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여벌옷 하나에 기초세면도구만 챙기고 집에 있는 작업도구(오래된 평판 스캐너, A4 연습장, 펜마우스, 이면지 약간, 태블릿PC, 스마트폰 공기계)를 싹 다 구겨넣으니 배낭 하나가 꽉 찼다. 여기다 추가로 뭘 더 달고 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이걸로 끝냈다. 가방 깊숙이 여권과 허가서류를 밀어넣었다. 한국여권은 쓸모가 많아 노리는 자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_공항철도에서 시선을 잡아채는 미모의 소유자들은 대개 한국 승무원이다. 인천공항의 미모 또한 대단하다. 있는 힘껏 화려하고 쾌적하고 매끄럽고 반짝인다. 한국 공항 정말 좋지? 아마 미국 도착하면 실망할지도 몰라. 공항이 너무 작고 초라해서. 영구의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이라면 그게 진정한 멋이네. 예쁘장할 의무를 못 느끼는 존재의 자유와 위엄. 근데 그런 자유야 아직 뭐 딴나라 얘기고, 당장은 눈앞에 펼쳐진 내 조국의 가련한 으리으리함에 혹하고 봐야겠다. 면세점 술담배 선물용 초콜릿 영양제 미니자개장 색동치마저고리를 입은 구닥다리 인형 따위를 대충 둘러보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길안내 로봇을 쫓아다니며 말 몇 마디 걸어보고 VR체험카페에서 게임을 좀 하다가 기계팔뚝이 내려준 2천원짜리 커피를 마셨다. 맛있었다. 엄청 미래인간된 기분이었다.

내심 걱정했던 건 공항 내 음식값이었다. 성의없는 국밥 비빔밥따위를 이삼만원주고 사먹어야 되면 어쩌지. 차라리 굶자. 나름 비장하게 각오했는데, 눈앞에 떡하니 편의점이 나타났다. 쌍수들고 달려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익숙한 공장제 저가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인천공항이 이루어낸 최고의 진보라고 느낄 정도였다. 체류지에서 먹을 가능성이 가장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부초밥을 사먹었다.


_영구와는 좌석이 떨어져있었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영구는 정말 착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주저없이 꼽을만큼 무골호인이지만 죽고 못사는 사이라도 10시간 붙어있는 건 부담된다. 머리 위 선반에 배낭을 밀어넣고 선반 뚜껑을 힘껏 닫는데 콱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놀랐다. 다들 선반에 짐을 놓고 뚜껑을 슬쩍 누르듯 닫는 걸 보니 큰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잘 잠기게끔 설계되어있나보다. 그런 걸 나는 무슨 찦차 트렁크문마냥 후려닫았으니...... 내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미숙하게 느껴졌지만 괘념치 않으려 애썼다. 자학하지 말자. 자학하지 말자.


_십몇년 전 이코노미석은 상당히 불편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의외로 편했다. 십몇년 전 이륙 땐 기체 진동이 심해서 이대로 공중분해되겠다 싶었는데 이번엔 덜 무서웠다. 미국행 비행기가 더 좋은 건가 나이 탓에 적당히 무뎌져 그런 건가. 다 나름 영향을 미쳤겠지만 인간의 집중력을 빨아먹는 데 갈수록 능숙해지는 IT기술이 주된 원인인 것 같다. 영화/TV/다큐/스포츠/게임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체 전방과 하방의 실시간 상황도 관찰 가능했다. 이것저것 눌러보다 영화에 안착했다. 라인업이 좋았다. 궁금하긴 한데 극장 가서 볼만큼의 강렬한 끌림은 없었던 영화들이 알차게 모여있었다.

​[그린북] 양아치 백인과 교양있는 흑인의 로드무비라는 시놉시스를 듣자마자 자동연상되는 모든 장면이 담겨있다. 어처구니없을 지경으로 뻔했지만 누누히 말했듯 뻔한 건 잘 먹힐 확률이 높다. 막판의 크리스마스 장면 진짜 최고로 뻔하고 역하고 근지러웠는데 보다 울었다. 다른 인종끼리 막 정을 나누고...상부상조하고...그런 거 너무 흐뭇하잖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기만적인 영화였다. 현실의 불미스런 잡음을 알고 보니 더더욱.​ [미스터 스마일]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영화를 각잡고 본 건 처음인데 하필 그게 은퇴작. 와 근데 너무나 곱고 우아한 할아버지다. 할배가 웃으면 정말 사방천지가 봄햇살 내리쬐듯 환해지며 뭐든 퍼주고 싶어진다. 젊었을 때 영화를 더 찾아봐야겠다. 상대 할매의 관상도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헉 76년작 캐리의 주인공 양반이었다!)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 악평에 비해선 그럭저럭 괜찮다 싶더니만 갈수록 좆같았다. 남의 집 자식 롯데월드 놀러간 홈비디오 보는 느낌이었다. 존나 지겨웠는데 한번 재생한 영화는 끝장을 봐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8배속으로 봤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 [퍼스트맨] 때 라이언 고슬링보다 인상적으로 봤던 클레어 포이 실컷 봐서 좋았다. 영화는 차갑고 슬펐다. 복지천국 북유럽 다 쓸모없다 그저 계집들은 국적불문 고생인 것을. ​[스타 이즈 본] 극장에서 봤는데 둘이 눈맞는 장면이랑 shallow 공연장면 다시 보고 싶어서 봤다. 레이디가가 몇번을 다시 봐도 멋지다. ​[한국인의 밥상] 그치 한국인이라면 이거 미국 가기 전에 꼭 봐줘야지. 이번 편은 남도의 해초와 조개밥상이었다. 내 동포들 왜케 칼로리 낮은 것들로만 연명했는지 진짜 맥앤치즈를 위시한 온갖 칼로리폭탄 정크푸드의 나라로 향하는 한마리 후손으로서 정말 너무나 면목없고 송구스러워 눈물이 났다.


_잠이 들락말락하는 비행 네다섯시간째, 기체가 크게 진동했고 안전벨트를 매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요란하게 울려퍼져 벌떡 일어났다. 몇 시간동안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초긴장상태로 있었다. 옆자리 인도남자가 앞자리에 얼굴을 파묻고 기도하기에 불안감은 한층 더 심해졌다. 진짜 여기서 죽나보다, 태평양 한가운데가 내 무덤자린가보다 했는데, 곧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하는 자세로만 숙면이 가능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기체는 곧 안정을 되찾았지만 한숨도 못 잤다.


_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 기내에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가 울려퍼졌다. 비몽사몽 중에도 전율이 일었다. 진짜 창작자들 중 뮤지션만큼 즉각적으로 사람 미치게 하는 종족이 없다. 부러워 죽겠다.


_남들 다 하는 여행에 들떠서 온갖 것들을 상세히 적는 행위 자체가 너무 촌스러운 것 아닌가 싶지만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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