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누구랑 만나도 앞으로 뭐해먹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공포가 느껴져
영구 - 맞아 다 그래
나 - IT기술발달이 모든 산업의 사이클을 단축시키는 거 같애 내 수명도 덩달아 단축되는 기분이야
영구 - 소비자와 창작자의 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라잖아 이러다 진짜 뇌를 서로 직접연결하는 시대도 먼 일이 아니겠어
나 - 만인의 만인에 대한 콘텐츠 전쟁 시대인 거지 으 존나 피곤하게 진짜
몇년 전에 어떤 강연에서 청중 하나가 질문을 하는데, 자기가 아이디어는 끝내주는데 그려만 놨다하면 너무 구려서 못 봐주겠으니 상상한 게 그대로 출력되면 좋겠다는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강사가 딱 그러더라. 그럼 우린 다 좆된다고. 창작물을 내놓기까지 상당기간 지겹고 고통스런 수련을 해야 한다는 게 이 바닥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데 그게 없어지면 어쩌냐는 거야. 근데 진짜 어쩜 좋냐 점점 좆되는 방향으로 가는 게 확실시되는데
영구 - 그러니까 옛날엔 인간의 미숙함 뭐 비합리성 이런 걸로 인한 시장의 변동을 잘 이용해서 돈벌 기회가 꽤 있었는데 인제는 그런 게 점점 줄고 있어서
나 - 저새끼들 때문에

창밖에 흘러가는 나사 구글 애플 본사건물을 노려보며 그런 대화를 했다.

나 - 똑똑한 새끼들


_세이프웨이에 다시 갔다. 식료품 쇼핑은 언제든 대환영이다! 옐로우스쿼시(노란애호박) 망고 6알 IPA맥주 6병묶음(여기 세트들은 왜 이렇게 6의 배수가 많지) 전부터 궁금했던 콩으로 만든 비건 요거트를 샀다. 건강식 먹고 늘린 수명 음주로 깎아먹자는 의지가 돋보이는 구매목록이었다. 그런데 100% organic임을 어필하는 상품이 정말 많다. 신선식품은 말할 것도 없고 가공식품, 과자류, 심지어 맥주조차 오가닉 맥주가 있다. 몸에 좋고 자연친화적일 듯한 상품을 소비하고픈 욕구와 상품을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고자 하는 욕구의 야합대잔치는 여기나 저기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쿠키들을 구경하는데 왼쪽에서 감지되는 강렬한 시선. 고개를 돌리니 금발 벽안의 꼬맹이 하나가 팔짱을 딱 끼고 서있었다. 6살쯤 됐을까. 그 또래 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동작 - 찢어지는 영업미소와 함께 안녕~! 하며 두 손 흔들기 - 을 해놓고 아차싶었다. 에고 안녕이 아니라 Hi였지 참. 내 행동을 지켜보던 꼬마는 같잖다는 듯 썩소를 짓곤 제 엄마 쪽으로 달려갔다. 허허 저 맹랑한 것이 저...! 인종차별 쪽으로 잠시잠깐 생각을 뻗치려다가 쯧 뭐 굳이, 하고 돌아섰다.


_잠자코 계산만 하고 넘어가는 점원이 드물다. 가벼운 농담과 적당히 따사로운 관심을 대화에 자꾸 섞어준다. 아이구 정말 너무나도 고맙고 스윗한데, 듣기평가 실력이 엉망진창인 내게 봉투 줄까? 영수증 줄까? 이외의 말은 아무리 호의가 넘쳐도 점수깎일 위기로밖에 안 느껴진다. 자꾸만 영구의 뒤로 한발짝 물러나는 내가 싫다! 영어왕이 되고 싶다!! 하지만 저녁에 들른 중동음식점에서 나는 팔라펠 영구는 슈와마를 각기 다른 창구에서 받아와야 하는 상황이 됐고, 서버가 소스 국자를 들어올리며 나한테 뭐라고 물어본 걸 또 못 알아들었다. 진땀을 흘리며 쏘리? 하고 있는데, 내 바로 뒤 인도인이 spicy? 라고 알려줘서 다급히 끄덕끄덕 OK. 덕분에 향신료를 잘 머금은 팔라펠이 완성됐다. 음식 받고 돌아서며 뒷사람에게 개미만한 목소리로 땡큐를 날렸는데 못 들었겠지.


_배도 채웠겠다 미국에서의 첫 여흥은 뭘로 스타트를 끊을까. 영구가 이것저것 제안을 해줬는데 보아하니 영화관에 가고 싶은 눈치다. 업무와 육아에 지쳐 영화에 온전히 집중한 게 기백년 전일 테니 그럴 만하다. [알리타:배틀엔젤]을 보기로 했다. 이미 본 영화지만 자막없이 봐야 하는 점을 생각하면 한 번 봤던 게 훨씬 낫겠고 몇몇 액션시퀀스를 다시 보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미국의 관람환경이 궁금했다. Amc라는 체인영화관에 갔다. 티켓값은 보통이 대략 16달러쯤으로 한국보다 훨씬 비싼데 시간관계상 그보다 더 비싼 돌비 특별관(21달러)에서 보게 됐다. 돈값을 하더만. 안락한 좌석 앞뒤로 두꺼운 벽이 놓여있어 뒷좌석 인간의 발차기가 완벽히 차단되는 구조에 몸통이 울릴 정도로 육중한 사운드(격한 장면에서 좌석이 진동하는데 그건 몰입에 방해됐다). 영화는 2차관람이 더 좋았다. 사운드 훌륭했고 원작팬 특유의 이상한 심통과 초조함 아니꼬움 같은 것도 다 휘발됐고 자막을 거치는 과정에서 손실됐던 감정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혹시 상당수의 대사를 놓칠 각오하고 자막없이 영화관람하는 것보다 화면->자막->화면으로 정신없이 눈알을 굴리는 와중에 놓치는 영화적 재미가 더 큰 것일까. 그나저나 미국의 알리타 관객들은 한국보다 흥겹고 웃음이 많네. 강아지 나올 때 다 같이 ‘어우~❤️’ 알리타가 초콜릿 먹고 좋아할 때 ‘와하하깔깔깔’ 알리타의 전투력에 쫄아붙은 남자들의 표정이 클로즈업 될 때 ‘크핬하핬하핬하하!!’ 참 미국 극장광고는 영화예고편만 잔뜩 나오더라. 그것도 영화에 따라서는 거의 한편 다 보여줄 기세로 길게. 덕분에 궁금했던 개봉예정작 샘플러 실컷 맛봤다. 실은 무엇보다 영구가 영화에 만족해서 다행이다.


_소비대국에서 하루종일 소비하고 노닥거리니 천국이 따로 없구나. 귀가하는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메일함을 열자마자 피가 얼어붙었다. 작업물의 사이즈가 기존보다 축소되고 고료가 깎인다는 통보였다. 들떴던 기분이 바로 시궁창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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