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한 지하철 객실. 맞은편 남자가 일어나서 자기 배낭에서 벌레 한 마리를 객실 바닥에 떨어내고 하차했다. 새끼손까락 두 마디만한, 하늘소를 닮은 검은 벌레였다. 추락 직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한동안 꼼짝없이 제자리에 붙어있던 벌레는 이내 멈칫멈칫 출입문 근처를 맴돌았다. 내성적인 벌레였다. 옆자리 여자들이 속삭였다. 어떡해 벌레. 근데 저거 바퀴벌레는 아닌 것 같다. 그지. 응. 바퀴는 아냐. 나만 혼자 벌레를 주시하고 있던 게 아니었고 대화의 톤이 벌레에게 비교적 온정적이었다는 것에 왠지 안도했다. 열차가 다음 역에 정차했고 출입문이 열렸다. 승하차하는 객들의 발걸음이 우르르 벌레 위로 쏟아졌다. 곧 끔찍한 꼴이 펼쳐지겠다 싶어 마음이 몹시 괴로웠는데, 놀랍게도 벌레는 멀쩡했다. 우연인지 다들 알아서 조심한 건지 하여간 모든 신발이 절묘하게 벌레를 피해갔다. 다음역에서는 열차 밖으로 벌레를 내보내려는 중년남자 두 명의 시도가 있었다. 그들은 벌레를 발 안쪽면으로 살짝살짝 차서 출입문 바깥쪽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벌레는 출입문의 턱에 걸려 좀처럼 나가지를 못했고, 벌레를 동정하되 맨손으로 만지면서까지 도와주고 싶지는 않았던 남자들은 둔탁한 발재간으로 어찌어찌 해보려다가 그냥 그대로 떠나버렸다. 문제는 그들의 도움으로 인해 벌레가 출입문에 눌려죽기 딱 좋은 위치로 옮겨졌다는 것. 옆자리 여자들이 초조하게 말했다. 어떡해. 어떡해 벌레. 출입문 닫힙니다 - 푸슉 소리와 함께 양쪽에서 다가온 문이 맞물리려는 순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옆의 여자가 번개같이 달려가서 우산 끄트머리로 문에 끼이기 직전의 벌레를 끄집어냈다. 그가 자리로 복귀할 때 기립박수를 칠 뻔했다. 교과서에 실릴법한 영웅적 행동이 아닌가. 다시 몇 정거장이 지났다. 아까와는 다르게 객실이 꽤 붐볐다. 그 북새통 속에서 벌레는 기적처럼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적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지. 점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곧 내 하차역이 다가왔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충동적으로 벌레를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밭일 할 때 신으려고 했던 양말 한 켤레가 가방 안에 있었다. 그걸로 벌레를 애기 포대기 감싸듯 쥐어들고 재빨리 내렸다. 뒤에서 여자들이 뭐라고뭐라고 했던 것도 같다. 역 근처에 작은 화단이 보이기에 거기다 벌레를 탈탈 털고 홀가분하게 갈길을 갔다. 너무 속편하게 홀가분해하는 거 아닌가 싶긴 했다. 서울 도심의 알량한 풀숲이 벌레의 생명연장에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않겠다. 그럼으로써 벌레 너는 최소한 내 기억 속에서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니 내 역할은 딱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하고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애원하듯 흥정을 시도하며 얼른 갈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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