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손초 새싹 화분을 받았다. 엉겁결에 받아들고 당황했다. 친구와 약속이 있었고 약속 후 혼자 칵테일바에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일정에, 특히 술집에 화분을 동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난감했다. 친구한테 주거나 적당히 양지바른 곳에 심을까도 했지만 때마침 이날 나는 무척 우울하고 외로워서 내가 내버리면 무관심 속에 이리저리 치이다 죽을 확률이 매우 높은 그 풀이 불쌍했다. 너무 불쌍했다. 레옹처럼 화분을 들고 계획한 일정을 소화했다. 과연 거추장스러웠다. 퇴근길의 혼잡한 지하철을 탔을 땐 그 알량한 동정심의 대부분이 증발되기도 했다. 대체 레옹 이 미친새낀 어떻게 화분을 들고 총싸움을 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건 문명인의 이성을 총동원하여 못된 마음을 꿀꺽 삼켰고…그렇게 불편함의 고비를 어찌어찌 몇 번 더 넘기고 나자, 거짓말처럼 화분에 정이 들어버렸다. 확실히 같이 고생한 상대에겐 강한 애착이 생기는 듯. 레옹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만손초. 많은 자손을 부르는 풀. 자손이라니. 씨발 그것도 많은 자손이라니. 검색해보니 다 큰 모습이 퍽 징그러운 것도 번식력과 그 방법이 무지막지한 것도 하나같이 존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요소가 가득한 풀인데, 그래서인지 더더욱 거부할 수 없는 기괴한 매력이 느껴진다. 앞날이 기대된다.

-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아 겁이 나서 자꾸 미니게임에 빠져든다. 어제는 심슨타일을 열 시간쯤 하고 두 시간쯤 스스로를 저주했다. 이쯤되니 더는 이 상황에 대해 할말이 없고 그냥 나는 집에 있으면 인생 끝장난다는 생존본능이 절로 가동된다. 그러니까 어쩌면 게임중독에 빠진 자신을 구태여 질책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냥 될 일은 때 되면 어떻게든 되게끔 흘러가고 망할 일은 망할 만하니까 망하는 거지. 그런 거지.

- 다시 이동네 저동네 도서관을 전전하기 시작했는데 새삼 느끼는 점은 직원분들이 참 친절하다는 것. 방금도 한 분이 다가와서 내 쪽으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이용자님 더우시죠? 잠깐만 환기하고 얼른 에어콘 틀어드릴게요! 하고는 환기창을 착착 열어젖힌 뒤 쌩 사라졌다. 황송. 그저 황송. 친절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고 함부로 퍼주면 몸이 축나는 귀중한 자원이니 직원분들 부디 심신을 보전할 수 있는 선에서 친절하시기를, 친절을 맡겨놓은 양 한주먹씩 뜯어가며 큰소리치는 인간들에게 다치는 일 없기를 바라기가 무섭게, 왕년에 잘나갔던 퇴직자로 추정되는 인간이 직원분을 붙들고 굉장한 진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자신의 학력과 재산과 권력에 걸맞은 대접을 직원이 해주지 않았다고 질책하는 것. 아아 낯설구나. 부자동네 도서관의 진상 스타일은 이러한가. 동네별로 진상 유형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아냐 솔직히 하나도 안 궁금해. 그저 직원들의 안녕을, 저 고약한 에너지의 빠른 소멸만을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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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어둠의 기운이 너무 많아서 그거 치우느라 진이 다 빠짐
중요한 일을 하나도 못하고 있음
성격만큼 더러운 팔자가 없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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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이후 계속 황학동 도깨비시장 생각만 하고 있다.
돈이 아주 많으면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는 확실히 정했다. 도깨비시장의 옷 가방 신발 술 다 쓸어담을 거다.

- 은근슬쩍 술을 많이 먹고 있다. 방금 오타도 은근술쩍이라고 냈다가 고쳤다.
어쩐지 은근술쩍이라는 상호명의 술집이 전국에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아서 찾아봤는데 의외로 없네.
그럴 수 있지.
그저 집 근처 술집에서 술먹고 놀 동네친구 한명만 있으면 좋겠다. 아니다 없는 게 낫다.

- 맘에 드는 줄무늬 티셔츠를 발견해서 주문을 하였으나 5일만에 재고가 없으니 환불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비슷한 디자인의 티셔츠를 또 찾아내서 주문했으나 7일만에 환불. 마지막 건은 무려 15일만에 환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세상 모든 줄무늬 티셔츠한테 거절당했다.
돌이켜보니 이때부터였던 듯.
세상 모든 거절들이 내게 달라붙는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

- 자아가 거추장스럽다.
완전히 죽여 없앨 순 없으니 잘 말려서 반건조 상태로 보관했다 필요할 때만 꺼내서 물에 불려 쓰도록 하자.
단, 입은 바짝 말려서 개소리를 못하게 하자.
하지만 요즘 세상에 말처럼 효율적인 표현수단을 섣불리 봉쇄할 순 없는 일이라.
팟캐스트를 해볼까 며칠째 고민중이다.
내가 사연 쓰고 내가 읽고
와씨 아무한테도 못 알려주겠네

- 이제 하품해도 입이 찢어지지 않는다. 삶의 질이 높아졌다.
R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다행히 통화가 됐다.
비가 온다. 농사에 절대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찾아보면 이렇게 또 좋은 일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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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 아주 많으면 뭘 하고 싶냐는 질문을 즐겨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그 질문을 받고 고민하는 시간동안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상기된 표정과 고심 끝에 내놓은 답변이 본인의 현재 직업과 일치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감동이 좋아서 그러는 것 같다.

- XX시장에 갔다가 당황했다. 한줌 정도 되는 노포들로 이루어진 곳인데 태반이 망했다. 압권은 그 상권에서 가장 큰(컸던) 업장으로 추정되는 XX할인마트. 막걸리 코너나 휙 둘러보고 나올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문 너머에 이 정도로 처참하게 망한 광경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조명이 다 나가서 어두침침한 실내에 미처 처분 못한 재고들이 곳곳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거대한 폐허. 좀비떼가 쓸고 지나간 마트 꼴이 딱 이럴 듯했다. 주춤주춤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다가(뭘 또 굳이 들어가) 카운터에 사람 다리 두 짝이 놓여있는 걸 보고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마트의 전 직원이나 소유자로 추정되는 중년남이 계산대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졸고 있었다. 말하자면 생존자인 것이다. 좀비월드의 생존자. 허나 모를 일이지 이미 신체 어딘가를 좀비에게 물린 사람일지도. 그가 눈을 뜨기 전에 얼른 달아났다.

- 멍청했던 내 언행을 떠올리며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일이 또다시 늘어나고 있다. 방금 전에 또 어떤 일을 떠올리고는 씨발 미친년아!!!! 하고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용수철처럼 다시 튕겨일어났다. 이것도 뭔 병명이 있던데. 어찌됐든 튕겨져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자고 결심하며 하품하다 또 입찢어짐.

- 어느 행정업무의 신청과정에서 몇 가지 실수가 있었다. 담당 공무원이 직접 전화로 미비점을 상세히 알려준 덕분에 무사히 수정신청을 마무리했다. 처방약이 떨어졌지만 병원 가긴 귀찮던 차에 처방약 배달어플을 알게 되었고, 주문 후 몇 시간만에 약을 받을 수 있었다. 내 이름 석자와 “쾌유를 기원합니다”가 크게 적힌 쇼핑백을 우리 이웃사촌들이 두루두루 볼 수 있게끔 문고리에 걸어놓고 가신 부분은 조금 저거했지만 그따위 불만으론 이 서비스의 광채를 반도 가릴 수 없을 것. 하여간 놀라운 세상임.

- 그 놀라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과정에서 다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요즘 씨발 마음이 좀 그래. 계속 그럴 거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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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입찢어짐 참으로 지독하다. 조금만 입을 크게 벌리면 바로 찢어진다. 겨우 좀 붙었나 싶었는데 또 찢어졌을 때의 절망감은 진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식사 양치 하품도 겁나서 못하겠다. 그래서 한동안 티스푼으로 밥을 먹었는데 이번에 만든 닭가슴살취나물카레가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어른밥숟갈로 퍼먹었다가 또 피를 봤다. 그래도 탄단지를 엄청 퍼먹고 있으니 언젠간 낫겠지.

 

- 놀랍게도 R의 머릿속에 저장된 10여년의 기억 중 가장 또렷한 부분은 거의 음식과 관련되어있다. 어느 식당에서 뭘 먹었고 그 맛과 분위기가 어떠했으며 식사 전후에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대화를 했고...그 말을 듣노라면 나까지도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하긴 음식을 먹는 건 일상에서 (빤스를 입고) 할 수 있는 행위 중 가장 공감각적으로 자극적인 짓이니 그와 관련된 이벤트가 장기기억으로 빨려들어가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 같기도.

 

- 글 좀 맨날 쓰자. 맨날 하지도 않으면서 잘하고 싶다고 말하지 말어.
근데 만화와 글쓰기의 어려움을 비교하는 질문에 글쓰기가 어렵다고 호들갑 떨었던 게 지금 와서 몹시 부끄럽다. 만화 다시 그리니까 씨발 진짜 개힘들고...하여간 함부로 입방정 떠는 게 아녀.

 

- 심야 라디오 방송의 게스트가 되는 게 일생일대의 꿈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이 엊그저께 이루어졌다. 같은 꿈이라도 솔직히 꾸면서 미친놈아 이게 되겠냐 싶고 약간 누구한테 들킬까 민망한 꿈이 있는데, 나한테는 라디오 게스트 되는 게 딱 그런 거였단 말여. 근데 세상에 이게 덜컥 돼버린겨. 정말 기뻤다. 좋은 경험이었다. 아직도 얼떨떨하다. 하지만 이 엄청난 꿈이 달성되자마자 순식간에 과거로 흘러가 일상의 기억과 뒤섞여버렸다는 것이 가장 어이없고 기가 차는 부분이다. 진짜 시간만큼 무서운 엿장수가 없다. 기쁨은 후루룩 지나가버리고 고통은 영원처럼 끝도 없이 늘어진다. 내 멘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계약, 마감, 기획, 구상, 끼니 해결, 청소세탁, 세금, 각종 의무, 골칫거리 등등에 다시금 지배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상들도 뜯어보면 하나같이 다 기적같은 면이 있다. 애당초 멀쩡하게 앉아 일기를 쓸 수 있는 몸상태 자체가 기적이다. 따지고 보면 늘 꿈의 한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진짜 약간만 방심하면 글의 결론이 어르신 카톡짤의 좋은말씀 돼버리는 것을 볼 때 존나 구제불능으로 중년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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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를 앞두고 왕뾰루지가 나는 징크스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여
이번엔 아예 입이 찢어졌다
스트레스 앞에 바로 무릎꿇는 육신으로
지금껏 용케 살아왔구나
이 와중에 운명의 고구마 심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오 갓
20일에 나는 과연 어떤 일기를 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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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과 함께 고사리를 따고
R이 전과 같은 걸음으로 춤을 추며 다가오는 꿈을 꾸었다.
가오 잡는 여자는 오래오래 살았으면 했는데.
R이 오래오래 자유롭길 바랐는데.
한동안 뜬눈으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라이브 도중 출연자들간의 의견충돌이 심해져서 싸한 분위기 속에 갑자기 끊겨버린 방송을 보았다.
A는 교과서적 학구파였고 B는 대중친화파.
현학적이고 편집점을 찾기 힘든 A의 강의에 B는 지쳐있었고
요란하게 추임새를 넣어 흐름을 깨먹는 B 때문에 A는 짜증 폭발직전이었는데
하필 구독자가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앞에서 갈등이 곪아 터진 것이었다.
얼마 전엔 마음을 많이 다친 C의 라이브 방송을 보았다.
필사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호응이 전혀 없어 매일 아침 죽음을 생각한다고 했다.
모두의 심정이 너무 이해가 가서 걱정됐다. 특히 C가 정말 걱정됐다.
다행히 A와 B는 잘 지내고 C도 조금은 회복된 것 같다.


모든 게 봉합되고 회복되길 대책없이 비는 휫수가 점점 늘어난다.
물론 그 횟수의 99%는 곧 실망과 체념으로 변한다.
막연하고 수동적인 기복과 체넘을 왔다갔다하는 것보다 분명 더 좋은 선택지가 있을 텐데
아이고 잘돼야 될 텐데, 에휴 인생이 그렇지 뭐-가 입에 붙은 할망구가 되긴 좀 그런데
잘 모르겠어서 매일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만 잔뜩 하다 잔다.
뭐 어떻게 되겠지-가 입에 붙은 중년은 일단 돼버렸음.
근데 이게 생각보다 나쁜 기분은 아니라
했던말 또하고 또하는 고장난 전축같은 할머니로 사는 것도
의외로 썩 괜찮을지 모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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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과 식사 외 모든 일에 대한 의욕이 사라졌다
말린 고구마를 무한정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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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란 치즈 치간칫솔 실리콘덧신 사라
- 도서관 책 좀 미리 읽자 반납일 직전에 벼락치기하지 말고
- 청소하자 제발 청소 좀 하고 살자 제발 좀
- 게임하지 말자 제발 제발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 뭘 해야 할지 정 모르겠으면 나가서 걸어라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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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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