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책은 빌릴 땐 좋은데 반납이 늘 문제다. 후자의 귀찮음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대출 = 낯선 활자에 담긴 미지의 재미를 획득하는 즐거운 모험
반납 = 반납 의무밖에 남지 않은 단물 다 빠진 짐을 짊어지고 가는 고행
똑같은 코스를 이동해도 그 목적이 쾌락추구인지 의무수행인지에 따라 의욕이 이렇게나 천지차이로 갈리는 것.
해서 웬만하면 집과의 거리가 가장 짧은 도서관만 이용하고 최소한 내가 사는 행정구역만큼은 절대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데, 로판과 무협에 뇌가 맛이 가버린 요 몇달 그 원칙을 개무시하고 있다.
이쪽 장르 인기작은 늘 대출 대기자가 한도 없이 밀려있어 동네 도서관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해가 바뀌도록 책표지도 못 만져볼 것이므로 활동범위를 넓히고 부지런히 행동해야 한다. 인접한 행정구역쯤은 우습게 넘나들고 서울 전역과 경기지역 도서관 장서까지 샅샅이 뒤져보고 교통편을 검색하며 짬 날 때마다 다녀오고 있다. 로판과 무협과 나들이에 미친 인간만이 기꺼이 감당할 번거로운 짓이지만 이게 요즘의 내 정신건강을 지탱해주는 행위인 듯.

마도조사의 백미로 알려진 마지막 4권을 빌리고 싶은데 과연 백미라 그런지 다들 입수하면 쉽게 놓아주질 않는 듯했다. 대출가능이라고 검색된 작은도서관을 찾아 3개 지역구를 돌아다녔으나 죄다 도착 직전에 간발의 차로 대출되거나 알 수 없는 사유로 책이 행방불명되었거나 하는 불상사가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 ★구의 작은도서관에 갔다. 인근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겸하는 작고 훈훈한 공간이었다. 그런만큼 나로서는 남의 집 안방에 신발 신고 들어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으며 불쑥 나타난 이질적인 존재에 사서의 눈빛에도 반짝 경계심이 일었으나, 고맙게도 곧 사무적인 친절함을 발휘해주어 서둘러 목례하고 책을 찾으러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청구기호를 따라 책장을 쭉 훑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렇게까지 책이 개판으로 정렬된 도서관은 처음이었다. 김씨 작가 뒤에 박씨가 나왔다가 장씨가 나오고 또다시 김씨가 튀어나오는 식이었다. 와씨 이게 다 뭐냐...크게 당황해서 시선을 책장 여기저기 아무데나 막 던졌다. 문 닫기 전에 책을 찾을 수나 있을까? 사서에게 한번 물어볼까 싶었지만 다시금 떠오른 사서의 경계심 어린 눈빛과 남한테 아쉬운 소리하는 타이밍은 최대한 뒤로 미루는 쫄보의 성격이 시선을 계속 책장 쪽에만 머무르도록 하였다. 어찌저찌하여 운좋게 중국작가 코너를 찾아냈다. 이쪽은 다행히 한국작가 쪽보다는 혼잡도가 덜했다. 아무래도 권수 많은 대하사극 시리즈물이 주를 이루고 상대적으로 이용자가 적어 책들이 덜 뒤섞였던 것 같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책장 가장 상단에, 무심히 꽂혀있는 마도조사 4권을 발견했다. 일순간 세상이 암전되고, 책과 나 단 둘만이 존재하는 기분. 손을 뻗어 책을 들었다. 묵직하게 전해지는 무게감에 뿌듯해하다가, 표지를 보고 헉했다. 1,2,3권엔 없던 19세 미만 구독 불가 경고딱지가 붙어있었다. 이런 횡재는 예상하지 못했다. 수백개의 자아가 환호하고 휘파람불고 기립박수치고 난리가 났다.

흥분을 누르고 책을 사서에게 가져간 뒤 당당하게 서울시민카드 앱에서 대출용 바코드를 띄워 내밀었다.

삑 - 대출 불가.

일동 침묵. 사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서너 번쯤 다시 찍었으나 결과는 같았다. 아…이건 또 무슨…회원가입 제대로 됐고 바코드도 제대로 발급받았건만 대체 왜 대출이 안 되는 건데!?! 전산 시스템이 말없이 튕겨내면 인간 나부랭이로서는 까닭을 알 도리가 없다. 한동안 말없이 사서와 마주보고 서있었다. 사서는 의욕없는 동작으로 또다시 바코드를 찍었다. 삑 - 대출 불가. 안될 거 뻔히 알지만 딱히 대책은 없고 가만 있긴 또 좀 뭐하니까 그냥 찍어본 것 같았다. 약간 내가 포기하고 떠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무언의 의식 같기도 했다. 사실 내가 집에 가는 게 갈등상황을 해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긴 했다. 평소의 나라면 응당 쉬운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7개의 구를 거쳐 여기까지 와서, 저렇게나 선명한 19금 딱지를 봐버리니 죽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아니,,그…어헉! 저…젓, 그럼 어, 어떻게 뭐 빌릴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요?!”

사람이 당황을 해도 어지간해서는 저렇게 만화 대사처럼 드라마틱하게 더듬진 않는데, 정말 정확히 저런 문장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발정이 나도 그렇지 19금 도서를 향한 욕망을 뭘 또 그렇게 남들 보는 앞에다가 애절하게 엎지르고 그를까 진짜. 너무 쪽팔렸다. 그런데 그때까지 다소 형식적인 안타까움과 체념의 태도로 일관했던 사서가, 잠깐 나를 응시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통화내용으로 보아 시스템 담당자에게 연락한 것 같았다. “네, 네, 아 네, 네, 네” 달칵 달칵 들려오는 마우스 클릭음이 뭔가 희망적이었다. 그리고 바코드를 찍었다. 삑.

“대출되셨습니다. 10월 @@일까지 반납해주세요.”


얼떨떨하게 책을 받아드는 나에게 사서 선생님은 가입 당시에 전산착오가 있었는데 이제 바로잡았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감사. 그저 압도적 감사. 사서느님께 꾸벅꾸벅 몇 번을 절하고 돌아섰다. ‘이제 바로잡았다’고 말할 때 직업적 자부심으로 단단하게 빛났던 사서신의 눈빛 영영 잊지 못하리라.

힘들게 모셔온 마도조사 4권 이제 거의 다 읽어간다.
묵향동후 이 작가 진짜 미친 양반이네.
책 읽다가 내가 복상사할 뻔했어.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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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단관리에 대한 의지가 싹 사라졌다
아니 의지는 있는데 식욕이 너무 강함
굳이 이렇게까지 강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그 어처구니없이 거센 식욕에 매번 의지가 산산조각 나는 것
그리하여 팥 콩 견과류를 매일 짐승처럼 위장에 쏟아붓고 있다
지친 것 같다
평생 음식 섭취에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서 그런지
이제는 절제 금욕이라 하면 아주 지긋지긋해서
극히 작은 스트레스만 발생해도 치를 떨며 폭식하는 몸이 돼버린 듯하다
근데 대체 팥은 왜 이렇게 많이 먹지
팥을 이렇게 폭식하는 경우도 있나
아니 너무 심하잖아
하마처럼 먹고 있단 말야
혹시 무슨 병이 있나
에휴 어쩌것니
땡길 때 많이 먹어
팥처먹다 뒤져봐 한번

- 창작물 분석
분석을 하지 마라
분석에 집착하는 순간 이미 망조가 든 거라는 충고를 들었다
동의한다
창작자가 어떤 작품을 볼 때 당연히 분석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에 집착씩이나 하는 경우,
구멍이 숭숭 뚫린 허술한 언어로 요약 정의 분석을 하는 데에 과하게 에너지를 쓰게 되는데 대부분 억측. 총체적으로 별 영양가 없는 행위일 따름.
정작 내 작업을 할 땐 힘이 빠져 낮잠이나 자버리는 얼간이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분석틀에 뚫린 구멍의 패턴이 나랑 비슷한 사람과 수다떠는 건 또 너무나 재미가 있어서
남이 만든 것에 이러쿵저러쿵 말만 얹기 좋아하는 인간들을 위한 지옥이 있을 거란 철석같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가 없구나 이 꿀같은 오락을
맨날 술먹고 오락하고 싶다

- 작법서를 읽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며 나름 암중모색을 하고는 있으나
면목이 없습니다 망원동의 귀인이여
솔직히 말하자면 패배가 예정된 게임에 뛰어들었음을 매순간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거의 확신에 가깝지요
그 바닥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금액이 굴러다니는 그 바닥은
특정 연령대의 펄펄 뛰는 활어 같은 관종력과
인간의 말초적 욕망을 갖고 놀 줄 아는 동물적 감각
이 두 개의 추동력을 풀파워로 땡겨도 살아남을까 말까한 판이더구만
어유 저는 뭐…
저의 창작력은 시체를 간신히 면한 수준이어요
호호호호호
근데 하고는 있습니다 뭔가를 계속 하긴 할 겁니다
이렇게나 패색이 짙은데 놀랍게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처럼 막 엄청난 열패감에 괴롭거나 하지 않아요
어차피 죽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힘이 강해지는
이 마법의 주문 덕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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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가 너무 안 읽혀서 당황했다
남들이 다 재밌다고 한 장르문학은 대부분 재밌게 읽었으므로 칭찬이 자자한 이 작품에는 아무런 저항없이 푹 빠지겠거니 했는데, 놀랍도록 몰입이 안 되었다
근데 애당초 몰입하기 힘들게 생겨먹은 소설 아닌가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
주인공의 욕망이 뭔지 도통 와닿지 않고 등장인물이 떼거리로 나오는데 그 호칭이 일관되지 않고(본명으로 불렀다가 애칭으로 불렀다가 호로 불렀다가 직함으로 불렀다가 심지어 씨발 칼들도 다 이름이 있음) 누가 애비고 누가 아들인지 혼란의 도가니인데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이 현재시점인지 과거회상인지도 헷갈리고 주요 인물들이 왜 이 산 저 산 이마을 저마을을 쏘다니는지 현재 어디에 있는지 - 이동의 이유, 현위치 등의 정보를 수시로 되뇌지 않으면 미궁속에 빠져버리고 생소한 한자어까지(청담회 자전 금린대 염방존 음호부 수진계 어쩌구)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아니 나는 너무 신기한 거야
이게 집중이 돼?
요즘 세상에 이런 밤고구마 같은 텍스트를 어떻게들 술술 넘기는 거지?
작품의 무협세계관과 그 개미떼같은 인물들의 가계도가 나를 제외한 모두의 머릿속에 탑재된 건가?
아님 내 문해력이 박살난 거?
참고참고 억지로 1권 후반까지 읽다가 오락물을 이렇게 인내하며 읽어야 한다는 부조리를 도저히 못 견디고 내던졌는데,

너무나 찜찜했다
만인이 칭송한 작품을 전혀 소화시키지 못했다니 동아시아 집단문화에 충직하게 복종해온 일인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
그러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과 드라마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헉 이게 그 유명한 진정령의 원작이었어!!! 남자주인공이 천하절색임은 1초만에 알겠더군 굉장하더군)
드라마 애니 1편을 인강 보듯 시청하고 1권을 노트필기와 함께 2회독하는 눈물겨운 노력 끝에 간신히 정주행의 흐름에 올라탔다

이렇게까지 노력을 기울여 이 세계관에 끼어들어가려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느덧 나무아래 눈가리개 키스신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을 뒹구는 지경에 이르렀고...

암튼 결과적으로는 만족중
아 픽션의 세계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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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의 여자주인공들
외모는 대개 화려X 평범O 표준체중~살짝 통통한 수준
아무렇게나 걸친 티셔츠+청바지+운동화+질끈 묶은 머리(묘하게도 꼭 ‘질끈’ 묶음)
적극적 아군의 등쌀에 못이겨 본의 아니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급으로 꾸미는 이벤트 필수발생->세상 남자 다 달라붙는 마성의 여자됨->남자주인공의 질투와 성욕 폭발의 계기

성격은 딱히 모난 구석 없음 평균적인 도덕관념 및 공동체의식에서 벗어나는 경우 거의 없음
대체로 일 잘함 다소 미숙하더라도 발전가능성이 매우 엿보임 개민폐 일바보는 매우 드묾
덜렁대거나 털털한 모습으로 본의 아니게 냉철한 완벽주의자 남주에게 다른 여자들과 달리 신선한 매력을 어필
치명적 매력의 부유한 권력자 및 연예인 계열 남자주인공이 가까이 오면 갑자기 홍조 및 호흡곤란과 더불어 언어능력 운동능력 상황판단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뒷걸음질치다 벽에 부딪치고…대사에 말줄임표가…급격히……늘면서……급기야는…아앗……핫……!

식욕은 대체로 왕성함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남주에게 들키고 수치스러워함 이따금 음식을 옷에 흘리거나 얼굴에 묻히는데 남주는 이를 귀여워하거나 재빨리 수습해줌 간혹 술먹고 토하고 개주접을 떨지만 묘하게도 남주가 정떨어져서 도망가는 일은 없음
중후반부 남주와의 갈등 국면에서는 대체로 잠수를 타고 식욕이 급감함 폭식X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나서 남주의 태산같은 걱정을 삼

좋은 냄새가 남

여기까지는 주로 2000년 초반까지의 경향. 현대에 근접할수록 남주 앞에서 답답하게 구는 모습이 줄고 주체적 면모와 모난 성깔이 추가되는 움직임 물론 사회적 지탄을 받을 정도는 절대 아님 어떠한 행동이든 비난을 방어해줄 명분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음

시대극의 왕족 귀족 출신 여주들은 대체로 현대물보다 식욕이 적음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밥맛이 잘 떨어져서 먹던 걸 하인한테 넘겨줌 한그릇 뚝딱하는 일이 잘 없음

얘들도 냄새 좋음
맨날 꽃잎 띄운 목욕통에 들어가서 그런지 몸 전체가 꽃향기에 절여져있음

과거에는 어려운 처지의 하층계급이 신분상승하는 구도가 많았으나 언제부턴가 고귀한 혈통의 주인공이 분수를 모르고 나대는 아랫것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수모를 당하다가 힘을 되찾고 응징하는 구도가 자주 보임

남자주인공의 덕목 중 손상되어서는 안 될 신성불가침의 영역 - 미모/돈과 권력/정력/여주를 향한 일편단심
이중 으뜸의 가치는 미모인 듯 다른 덕목들은 일시적으로 살짝 훼손될 수 있으나 미모만은 1분1초라도 절대 망가져서는 안됨
심리상태에 따라 외모의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여주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마음고생을 해도 외모변화의 최대 허용치는 수척하지만 더욱 날카로워진 눈매 딱 요정도까지
스트레스성 폭식 거식으로 인해 배 나오고 이중턱 되고 해골처럼 앙상해지는 것은 금기시됨
탈모금지
생각해보니 정력도 절대 손상되면 안될 분위기
흡연 및 음주인의 비율이 꽤 높음 흐트러지고 섹시함이 증폭되는 장치로서 작용하는 듯
읽으면 읽을수록 이새끼들은 인간 남성이 아니라 완벽한 디자인의 무한동력 딜도처럼 느껴짐


—————————-

몇주간 로판/무협을 읽으며 느낀 바를 적은 게 이거 말고도 무지 많은데 쪽지가 어디로 날라갔네
사실 그깟 쪽지 날라가든 말든 알 게 뭐냐 싶다
내 얄팍한 감상이 여기서 몇 줄 더 추가돼봤자 이 광대하고 매혹적인 욕망의 세계를 백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할 것을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재밌고
아이고 뻔하네 하다가 허를 찔려서 또 재밌고
장르의 법칙을 뼛속 깊이 이해하고 때에 따라 그것을 요령좋게 비틀어 독자의 신경줄을 쥐락펴락하는 존잘님들 솜씨 진짜 너무너무 부럽고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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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는데 육체노동을 하고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고 7시간 이상 잠을 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더러운 기분으로 있어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거 평생 지겹도록 겪어보았으니 앞으로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마음 속 걸림돌들을 최대한 외면한 채 텅 빈 머리통을 목 위에 대충 얹어놓고 다닐 것이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어차피 괴로움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덮쳐오고 어떻게든 지나간다.

 

-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나와 다른 유형의 인간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재능이 없어도 진짜 더럽게 없다는 걸 매일매일 뼈저리게 체험중이다. 그런데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가 과연 그렇게까지 큰 것인가, 요즘은 그 자체도 좀 의심스럽다. 그냥 다 그저 그런 능력치를 갖고 있는데 혼자서 그 차이를 냅다 크게 부풀려서는 아 나는 저건 절대 못해, 이런 거나 하고 살아야 돼, 그렇게 잘 맞지도 않는 선을 아무렇게나 긋고 살았던 것 아닌가 싶다. 그놈의 자의식을 때려잡아야 한다. 아주 그냥 똑똑한 척 뺀질뺀질하게 입만 살아가지고서는 더럽게 심약하고 게을러 터져서 많은 것을 망친 원흉이다. 잘하든 못하든 그냥 해야 한다. 결심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

 

- 쓰면서도 분명 이 결심대로 되지 않을 거다, 며칠만 지나면 또 더러운 휴지뭉치 같은 근심걱정이 머리통에 가득 찰 것이고, 건전한 정신은 부패한 자의식에게 숙청당할 것이며, 결국 늘 하던 대로 저품질의 재능을 원망하며 결심한 일을 때려치우고 말 거라는 예감이 스멀스멀 든다. 뭐 그러면 그때 가서 또 새롭게 결심을 하든 자학을 하든 아유 난 모르겠고 어제 사온 생선이나 구워서 막걸리와 함께 먹자. 청어가 두 마리에 2천원이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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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결제정보로 나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게 된 지 오래다
9월 초의 나는 인도네시아 요리를 신나게 먹고 멋진 카페에서 소품 하나하나에 손가락질하며 꺅꺅 감탄하는 인간
지마켓에서 1원 한푼이라도 더 싼 반팔수영복을 찾아헤맨 인간
답례선물용 십만원짜리 상품권을 사며 덜덜 떠는 인간이었다
  
돈을 쓰지 않은 날은 뭔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하루가 통째로 암흑 속에 깊이 가라앉는 것이다
소비자가 될 때만 겨우 존재감을 인정해주는 깍쟁이 세상인심이야 그렇다 치지만 나 자신이 돈 안 쓴 나를 적극적으로 까먹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생산
글이나 그림을 쥐어짜낸 날은 어떻게든 기억이 난다
일을 해야 한다
그게 스스로를 가장 저렴하게 기억하는 방법이다

마구 맺은 계약에 깔려죽고 말 거라는 걱정은 기우였다
내 능력 밖의 계약은 저절로 깨지게 되어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진공의 상태에서 아무래도 좋을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
이제야 제자리에 돌아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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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 나앉는다’는 표현을 자주 생각한다. 가끔 소리 내어 말하기도 한다. 길에 나앉는다. 길바닥에 나앉는다.

- 12시에 행사장에서 밥을 먹고, 2시까지 다음 일정이 있는 장소로 가면 시간이 딱 맞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2시 반이 넘어가도록 행사가 시작되지 않았다. 1시가 되어서야 겨우 음식 세팅 시작. 일찌감치 줄을 선 사람들은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과 그 사이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운영진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1분에 한번씩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1시 10분경 참지 못하고 운영진에게 다가가 죄송한데 몇 시쯤부터 음식을 살 수 있냐고 물었는데, 놀랍게도 그 대답이 “지금 사실 수 있는데요?!” 맙소사. 다들 양쪽으로 갈라서서 한쪽은 왜 시작을 안 하지...다른 한쪽은 왜 안 사먹는 거지...이렇게 묵묵히 고뇌하고 있었던 건가. 하긴 극도로 내성적인 사람들이 행사를 열면 이런 해프닝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행사가 매끄럽게 진행된다’는 것 자체가 수많은 노하우와 금전으로 이루어지는 고도의 행위예술이라는 생각을 갈수록 자주 하게 된다.

-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다. 너무 재미가 있고, 재밌지만...이제는 시청을 좀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처음엔 남의 작품을 오랫동안 멀리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와 공부해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에 쓰디쓴 보약을 코 막고 삼키듯 이것저것 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재밌어서 자발적으로 보게 되고, 슬슬 불건전한 중독 단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렇게 돼버렸다. 반년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할 일. 아무것도 하기 싫고 드라마만 무한정 보고 싶다. 남이 만든 세계관에 영영 취해있고 싶다. 가상에서 현실로 내쳐지는 순간의 공허함이 두렵다. 가장 두려운 건 내 세계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과 직면해야 한다는 것. 다들 너무해. 너무 잘해. 너무들 해 진짜.

- 질투에 대한 글을 썼고 겁도 없이 ‘질투왕’을 자처하였으나 실은 거짓말이다. 나는 질투하지 않는다. 질투는 능동적이다. 질투의 대상을 해치고자 하는 명백한 공격성을 내포한 감정이다. 나같이 게으르고 소심한 수동형 인간은 질투 못 한다. 그 귀찮고 위험부담 큰 열혈짓을 뭐하러 합니까. 훨씬 조용하고 폐쇄적인 선택지, 열등감이 있는데. 남을 공격하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내 멘탈만 묵묵히 갈아먹는 감정! 뒤탈 없고 간편하고 얼마나 좋아. 나는야 열등감왕. 음 이건 별로. 벌써 질투왕보다 한 글자 더 늘어나서 리듬감이 확 굼떠지고 어감도 후져졌어. 열등해 증말.

- 어마어마한 귀찮음을 딛고 일어나 도서관에 나와서 죽지못해 일을 하다 두어 건의 통화를 하고 기분이 나아졌다. 역시 나의 비관에는 햇빛과 운동과 사람이 약. 물론 세 번째 것이 종종 독약이 돼버려서 곤란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기에, 더더욱 사람과 호의를 주고받는 순간이 있음에 감사한다. (합장 이모티콘) 근데 나 요즘 이모티콘 너무 많이 쓴다. 상대가 내 말투로 인해 불쾌해질 여지를 최소화하고 호의를 최대한 증폭시키고자 동글동글 귀여운 이모티콘을 줄줄이 엮어 답하곤 하는데, 종종 그 과대포장된 상냥함이 너무.....아으 몰러 그냥 가끔 그 이모티콘들 확 다 구워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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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한 지하철 객실. 맞은편 남자가 일어나서 자기 배낭에서 벌레 한 마리를 객실 바닥에 떨어내고 하차했다. 새끼손까락 두 마디만한, 하늘소를 닮은 검은 벌레였다. 추락 직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한동안 꼼짝없이 제자리에 붙어있던 벌레는 이내 멈칫멈칫 출입문 근처를 맴돌았다. 내성적인 벌레였다. 옆자리 여자들이 속삭였다. 어떡해 벌레. 근데 저거 바퀴벌레는 아닌 것 같다. 그지. 응. 바퀴는 아냐. 나만 혼자 벌레를 주시하고 있던 게 아니었고 대화의 톤이 벌레에게 비교적 온정적이었다는 것에 왠지 안도했다. 열차가 다음 역에 정차했고 출입문이 열렸다. 승하차하는 객들의 발걸음이 우르르 벌레 위로 쏟아졌다. 곧 끔찍한 꼴이 펼쳐지겠다 싶어 마음이 몹시 괴로웠는데, 놀랍게도 벌레는 멀쩡했다. 우연인지 다들 알아서 조심한 건지 하여간 모든 신발이 절묘하게 벌레를 피해갔다. 다음역에서는 열차 밖으로 벌레를 내보내려는 중년남자 두 명의 시도가 있었다. 그들은 벌레를 발 안쪽면으로 살짝살짝 차서 출입문 바깥쪽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벌레는 출입문의 턱에 걸려 좀처럼 나가지를 못했고, 벌레를 동정하되 맨손으로 만지면서까지 도와주고 싶지는 않았던 남자들은 둔탁한 발재간으로 어찌어찌 해보려다가 그냥 그대로 떠나버렸다. 문제는 그들의 도움으로 인해 벌레가 출입문에 눌려죽기 딱 좋은 위치로 옮겨졌다는 것. 옆자리 여자들이 초조하게 말했다. 어떡해. 어떡해 벌레. 출입문 닫힙니다 - 푸슉 소리와 함께 양쪽에서 다가온 문이 맞물리려는 순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옆의 여자가 번개같이 달려가서 우산 끄트머리로 문에 끼이기 직전의 벌레를 끄집어냈다. 그가 자리로 복귀할 때 기립박수를 칠 뻔했다. 교과서에 실릴법한 영웅적 행동이 아닌가. 다시 몇 정거장이 지났다. 아까와는 다르게 객실이 꽤 붐볐다. 그 북새통 속에서 벌레는 기적처럼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적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지. 점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곧 내 하차역이 다가왔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충동적으로 벌레를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밭일 할 때 신으려고 했던 양말 한 켤레가 가방 안에 있었다. 그걸로 벌레를 애기 포대기 감싸듯 쥐어들고 재빨리 내렸다. 뒤에서 여자들이 뭐라고뭐라고 했던 것도 같다. 역 근처에 작은 화단이 보이기에 거기다 벌레를 탈탈 털고 홀가분하게 갈길을 갔다. 너무 속편하게 홀가분해하는 거 아닌가 싶긴 했다. 서울 도심의 알량한 풀숲이 벌레의 생명연장에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않겠다. 그럼으로써 벌레 너는 최소한 내 기억 속에서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니 내 역할은 딱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하고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애원하듯 흥정을 시도하며 얼른 갈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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