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책은 빌릴 땐 좋은데 반납이 늘 문제다. 후자의 귀찮음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대출 = 낯선 활자에 담긴 미지의 재미를 획득하는 즐거운 모험
반납 = 반납 의무밖에 남지 않은 단물 다 빠진 짐을 짊어지고 가는 고행
똑같은 코스를 이동해도 그 목적이 쾌락추구인지 의무수행인지에 따라 의욕이 이렇게나 천지차이로 갈리는 것.
해서 웬만하면 집과의 거리가 가장 짧은 도서관만 이용하고 최소한 내가 사는 행정구역만큼은 절대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데, 로판과 무협에 뇌가 맛이 가버린 요 몇달 그 원칙을 개무시하고 있다.
이쪽 장르 인기작은 늘 대출 대기자가 한도 없이 밀려있어 동네 도서관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해가 바뀌도록 책표지도 못 만져볼 것이므로 활동범위를 넓히고 부지런히 행동해야 한다. 인접한 행정구역쯤은 우습게 넘나들고 서울 전역과 경기지역 도서관 장서까지 샅샅이 뒤져보고 교통편을 검색하며 짬 날 때마다 다녀오고 있다. 로판과 무협과 나들이에 미친 인간만이 기꺼이 감당할 번거로운 짓이지만 이게 요즘의 내 정신건강을 지탱해주는 행위인 듯.

마도조사의 백미로 알려진 마지막 4권을 빌리고 싶은데 과연 백미라 그런지 다들 입수하면 쉽게 놓아주질 않는 듯했다. 대출가능이라고 검색된 작은도서관을 찾아 3개 지역구를 돌아다녔으나 죄다 도착 직전에 간발의 차로 대출되거나 알 수 없는 사유로 책이 행방불명되었거나 하는 불상사가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 ★구의 작은도서관에 갔다. 인근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겸하는 작고 훈훈한 공간이었다. 그런만큼 나로서는 남의 집 안방에 신발 신고 들어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으며 불쑥 나타난 이질적인 존재에 사서의 눈빛에도 반짝 경계심이 일었으나, 고맙게도 곧 사무적인 친절함을 발휘해주어 서둘러 목례하고 책을 찾으러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청구기호를 따라 책장을 쭉 훑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렇게까지 책이 개판으로 정렬된 도서관은 처음이었다. 김씨 작가 뒤에 박씨가 나왔다가 장씨가 나오고 또다시 김씨가 튀어나오는 식이었다. 와씨 이게 다 뭐냐...크게 당황해서 시선을 책장 여기저기 아무데나 막 던졌다. 문 닫기 전에 책을 찾을 수나 있을까? 사서에게 한번 물어볼까 싶었지만 다시금 떠오른 사서의 경계심 어린 눈빛과 남한테 아쉬운 소리하는 타이밍은 최대한 뒤로 미루는 쫄보의 성격이 시선을 계속 책장 쪽에만 머무르도록 하였다. 어찌저찌하여 운좋게 중국작가 코너를 찾아냈다. 이쪽은 다행히 한국작가 쪽보다는 혼잡도가 덜했다. 아무래도 권수 많은 대하사극 시리즈물이 주를 이루고 상대적으로 이용자가 적어 책들이 덜 뒤섞였던 것 같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책장 가장 상단에, 무심히 꽂혀있는 마도조사 4권을 발견했다. 일순간 세상이 암전되고, 책과 나 단 둘만이 존재하는 기분. 손을 뻗어 책을 들었다. 묵직하게 전해지는 무게감에 뿌듯해하다가, 표지를 보고 헉했다. 1,2,3권엔 없던 19세 미만 구독 불가 경고딱지가 붙어있었다. 이런 횡재는 예상하지 못했다. 수백개의 자아가 환호하고 휘파람불고 기립박수치고 난리가 났다.

흥분을 누르고 책을 사서에게 가져간 뒤 당당하게 서울시민카드 앱에서 대출용 바코드를 띄워 내밀었다.

삑 - 대출 불가.

일동 침묵. 사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서너 번쯤 다시 찍었으나 결과는 같았다. 아…이건 또 무슨…회원가입 제대로 됐고 바코드도 제대로 발급받았건만 대체 왜 대출이 안 되는 건데!?! 전산 시스템이 말없이 튕겨내면 인간 나부랭이로서는 까닭을 알 도리가 없다. 한동안 말없이 사서와 마주보고 서있었다. 사서는 의욕없는 동작으로 또다시 바코드를 찍었다. 삑 - 대출 불가. 안될 거 뻔히 알지만 딱히 대책은 없고 가만 있긴 또 좀 뭐하니까 그냥 찍어본 것 같았다. 약간 내가 포기하고 떠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무언의 의식 같기도 했다. 사실 내가 집에 가는 게 갈등상황을 해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긴 했다. 평소의 나라면 응당 쉬운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7개의 구를 거쳐 여기까지 와서, 저렇게나 선명한 19금 딱지를 봐버리니 죽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아니,,그…어헉! 저…젓, 그럼 어, 어떻게 뭐 빌릴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요?!”

사람이 당황을 해도 어지간해서는 저렇게 만화 대사처럼 드라마틱하게 더듬진 않는데, 정말 정확히 저런 문장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발정이 나도 그렇지 19금 도서를 향한 욕망을 뭘 또 그렇게 남들 보는 앞에다가 애절하게 엎지르고 그를까 진짜. 너무 쪽팔렸다. 그런데 그때까지 다소 형식적인 안타까움과 체념의 태도로 일관했던 사서가, 잠깐 나를 응시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통화내용으로 보아 시스템 담당자에게 연락한 것 같았다. “네, 네, 아 네, 네, 네” 달칵 달칵 들려오는 마우스 클릭음이 뭔가 희망적이었다. 그리고 바코드를 찍었다. 삑.

“대출되셨습니다. 10월 @@일까지 반납해주세요.”


얼떨떨하게 책을 받아드는 나에게 사서 선생님은 가입 당시에 전산착오가 있었는데 이제 바로잡았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감사. 그저 압도적 감사. 사서느님께 꾸벅꾸벅 몇 번을 절하고 돌아섰다. ‘이제 바로잡았다’고 말할 때 직업적 자부심으로 단단하게 빛났던 사서신의 눈빛 영영 잊지 못하리라.

힘들게 모셔온 마도조사 4권 이제 거의 다 읽어간다.
묵향동후 이 작가 진짜 미친 양반이네.
책 읽다가 내가 복상사할 뻔했어.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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