매의 관상도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헉 76년작 캐리의 주인공 양반이었다!)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 악평에 비해선 그럭저럭 괜찮다 싶더니만 갈수록 좆같았다. 남의 집 자식 롯데월드 놀러간 홈비디오 보는 느낌이었다. 존나 지겨웠는데 한번 재생한 영화는 끝장을 봐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8배속으로 봤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 [퍼스트맨] 때 라이언 고슬링보다 인상적으로 봤던 클레어 포이 실컷 봐서 좋았다. 영화는 차갑고 슬펐다. 복지천국 북유럽 다 쓸모없다 그저 계집들은 국적불문 고생인 것을. ​[스타 이즈 본] 극장에서 봤는데 둘이 눈맞는 장면이랑 shallow 공연장면 다시 보고 싶어서 봤다. 레이디가가 몇번을 다시 봐도 멋지다. ​[한국인의 밥상] 그치 한국인이라면 이거 미국 가기 전에 꼭 봐줘야지. 이번 편은 남도의 해초와 조개밥상이었다. 내 동포들 왜케 칼로리 낮은 것들로만 연명했는지 진짜 맥앤치즈를 위시한 온갖 칼로리폭탄 정크푸드의 나라로 향하는 한마리 후손으로서 정말 너무나 면목없고 송구스러워 눈물이 났다.


_잠이 들락말락하는 비행 네다섯시간째, 기체가 크게 진동했고 안전벨트를 매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요란하게 울려퍼져 벌떡 일어났다. 몇 시간동안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초긴장상태로 있었다. 옆자리 인도남자가 앞자리에 얼굴을 파묻고 기도하기에 불안감은 한층 더 심해졌다. 진짜 여기서 죽나보다, 태평양 한가운데가 내 무덤자린가보다 했는데, 곧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하는 자세로만 숙면이 가능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기체는 곧 안정을 되찾았지만 한숨도 못 잤다.


_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 기내에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가 울려퍼졌다. 비몽사몽 중에도 전율이 일었다. 진짜 창작자들 중 뮤지션만큼 즉각적으로 사람 미치게 하는 종족이 없다. 부러워 죽겠다.


_남들 다 하는 여행에 들떠서 온갖 것들을 상세히 적는 행위 자체가 너무 촌스러운 것 아닌가 싶지만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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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출국날이 갑자기 정해졌다. 여권 만료된지 기십년이라 부랴부랴 구청에 달려갔다. 귀찮고 돈아깝고 시간없어서 만원짜리 지하철 즉석사진을 찍었다. 기계에 현금구멍 카드구멍이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카드는 멕이는 족족 토해내고 현금 만원권만 얄밉게 날름 삼켰다. 순식간에 사진이 나왔다. 못 나올 줄은 알고 있었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쁘게 나오든말든 관심없어진지 오래다. 그런데 이거는 어...잘나오고 못나오고는 둘째치고 얼굴이 너무 크다. 이렇게 커도 되나? 사진에 여백이 거의 없다. 시커멓게 산발한 머리에 하필 또 검정폴라티를 입고 찍어서 목조차 없다. 거대한 쌍판만이 공중부양중이었다. 규정위반 아냐? 아 뭐 얼굴만 크게 강조되면 식별하기 좋지 않겠어 출입국 직원들 가뜩이나 구별도 안되는 동양인들 얼굴 뜯어보느라 눈도 침침할 텐데 마 내가 친절하게 확대해줬으니까 잔말말고 통과시키라고 자빠져버리면 지들이 어쩔 건데. 재촬영으로 돈과 시간을 또 날리기 싫은 마음이 대책없는 허세를 빚어냈다. 이런 건 대부분의 여행기에서 불행의 복선이 된다. 어쩌긴 뭘 발포하겠지.


_선생님 이거는, 얼굴이 너무 크고 어둡게 나온데다 목도 없어서 출입국에서 문제삼을 수가 있거든요. 가급적 새로 찍으셨음 하는데, 굳이 이 사진으로 하시겠다면, 이 사진을 선생님 본인 의지로 선택해서 한 거라고 서명을 하시고 진행하셔야 돼요.
그래서 서명했다. 여권 민원 창구 전체가 선생님이, 선생님께서는, 선생님도, 선생, 선생, 선생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모든 민원인의 호칭은 성별 연령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부 선생님으로 통일하는 것이 불만의 소지가 가장 적다는 공직사회의 합의가 있었던 듯하다. 한국 호칭 문화의 골치아픔에 대해 생각하며 구청을 나서다가 근처 사진관 창문에 붙은 문구를 보고 비명을 꽥 질렀다.

[여권사진 9천원]

푼돈에 벌벌 떠는 나에게 이만한 귀싸대기가 없다. 뺨을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귀가했다.


_여권은 제때 나왔다. 신상정보가 적힌 면을 펼치니 문제의 사진이 나왔는데 얼굴 크기는 둘째치고 피부가 완전 구리색이다. 구리도 탐스러운 구리가 아니라 지명수배전단 특유의 어떤 음산-한. 그런 구릿빛. 어릴 때 수배전단 붙은 길은 쳐다도 안 보고 멀리 돌아갔다. 사진에 감도는 기운이 너무 무서워서. 그 기운의 정체를 알겠다. 피사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진이란 으레 그런 느낌인 것이다. 근데 자꾸 보니 사진에 정이 가서 뭐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됐다. 남는 여권사진 막 이마 뺨 턱 옆통수 뒤통수에 붙이고 티셔츠에다 크게 프린트해서 입고 가면 입국심사자도 정들지 않곤 못 배기겠지 하는 쿠소망상을 끝으로 사진에 대한 더 이상의 관심을 끊었다. 이제 ESTA가 문제다. 내가 무해한 관광객임을 증명받는 절차인데 허가가 나기까지 최대 7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96시간 뒤 출국인데...신상정보 체류지 주소 등을 쓰고 마약 테러 전염병 등과 관련있냐는 질문에 모두 아니오를 누르고 수수료 14달러를 지불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웬만하면 허가가 나지만 오타 때문에 거절당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한다. 뽕쟁이 테러범 좀비조차 아니오를 누를 저 뻔한 마약 테러 전염병 관련 질문도 마우스 스크롤 실수로 아니오가 예로 바뀐 채 제출되어 망하는 경우가 꽤 있단다. 14달러 카드결제시 지불국가를 택할 때 Korea Republic과 Korea Democratic Peoples Republic 두 개가 나오는데 후자인 북한을 고르는 사람도 적지 않단다. 데모크라틱 저거 민주주읜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까 맞겠지 싶어서(이 실수는 허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저런 실수들을 했으면 어쩌지 불안해하며 다섯시간 뒤 진행상황을 조회해보니


안도감과 설렘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마음에 조금씩 불안의 싹이 돋았다.

이 여행엔 어떤 지뢰가 숨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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