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 공식적인 화이자 백신 1, 2차 접종 간격 권고기한이 3주라는데, 2차 접종 예약일은 6주 후. 라면 하날 끓여먹어도 포장지 뒷면의 조리예를 칼같이 지켜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이 상황이 찜찜해서 참을 수 없었다. 앞당길 방법이 없나 안절부절 못하던 중 917일부터는 18~491차 접종자도 잔여백신으로 2차 접종 예약이 가능하다는 기사가 떴다. 냉큼 집에서 가까운 병원 다섯 곳을 골라 잔여백신 알림설정하고 정확히 3주가 되는 D데이를 기다렸다. 잔여백신이 생겼다는 알림이 생각보다 굉장히 자주 들어왔다. 일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 알림들을 가만 지켜보니, 화이자 백신 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알림이 뜨자마자 광속으로 사라졌다. 자주 뜨는데, 빨리 마감된다. 난이도 중상급의 두더지게임이었다. 모두가 화이자라는 두더지를 노리고 있다가, 떴다 하면 미친 듯이 달려가서 망치로 두들겨 가루를 내놨다. 오직 화이자만. 그에 비해 모더나 두더지는 완전 이지 모드로서 한꺼번에 10마리가 머리를 내놓고 있어도 건드는 자가 많지 않았다. 아 나 선착순 이런 거 진짜 못하는데. 어쩌겠나. 틈틈이 선착순 터치질 훈련을 하며 운명의 날을 기다렸다.

 

당일] 오전 9시 땡 치자마자 한번에 화이자 7개가 떴다. 터치하니 바로 예약됐다. 뭐야 이거. 나 된 거야?? 20초쯤 어리둥절 상태로 있다가 앞으로의 절차를 검색했다. 예약된 병원에서 언제 오라고 전화해줄 거라는 말도 있고, 내 쪽에서 전화해서 예약을 잡아야 한다는 말도 있고, 그냥 바로 병원으로 뛰어가라는 말도 있었다. 아 나 자유도 높은 게임 질색인데. 10초쯤 고민하다 예약된 병원에 전화했다. “당장 오셔야죠??” 직원의 채찍 같은 목소리에 후다닥 병원으로 달려갔다. 1차 접종한 OO한방병원 바로 옆 건물 XX의원이었다.

병원 문을 열자마자 생각했다. 씨발... 1) 존나 좁고 낡았다. 2) 중노년들이 바글바글했다. 사실 직원의 전화응대부터 느낌이 썩 좋지 않았지만 안전거리가 지켜지기는커녕 앉아서 대기할 데도 없는 병원 상황을 눈앞에 마주하니 잔여물량 나왔다고 무턱대고 예약한 게 후회됐다. 깔끔하고 친절한 OO한방병원이 그리웠다. 하지만 이제 와 뒤엎자니 생각만으로도 귀찮아져서, 북새통을 뚫고 들어가 안내데스크에 비치된 문진표를 작성했다(발열호흡기질환알러지어쩌구없음). 그런데 문진표의 상태가 엄청났다. 전체적으로 회색 잡티가 가득하고 시꺼먼 줄이 문서 전체에 바코드처럼 좍좍 그어져있었다. 망가진 스캐너로 스캔한 서류를 망가진 프린터로 뽑아서 망가진 복사기로 복사해 내놓은 것 같았다. 잡티와 검은 줄을 겨우겨우 피해 이름과 주소를 적고 신분증과 함께 데스크에 제출하려는데, 누군가 새치기를 했다. 아담한 체구의 백발 할머니였다. 진찰받고 돌아갔다가 처방약을 어떻게 타야 하는지를 물으러 다시 올라온 눈치였다.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짜증을 겨우 억누른 티가 역력한 직원의 대꾸에 할머니가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소릴 웅얼거렸다. “아니 내가 나가가지구...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약을 어디서 타야 되는지...약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구...약국이 어딨는지...” “1층에 약국 있잖아요! 거기 가서 처방전 내시라고요!”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버벅대는 노인의 모습이 더는 남의 일 같지 않긴 하나 아직까지는 직원의 짜증에 더 감정이입이 되는 편. 할머니의 퇴장에 안도하고 돌아서서 인구밀도가 그나마 적은 구석의 벽을 보고 섰다. 곧 직원이 누군가를 크게 호명했다. 나랑 이름 되게 비슷하네, 하며 벽보고 서있는데 두세 번을 더 호명한다. 설마설마했는데 내 이름을 잘못 읽은 거였다. 염병씨병 진짜...뒤돌아서 집으로 가버릴까 하다가 신분증을 받아들고 직원의 손짓에 따라 주사실로 머뭇머뭇 들어갔다. 의심은 드럽게 많은데 정작 중요한 땐 생선통조림처럼 순순히 컨베이어벨트에 몸을 맡기는 나 자신에 대한 걱정과 분노로 벌써부터 열이 나서 몸져누울 것 같았다.

접종은 1차 때처럼 30초도 안 돼 끝났다. 심지어 1차보다 덜 아팠다. 놀라운 건 주사를 놔준 직원의 태도였다. 신경질적으로 전화 받고, 방문자에게 짜증내고, 내 이름을 잘못 부른 그 직원이,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말투로 접종 이후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사람 진짜 내가 주사 맞고 어떻게 될까봐 나 자신보다 더 나를 걱정해주는 거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다정다감함이었다. 행정일을 할 때는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한 방울도 용납하지 않다가, 아껴둔 그 정신력을 의료행위에 몽땅 쏟아붓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거 정말 대단한 직업정신이지 않은가, 하고 감탄하며 주사실 앞에서 15분을 보내고 병원을 나섰다.

 

증상]
7시간 경과_경미한 팔 근육통. 금강막기 쉽게 가능. 체온 36.
9시간 경과_원래 수족냉증이 심한 체질인데 손발이 기분좋게 따끈따끈.
타이레놀 먹지 않고 취침.
19시간 경과_온몸이 따끈따끈.
20시간 경과_어제보다 팔 통증 강해짐. 1차와 비슷한 강도.
특이하게도 이번엔 금강막기는 잘되나 넥스트레벨 동작할 땐 확 아파짐.
21시간 경과_체온 36.1. 금강막기도 좀 힘들어짐. 그래도 견딜만함.
36시간 경과_팔 통증 감소세. 가장 아팠을 때도 무거운 물건 무리없이 운반.
48시간 경과_팔 통증 희미해짐. 아주 약한 두통. 여전히 따끈따끈한 손발.
54시간 경과_영화관에서 체온측정.
계속되는 열감 때문에 체온이 높게 나올까 걱정했는데 36.6.
72시간 경과_평소와 컨디션 동일.

이번에도 질병관리청에서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고 별일 없다고 답했다.
이렇게 백신접종자가 되었다.
홀가분하면서도 백신 효과 기간과 변이 바이러스 등을 생각하면 착잡해진다.
이 와중에 먹는 코로나 치료제가 연내 출시된다는 뉴스가 보도됐고,
그 서슬에 몇몇 백신 관련주가 폭락했다고 한다.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인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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