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그렇게 작고 초라하지 않더만 샌프란시스코 공항. ​​다만 조금 어두침침했다.


_입국심사대에 줄을 섰다. 하도 흉흉한 사례를 많이 주워들은 탓인가. 시키는 거 다 했고 허가도 다 받았고 체류지 체류기간 목적 등등 누가 봐도 모든 항목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있으니 별일이야 있겠냐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지뢰를 클릭하기 직전과 비슷한 불안감이 들었다. 대기인원이 상당히 많았고 진행속도도 더뎌서 지겹기 짝이 없었으나 앞사람이 줄어들면 줄어드는대로 식은땀이 났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잖아......​맴! 갑자기 웬 경찰이 나를 불러 화들짝 놀랐다. ESTA허가를 받았냐고 묻고는 무인기계코너를 가리키는 경찰. 허리춤의 권총에 얼핏 시선이 갔다.

알고 보니 그냥 정해진 절차를 지시하는 거였는데 첫빠따가 나였을 뿐이었다. 괜히 긴장했네. 뒷사람들과 함께 우루루 기계로 몰려갔다. 여권정보를 스캔하고 얼굴사진을 찍고 지문날인을 하면 영수증 같은 데 내 신상정보가 출력돼 나오고 그걸 심사창구에 가져가면 인터뷰가 시작되는 거다. 그런데 지문이 안 찍힌다. 손가락을 서너 번 뗐다 붙여도 기계가 지문인식을 못 한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관공서에서 지문 찍을 일이 있을 때 종종 듣는다. 선생님 지문이 좀 흐리시네요. 지문이 흐리다는데 뭐라 대꾸할 말도 참 마땅찮어. 그러게요...하고 쓴웃음짓는 거 말곤 뭐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 내게 원래 흐린 사람들이 있어요, 하고 짐짓 자비로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몇번이고 지문을 다시 찍게 했던 조국의 친절공무원이 생각났다. 과연 미국도 흐리멍텅헌 지문을 가진 동양여자에게 짐짓 자비를 베풀어줄 것인가. 의문에 화답하듯 네다섯번째 시도에서 마침내 지문이 인식됐다. 쾌재를 부르며 출력된 결과를 확인하는데, 내 신상정보 전체에 대문짝만한 엑스표가 그어져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건 원숭이도 알겠다.


_구글에서 검색해보니 이 엑스표는 지문인식에 문제가 있거나 추가적인 서류 체크가 필요하거나 무작위 심사가 들어갈 경우 등등에 표시될 수 있다며 짐짓 자비롭게 위로한다. Don’t panic. 그랴......덕분에 덜 불안해졌다. 곧 인터뷰다. 드디어 영어를 입에 올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시 식은땀이 났다. 야 이렇게 새가슴이어서야. 저짝에 저 영어 한마디 못하는 인도 중국 할매들도 잘만 통과하던데 나라고 못할 게 뭐여. ​Next! 심호흡을 하고 심사관 앞에 섰다. 히스패닉으로 추정되는 울적하고 피곤한 표정의 중년남자.

질문이 시작됐다. 윽 씨발. 첫 질문부터 못 알아들었다. 송구스런 표정으로 익스큐즈 미?하고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하니 남자가 아주 그냥 지긋지긋하다는 듯 천천히 반복했다. ​하우, 아, 유. 세상에. 그렇게 부정적인 표정으로 내 안부를 물어봐주는 인간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허둥지둥 답했다. 파인, 땡큐. 앤유?를 붙일까말까 고민하다 입을 닫았다. 그것까지 붙이면 그야말로 한국식 영어공교육에 세뇌된 얼간이 인공지능처럼 보일 것 같았거니와 심사관의 안부 따위 진짜 털끝만큼도 궁금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무탈히 벗어나고픈 마음이 너무너무 커서 실성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따위에 관심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애써 물어봐줬으니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한가롭게 자문할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질문공세가 시작됐는데 한번에 이해한 게 반도 안 됐다. 발음과 억양과 스피드 전부 낯설었다. 미안한데 못 알아들었다는 말을 반복했고 심사관은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즈려밟듯 다시 물어봤다. 그제야 좀 들렸다. ​너 어디 사니. 어디서 지낼 거니. 미국에 얼마나 있을 거니. 아는 사람 있니. 그 사람 미국시민이니. 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니. 짐은 그게 다니. 달러는 몇푼 가져가니. 신용카드는 있니. 알아듣은 질문엔 제깍제깍 답했고 적절한 단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을 땐 나의 성실함과 무해함을 당신께 온전히 전해드리지 못해 속터져 죽겠다는 듯 찌푸린 미간에 손을 짚었다. 솔직한 답변에 심사관이 석연찮은 반응을 보일 때마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뒤쪽의 조사실로 끌려갈까 두려웠다. 이것저것 계속 묻고 했던 질문도 몇번씩 더 반복하던 심사관의 새로운 질문. ​너 직업이 뭐니. 순간 멈칫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Writer? Artist?(윽!!) 잠깐만 만화가가 뭐였더라......아. Cartoonist. Cartoonist. 심사관이 눈을 찌푸렸다. ​What? 카 투 니 스 트. ​Oh, you draw? 예아... 심사관은 잠시 흠, 하더니 내 여권과 기타서류를 시뻘건 주머니에 쓸어담고 주둥이에 자물쇠를 철컥 잠갔다. 헉?! ​이 주머니 가지고 A구역으로 가. 안녕. Next!

좆된 거 맞지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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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A구역 입구에 infection 어쩌구 씨앗 및 식품 등 반입금지 품목 저쩌구 써놨던데 나 무슨 감염위험군으로 분류된 건가. 혼란과 공포. 그런데 담당 직원들의 분위기는 어째 아까보다 화기애애하다. 그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빨간 주머니를 건네니 가져온 짐을 전부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으란다. 배낭을 올려놓자 직원의 눈썹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과장되게 휘었다. ​Only one backpack? 예아... 짐이 진짜 하나뿐임을 확인한 직원은 동료를 돌아보며 ​one backpack~하고 피식 웃었다. 아니 다들 대체 짐을 얼마나 싸짊어지고 다니길래 저래. 일만 아니었음 비닐봉지 하나로도 충분했어 이 양반아.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한 가방이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직원이 가방을 좀 뒤져보겠단다. 슈어 하고 한발짝 물러서있는데 직원이 가방 밑바닥에서 작은 비닐뭉치를 꺼내더니 천천히 자기 눈높이로 올려들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니......??

씨발 진짜 좆됐구나.

큰엄마가 준 단감 까먹고 남은 씨앗 몇 알과 500ml 물병에 뚜껑 대신 꽂아두면 서서히 찻물이 우러나오는 원뿔형 플라스틱 티백 쓰레기였다. 지퍼락에 넣고 돌돌 말아 배낭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직원은 봉지에서 끄집어낸 씨앗을 살펴보며 다시 물었다. ​이거 뭔데? 그것은 과일...과일 씨앗... ​무슨 과일? 감인데...아 감...가만있자 감이 영어로...? 와 씨발 이걸 어쩌냐 감......감이 영어로 뭐지??!? 나는 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먹지만 내 돈 내고 사먹을 생각은 들지 않는 과일이다. 따라서 영어명에도 전혀 관심없었다. 석류! 석류는 안다! 좋아하니까! 퍼머그래냇! 아 내가 진짜 석류도 아는 사람인데...제발 석류를 물어봐줘...!!! 내 맘도 몰라주는 야속한 직원. 감씨에 시선을 박은 채 다시 묻는다. ​너 이거 심을 거야?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노우! 네버! ​흐음. 이번엔 녹차 플라스틱 티백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관찰한다. ​이건 또 뭐니? 혹시 땅에 꽂으면 싹이 나는 거니? 노우!! 그거 코리안 녹차 티백이고, 사용한 거고, 그냥 쓰레기야!! 다 쓰레기야!!! 까먹고 있었어!!! ​​​흐음... 잠깐 생각하던 직원이 짐짓 자비롭게 말했다. ​그럼 다 버려도 되지? 이것들을 갖고 있는 건 좋지 않아. 오 물론이지...땡큐...! 감씨와 티백을 쓰레기통에 버린 직원은 빨간 주머니의 자물쇠를 열어 내 여권과 서류를 꺼내줬다. 와. 긴장이 탁 풀렸다. 살았구나. ​잘 가. 땡큐를 외치며 꾸벅 인사했다.


_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영구와 상봉하고 바로 우버를 호출했다. 2분도 안 되어 빨간 토요타가 왔다. 영구의 집으로 출발. 뭐라고 표현할까. 그냥 이게 다 뭔가 싶고 모든 게 현실감이 없었다. 퍼뜩 정신차리고 네이버 검색창을 켰다. ‘감을 영어로’ 아. persimmon. 퍼시먼이라고 하는구나. 되게 감같지 않네. persimmon. persimmon.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숱하게 보아왔던 주택, 상점, 도로, 간판과 광고판의 폰트, 나무와 수풀이 차창 밖에 흐르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persimmon. persimmon. 평생 까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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