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미국에서 숨쉬는 것 밥숟갈 한입 한걸음한걸음이 재밌어 죽겠는데 출근자들로 적당히 붐비는 평일 통근전철의 창가자릴 차지하고 앉으니 눈오는날 마당에 풀어놓은 개처럼 온정신이 막 팔딱팔딱 뛰고 난리났다. 흥분감을 감출 수도 감출 맘도 없었다. 차창밖 풍경 뭐 하나라도 놓칠세라 상체를 창가에 바싹 붙이고 입을 반쯤 벌린 채 흘러가는 집 상가 자동차 나무 구름들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맑은 하늘 쨍한 햇볕 널찍하게 터를 잡은 넙대대한 건물들과 건물간의 공백을 채워놓는 식물들의 풍성한 무질서함. 봐도봐도 지겹지 않았다. 다음 역에 근접할 때마다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번 역은 써니베일. 마운틴 뷰. 샌 안토니오. 한국처럼 미리 녹음된 음성을 재생하는 게 아니라 차장이 매번 직접 읊어주는 의외로 아날로그적인 방식인데, 그 느낌이 너무도 친숙해서 안 웃을 수 없었다. 대중교통 운전자 특유의 권태롭고 시무룩한 음색은 만국공통인가보다.


_역을 몇 개나 지나쳤나. 낮았던 건물들이 한층 두층 높아지고 반짝반짝해지는 것 같더니만 곧 귀에 익은 역명이 들린다. 다음 역은 팔로 알토. Palo Alto. 아하 팔로알토가 뭔가 했더니 동네 이름이구나. 영구가 말했다. 시간나면 언제 한번 가볼래? 스탠포드 대학이 여기거든. 페이스북하고 아마존 본사도 있어. 학군 일자리 역세권 3콤보면 집값 존나 비싸겠네. 어 장난 아니지. 완전 부자동네야. 단위면적당 고급차가 제일 많다던가 아마. 어째 동네 때깔이 좋아보이더라니. 여기서 탑승하는 인간들도 괜히 대단해보이려고 한다. 돈냄새에 쉽게 맛이 가버리는 나 자신을 형식적으로 꾸짖으며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풍경을 바라봤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점점 가까워지는 만큼 앞으로 나올 동네들은 갈수록 비싸질 일밖에 없겠구나. 꼭 그렇진 않아. 영구가 말했다. 싸졌다 비싸졌다 하는데...우와 저기 그래피티가 있네. 그러게. 어떻게 저기까지 기어들어가서 그림 그릴 생각을 했냐. 사람들이 농반진반으로 하는 말인데 그래피티가 많은 동네일수록 집값이 싸다더라고. 아하. 내가 아는 농반진반의 대부분은 진심이 반을 넘었다. 암튼 뭔말인진 알겠는데 이 앎이란 사실상 몇 가지 뻔한 편견들에 기반한 것이다. 머릿속 편견덩어리를 게으르게 방치한 나 자신을 형식적으로 꾸짖으며 창밖에 스쳐지나가는 그래피티들을 관찰했다. 대체로 신통찮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피티의 빈도와 집값이 반비례관계라면 그래피티의 '작품성'과 집값의 관계는 어떨까. 잘 그린 담벼락 낙서는 부동산의 호재일까 악재일까. 영구는 잘 모르겠다며 웃었다. 다만 후드티를 입은 젊은 남자들이 거리에 별 목적없이 삼삼오오 모여있으면 위험신호일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뭔말인지 확 알겠는 동시에 이 인식이 특정계층에 대한 탄압의 근거로 쓰여왔다는 사실 또한 어느 때보다 무겁게 의식됐다. 두 개의 앎 사이에서 와리가리하는 나 자신을 선뜻 꾸짖지 못하는 동안, 주택가 공장지대 상점가 그리고 내가 내렸던 공항과 들판과 넓은 호수가 차창밖을 꿈같이 지나갔다. 이윽고 으리으리한 고층건물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종착지인 샌프란시스코역에 도착했다.


_서울역에 내린 기분과 비슷했다. 바로 화장실을 찾았다. 사람이 많아 줄을 잠깐 섰다 들어갔다. 여기 화장실도 하단이 휑하니 뚫려있다. 뭐 차차 적응되겠지, 하고 일을 보려는데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이 숨막히는 고요함. 뭐지? 모든 칸이 찼는데 왜 아무도 안 싸? 혹시 샌프란 시내에서 오줌소리내면 미개인 되는 건가? 물을 내려서 소리를 감추기라도 해야 하나? 와씨 이거 싸 말어!?! 고민하는데 곧 졸졸졸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그렇게 미친 풍습이 있는 동네는 아니구나. 안심하고 목적을 달성했다. 지나치게 눈치보는 나 자신을 무엇보다 호되게 꾸짖어야 하나 싶다.


_역에서 나와 영구의 일터를 향해 걸었다. 5시 좀 안 되어 퇴근하니 그때까지 시내에 있으면 연락해서 같이 돌아가잔다. 날도 흐리고 바닷가도 가까워 그런지 쌀쌀했지만 출근자들 특유의 날선 에너지에 둘러싸이기도 했거니와 시내 풍경에 넋이 나가 곧 추위를 잊었다. 이쪽은 애플의 단골 키노트 장소인 모스콘 컨벤션 센터! 저쪽은 어쌔씬 크리드로 유명한 유비소프트! 울엄마가 좋아하는 핀터레스트! 그리고 또 여긴 영구의 직장동료가 추천한 햄버거집! 바! 인도 멕시칸 스페인 요리집! 저긴 사랑해마지않는 홀푸드마켓! 세이프웨이! 현대미술관! 예술대학! 공원! 분수대! 선생님 따라 줄맞춰 걸어가는 어린이집 꼬맹이들! 이곳저곳 정신없이 둘러보며 신명나게 멘탈춤을 추다보니 어느새 마켓 스트리트. 영구와 헤어질 시간이었다. 가엾은 출근자에게 힘껏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섰다. 벌써부터 불안감이 스멀스멀 심장을 감아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구글맵 보고 미리 찍어둔 공원에서 산책하고 도서관 미술관도 가고 상점도 들르고 트위터 본사 구경도 해야지. 큰길따라 죽 걸었다. 계속 걸어내려갔다. 그런데...어...기분탓인가? 어쩐지 조금씩, 조금씩, 통근자 혹은 관광객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 같다. 나한테 철저히 무관심한 대도시의 공기에 어떤 이질적인,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섞여들고 있었다. 아. 이 강렬한 악취. 노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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