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와 파를 뽑고 대추를 따고 당근과 고구마를 캤다. 고구마밭에서 지옥을 맛봤다. 고구마가 감자보다 왜 비싼지 너무 잘 알겠다. 감자보다 더 천천히 자라고 훨씬 불규칙하게 생겼으며 위치파악이 어렵다. 생각 없이 땅을 파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온 고구마를 호미로 콱 찍거나 뚝 부러뜨리기 십상이다. 상처는 쉽게 썩고 썩은 상처는 고구마맛을 통째로 오염시킨다. 도려내고 먹어봤자 멀쩡한 부분도 이미 씁쓰름하다. 또다른 의외의 난관은 흙이었다. 캐다보면 앞뒤양옆으로 흙무더기가 쌓인다. 이것이 다음 고구마 발굴에 방해가 된다. 적당히 치워가며 작업해야 하는데, 이 누적된 흙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불도저마냥 파고 캐고 쌓인 흙 밀고 파고 캐고 쌓인 흙 밀고를 반복해야 했다. 팔힘이 쭉 빠졌다. 힘이 빠지니 호미질이 거칠어지고 고구마를 찍는 빈도가 높아졌다.

문득 감자와 고구마값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0월 현재 감자 10Kg 7천원~2만원선 고구마 10Kg 3~4만원선(인터넷 소매가). 돈을 의식하며 일하니 본격적으로 정신이 축났다. 고구마가 다치고 부러질 때마다 육성으로 윽!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마음에 충격이 갔다. 곧 심신이 완벽하게 너덜너덜해졌다. 결국 하루 목표치를 반도 못 채우고 나자빠졌다. 홋카이도 농부의 딸이자 [강철의 연금술사] 작가인 아라카와 히로무가 머슴이 밥 퍼먹듯 척척 마감을 치던 것이 이해가 됐다. 이 미친 업무강도에 단련된 몸이라면 웬만한 노동은 우습게 해낼 법도 하다. 몸에 안 아픈 곳이 없다.

 

지주에게 작업량 보고를 하자 하이고 고거밖에 못했냐며 내가 갔더라면 그 일 다 하고도 남았을 텐데, 하고 어쩐지 약간 즐거운 듯 혀를 끌끌 찬다. 민망하고 면목 없는 한편 웃어른이 자신의 우월한 노동력을 뽐내는 모습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노화로 인한 무능력이 더할 나위 없이 굴욕적으로 느껴지는 시대에 뭐 나름 값진 모먼트를 선사해드리지 않았나, 이런 게 바로 신개념 노인공경이 아닌가, 하는 시건방진 생각을 한 거죠.

 

유튜브에서 농사 노하우를 종종 찾아본다.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 는 말도 좀 적당히 걸러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구의 성능이 너무 발전해버렸다. 이제 저 격언은 과소비를 경계하는 차원에서나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업 중간에 목 허리 골반 손목이 너무 아파서 한동안 허수아비처럼 밭 한가운데 서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허수아비 - 누가 봐도 사연이 있게 생긴 그 이름의 유래가 궁금해지더라. 일단 허수공허하다 할 때 그 허짜랑 지킬 수짜를 써서 가짜로 지키는 아비 뭐 그런 설이 있을 거 같고 또 다른 유력한 설로 이름이 허수인 아이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화가 있겠거니 했는데, 검색해보니 얼추 비슷했다. 다만 애 이름이 허수라는 설정이 들어간 일화들은 하나같이 지긋지긋하게 처절하고 끈끈한 가족과 가난과 죽음의 서사시라, 숨이 막혀서 막판 몇 개는 매직아이처럼 대충 째려보고 넘겼다. 드물게 허수가 여자아이인 버전도 있었는데, 어이쿠 아니나 달라 허수는 엄청난 미녀라는 설정이 따라붙었다. 허허허허허허 징글징글해 아주 그냥.

 

꿀고구마와 밤고구마를 반반 심었다는데 아무렇게나 캐담아서 구별이 불가능했다. 호미에 세게 찍힌 것 몇 알을 골라냈다. 고구마는 캐온 뒤 2주 정도 후숙을 해야 달콤해진다는 걸 알지만 상처입은 놈들은 어차피 2주도 안 되어 썩을 테니 바로 쪄먹기로 했다. 맛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포슬포슬 갈라지며 목이 콱 막히게 팍팍한 꿈의 밤고구마였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고구마에 기대하는 당도보다 확실히 덜 달았지만 그게 또 매력 있었다. 아빠도 좋아했다. 그간 마트 같은 데서 밤고구마라는 걸 사와도 질척거리는 일이 잦아 짜증났는데, 이거는 옛날에 먹던 딱 그 밤고구마라고 했다. 혹시 옛날엔 후숙을 하지 않고 밭에서 캐자마자 내다 팔았던 걸까? 혹시 종자에 상관없이 캐자마자 먹으면 다 밤고구마 느낌 나는 거 아냐? 호박고구마조차? 많은 물음표를 뒤로 한 채 정신없이 고구마를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렇게나 먹었는데 지금도 또 먹고 싶다.

 

농사일에서 해방만 되면 마감노동쯤 히로무 선생처럼 그냥 껌으로 해치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드럽게 힘들고 지지부진한 건 전과 다를 바 없다. 오늘도 노트북 앞에서 속만 끓이다 목표치를 반도 못 채우고 나자빠졌다. 창작은 내게 농사일과 쓰는 근육이 다른, 아니 실은 근육도 굳은살도 생기지 않아 영영 그 고통에 적응할 수 없는 그런 일인 것 같다.

 

온 집안이 상처 입은 고구마들로 난장판이다. 이것들을 제때 소비할 자신도, 그 개고생을 하며 캔 것들이 서서히 쓰레기가 되어가는 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자신도 없다. 불운이 겹쳐 농작물을 제손으로 갈아엎어야 하는 전업농의 심정이 어떨지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하여간 고구마를 장기보관하려면 구워서 냉동하거나 감자칩처럼 썰어 말리거나 해야 하는데, 냉동할 공간도, 썰고 있을 시간도, 말릴 도구도 없다. 모든 게 가능하면 몇 달치 탄수화물 저장이 해결되는 건데. 애써 확보한 식량자원의 앞날은 이렇게 노동력과, 첨단 테크놀로지와, 부동산의 문제로 귀결되는군요, 결국.

 

 

728x90

' >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나일기_211030  (0) 2021.10.30
좋나일기_211020  (2) 2021.10.20
좋나일기_211010  (0) 2021.10.10
좋나일기_211005  (0) 2021.10.05
화이자 백신 2차 접종 후기  (0) 2021.10.0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