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너무도 아름다운 햇살아래 납작하고 정갈한 디자인의 주택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가로수의 나뭇가지들은 더없이 복잡하고 대담한 형세로 허공을 수놓는다. 숱많은 할머니의 파마머리 같다. 인도를 질펀하게 침범한 관목들도 많았다. 저 호방한 기세를 좀 봐. 한국의 도시식물들은 가지모양도 규칙적이고 규격을 준수하고...암튼 뭐랄까 좀 조신하게 제자리를 지키게끔 강요받지 않나. 지독히 인간편의적인 억측이겠지만 솔직히 그 강요를 그리 힘들어하는 것 같아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얌전한 정물로 기능하다 도저히 못 견딜 땐 조용히 죽어버린다. 아이구 나 지금 벌써부터 자학모드+천조국의 모든 것에 알아서 감탄할 준비가 너무 잘 돼버렸구만. 그게 좀 아무래도...기획부동산의 농간에 놀아나 덜컥 한반도를 사버린 단군X쑥마늘로 연명한 미련곰탱이의 후손이라서요.


_영구가 사는 타운하우스는 정말 아름답다. 좁지 않은 집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있고 코앞에 공용수영장, 바베큐 그릴, 헬스장, 그리고 거위가 노니는 호수가 있다. 헌데 정갈하디 정갈한 이 동네의 그 어떤 골목에도,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비친다. 유일한 보행자는 나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는데, 사람이 나타나면 그건 또 그거대로 공포였다. 저새끼는 정체가 뭔데 평일 근무시간에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야. 그쪽에서도 나를 보면 같은 생각으로 무서우려나. 아니겠지. 가장 만만한 사냥감은 겁에 질린 동양여자일 것이다. 아 씨발 빨간색 쿵후 도복이랑 황비홍 변발가발 가져올걸. 도복입고 가발쓰면 세상 다시없을 또라이 미친년처럼 보일 자신 있는데. 아 그럼 체포되려나.


_ 한국이었으면 골백번 걷고도 남았을 거리를 무조건 차로 이동했다. 사실상 차 없이는 북미 문화권을 사람답게 즐기는 것이 불가능한 듯했다. 어쩌면 총기소지가 허용된 나라에서의 자동차란 더없이 쓸만한 방탄조끼 아닌가 싶기도 했다.


_ 코스트코에서 흰계란(희한하게 한판 24개였음)과 귤 한봉지와 우유와 양고기를 사고 세이프웨이Safeway에서 펜넬과 엄청나게 뚱뚱한 가지와 겨자잎과 주전부리 약간과 맥주를 샀다. 아하 미국 마트 이런 거였구나. 이런 거였어. 내가 원했던 모든 고기 채소 맥주 향신료가 흐드러지게 진열돼있었다. 너무 황홀해 얼이 나갈 뻔했다. 코너를 도니 베이커리 파트가 나왔는데, 와 이건 그냥 천국의 풍경이로구나. 크고 먹음직한 갈색 덩어리의 향연. 어떻게 이런 압도적인...아...하여간 이들의 식료품 진열방식엔 뭔가 정말 압도적인 데가 있다. 다 먹어치우고 싶은 나머지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나왔다. 알다시피 풍요 앞에 몸둘 바를 모르는 쑥마늘의 후손이라니까요 글쎄.


_그리고 어마어마한 비닐 휴지 플라스틱 쓰레기와 음식물찌꺼기를 한데 뒤섞어 버리는 극악무도함에 기절했다. 님들 부디 저승에선 무색플라스틱 색깔플라스틱 스티로폼 종이 비닐과 게 조개 굴 새우 수박 자몽 오렌지 귤껍데기 등등을 골빠지게 분리하여 정해진 요일에 내놓아야 하는 수거지옥에 빠지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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