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4km 떨어진 마트에서 파격세일 계란 한판을 사들고 걸어오는 길이었다. 나는 걸음이 빠른 편이라서 대충 걸어도 웬만한 행인은 다 추월한다. 이날도 그러하여 앞서 걷는 자들을 하나둘 뒤로 떠나보내며 쌩쌩 걷고 있었다. 순간 엄습하는 긴장감. 누군가 씩씩대며 내 뒤를 바짝 좇고 있었다. 흘끔 보니 50대 후반쯤의 남성. 섣부른 추측일 것 같긴 한데 딱 봐도 어린년이 자기 앞질러 가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부류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부류가 나를 앞지르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부류라는 거.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와 나의 간격이 벌어졌다. 그도 걸음을 재촉했다. 다시 간격이 좁아졌다. 봐 내 추측이 맞잖아. 신경질적으로 속력을 내는 나, 필사적으로 따라붙는 그. 그렇게 생면부지의 아저씨와 간격을 좁혔다 벌렸다 하며 한참을 미친듯이 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이 멍청한 대결을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선두를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쪽은 그쪽대로 계란판씩이나 들고 걷는 년한테 내내 뒤지고 있다는 것에 자존심이 크게 상한 듯했다. 기나긴 귀갓길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덧 집이 코앞에 다가온 시점. 내가 이겼다며 대충 정신승리하고 빠지려는데, 뒤에서 아이구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곁눈질로 보니 아재가 산책로 옆 벤치에 서서히 무너지듯 드러눕고 있었다. 깔끔한 KO승. 집에 들어와 식탁에 계란판을 내려놓고 한숨 돌리려다 꽥 소리를 질렀다. 피 같은 내 계란이 8개나 깨져있었다.

예정에 없던 계란찜을 하며 생각했다. 다신 이딴 짓 하지 말자. 승자 없는 얼간이 대결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옆에서 꽃도 보고 새도 보고 제 페이스대로 느릿느릿 걸어가던 할머니가 진정한 승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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