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가는 여자 뒷모습이 너무 나같았다. 검정모자 검정츄리닝 큼직한 배낭 윤기없는 산발 하체비만에 다리가 휜 각도까지 거의 나랑 도플갱어였다. 눈 마주치면 죽을까봐 얼른 고개를 숙이고 추월하려는데 미친 걷는 속도까지 나랑 똑같은겨. 한동안 나란히 걷다가 마음이 불편해 죽을 거 같아서 앞으로 냅다 달려버렸다. 그 여자도 똑같이 뛰었으면 존나 소름끼칠 뻔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동네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동성친구들끼리 장난치고 놀 때 여고생은 서로를 미친놈이라고 하고 남고생은 미친년이라고 하더라. 뭔데 이 교차오염.

노점에서 1키로 2000원 하는 연근을 얼씨구나하고 두 봉지 샀다(인터넷가 1키로 7000원선). 그런데 집에 와서 씻어보니 세에상에 뭔놈의 진흙이 이렇게 많이 붙었냐? 대부분의 연근에 분식집 오징어튀김옷 두께의 흙이 기본으로 입혀져있고 어떤 건 아예 연근의 형상을 한 흙덩이였다. 그 흙으로 빚은 연근에 이르러서는 열받다못해 그만 감동을 해버렸다. 이쯤 되면 이거는 예술작품을 샀다고 봐야 한다. 흙 무게를 빼도 시세보다 저렴한데 맛도 괜찮고 흙공예품까지 감상했으니 결론적으로 만족.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보는데 누가 또 밑줄을 잔뜩 쳐놨다. 이번 밑줄자는 혼돈의 파괴자형이었다. 아무래도 좋을 곳에 밑줄을 치고(‘그렇게 열심히 살면서도 꼭 짬을 내어 운동했다’는 문장에서 ‘그렇게’에 밑줄) 그 밑에 까닭 모를 말을 써놨다(‘그밖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한’ 밑에다 ‘나는’이라고 씀). ‘나는’…? ‘나는’ 뭐…? 무슨 심정으로 ‘나는’을 썼을지 애써 짐작해보려다 몇 페이지 뒤에 ‘햇살을 모으는 생쥐’라고 쓴 걸 보고 멍해졌다. 이건 또 뭔……근데 문구에 담긴 어떤 동화적인 서정성이 뭔가 묘하게 마음에 남는 것이다. 검색해보니 [프레드릭]이라는 동화의 일부분인 듯. 궁금해져서 나중에 읽을 책 목록에 추가했다. 밑줄자는 어쩌면 육아에 과몰입한 양육자였을까. 하여간 이런 식으로 책을 영업당하기는 또 처음이다.

이 와중에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게 될 줄이야. 하긴 2차대전 배경의 몇몇 작품에서 크리스마스를 묘사한 걸 떠올려보면, 큰 고난 속에서 다가오는 명절을 전에 없이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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