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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시차적응에 실패한 건 둘 다 마찬가지지만 나는 변방의 용병이고 영구는 제국군. 너덜너덜해진 심신을 끌고 제국에 출근해야 했다. 아이고 혼자 계셔서 어떡하나. 현관을 나서며 영구가 말했다. 몇날며칠 말없이 혼자 처박히기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짓이니 걱정말고 네 컨디션이나 챙기라 했다.

집은 너무나 고요했다. 새소리 바람소리만 아련히 들려왔다. 미국의 평일 낮시간대 집구석 원래 이렇게 소음공해 청정구역인가? 황금같은 이 침묵 한 허리를 버혀내어 서울의 내 이웃들 샷시공사할 때 굽이굽이 펼 수만 있다면 뭐라도 팔겠다. 글쓰고 낙서하고 콘티짜다 지겨워져서 TV를 켰다. 영어가 왱알앵알 쏟아졌다. 들리는 단어가 적지는 않은데 그 의미가 좀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머리통만 그냥 대충 휘젓다 나가버린다. 빡세게 공부하면 언젠간 다 들리겠지. 지금은 말고.

FUCK! ​꾸벅꾸벅 졸다 아는 단어가 튀어나와 고개를 드니 아는 얼굴. 고든램지였다. 미국까지 와서 굳이 카스 찾아먹는 기분이 들어 채널을 돌렸다. 이번엔 수의사가 주인공인 일종의 리얼리티 쇼가 나오는데 어이구야. 동물의 피 상처 뼈 내장이 그대로 다 나온다. 등에 입은 치명상이 곪아들어가는 개가 등장했다. 의사가 개 등짝을 여드름 짜내듯 양 엄지손가락으로 힘껏 누르자 알밤만한 애벌레들이 환부에서 삐져나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어떤 장면에도 모자이크는 없었다. 으와 미국TV 완전 스파르타네. 이에 비하면 시청자들 놀랄까봐 모자이크로 꽁꽁 싸맨 한국방송은 이유식이다.


_잠은 거의 못 자는데 끼니는 한국밥때 미국밥때 둘 다 적용하여 이중으로 챙겨먹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산 whole milk의 유지방이 혈관을 타고 달려 배 옆구리 허벅지에 착착 들러붙는 감각. 너무나 불쾌했다. 하지만 원치 않는 짐이 붙는 불쾌감은 아끼던 게 깎여나가는 고통보단 나은 편이었다. 통보메일 받은 이후로 깎인 고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금이 간 내 밥그릇. 한물간 내 상품성. 내 가치. 커리어 좆됨의 서막.

엊그제 했던 영구와의 대화를 곱씹는다. 미국 IT업계의 똑똑한 놈들 때문에 먹고살 길이 점점 막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술발달로 진입장벽이 벌어진 틈을 타서 얼렁뚱땅 업계에 발을 디딘 내가 할만한 푸념인가. 나도 IT기술의 수혜자라고. 혜택 만료시점이 코앞에 닥쳤다 뿐이지. 인간의 정신작용을 시청각 상품으로 만들어 복제 배포하기 점점 쉬워지는 만큼 세상은 점점 재밌어지고, 창작자 개인의 상품성은 점점 빠르게 소진된다. 수백 수천 수만개의 쥐구멍에 짧고 강렬한 볕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었다 사라진다. 지속 가능한 볕들날을 원하거든 최신 동향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볕들 거라 예상되는 지점으로 잽싸게 옮겨가 구멍을 파는 행동력을 발휘해야 할 텐데......가능할까? ‘잽싸게’는 나와 가장 거리가 먼 부사다. 내가 지금 이 글을 며칠째 붙들고 있는지 아는가. 블로그라는 화석화된 매체에 표현 어휘 맞춤법 하나하나 골머리 썩여가며 그래픽자료 한점 없는 글을 느릿느릿 써올리는 비효율적 행위에 애착을 느끼는 성향 자체가 이미 망조 아닐까. 매체를 초월하는 가치를 지닌 개인은 극소수다. 그 극소수에 들어갈 가능성? 내가 또 세상에서 제일 못 견디는 게 높은 경쟁률이다. 경쟁도 못해 느리긴 드럽게 느려 그렇다고 방맹이 깎는 노인처럼 누가 뭐라든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는 소신도 없어 우와 어떡하지? 내 인생 어떡하지? 씻으면 좀 나아질까?


_샤워를 하니 한국과 다르게 물 닿은 피부의 마찰력이 높아지고 머리칼이 뻣뻣하게 엉킨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경수와 연수의 차이인가. 십수년만에 린스를 썼다.

화장실문을 여닫다 뭔가 신경쓰이는 점이 있어 문을 다시 살펴보고 다른 방문도 확인해봤다. 모든 문짝의 아랫부분이 노트 하나쯤은 수월히 넣었다 뺄 수 있을 정도의 홈이 뚫려있다. 여기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고 안에 사람이 있나없나를 알 수 있는데, 용도가 그것뿐일까. 다른 집도 이러나. 현관문은 실리콘 같은 걸로 막혀있는데 저걸 뜯어내면 똑같이 홈이 뚫렸을까.

현관엔 신발 신는 영역과 벗는 영역이 따로 없다. 그냥 똑같이 평평한 목재 마루바닥이다. 하지만 영구네는 신발을 현관문가에서 벗고 들어가는 ‘한국식’ 생활을 한다. 다른 집들은 어떨까. 미드에서처럼 밖에서 신던 신발 그대로 침대까지 올라가는 생활을 하는 집이 많을까. 그 몰상식한 습속의 정당성을 한번도 속시원히 들어본 적 없다. 누가 좀 설명해줬음 좋겠다.

천장 쪽에서 휑-하는 바람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린다. 벽 높은 곳 여기저기에 뚫린 통풍구로 더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다. 중앙에서 보내주는 온풍과 냉풍으로 실내온도를 조절하는 시스템인가보다. 좀 덥다 싶어 벽에 붙은 온도조절장치의 액정화면을 보니 75도. 아 맞다 얘네 화씨 쓰지. 하긴 마트에서 사온 음식에도 죄다 갤런 파운드 온스 붙어있고 자동차 계기판 속도표지판은 마일. 으 성가신 도량형 야만인들.​ 네이버 켜고 화씨 섭씨 변환을 눌렀다. 화씨 75도=섭씨 23.888...도. 65도로 내렸다.

빾!!!!!!! 갑자기 공기를 찢는 경보음에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는 신호였다. 아 뭔놈의 종료음이 이렇게 공격적이여. 그러고보니까 이 집의 엘리베이터 신호음을 듣고도 흠칫 놀랐었네. 날카롭고 건조한 빾! 소리. 모난 부분 다 깎아낸 딩동-멜로디에 ‘지하 10층입니다’ 간드러진 여자의 음성이 동반되는 한국의 엘리베이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네. 공항 착륙부터 지금까지 들었던 무수한 미국의 신호음 중에 음계를 지닌 것이 있었던가. 사람을 각성시키는 목적에 충실한 외마디 빾!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과연 미국은 비트가 팔리는 나라고 한국은 곧죽어도 가락, 멜로디 장사인 건가. 시계를 보니 슬슬 영구가 퇴근할 시각.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넣고 취사버튼을 누르니 딩동댕~백미,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곱다. 눈물나게 고운 소리다. 고객님들 기죽을까봐 영롱한 멜로디에 나긋나긋한 ‘여성성’을 꼭 첨가해주는 한국의 신호음 또한 이유식이다.

별것도 아닌 걸 갖고 한국은 이런데 미국은 저렇네 비교 일반화하는 거 오지게 싼티나지만 재밌어서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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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누구랑 만나도 앞으로 뭐해먹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공포가 느껴져
영구 - 맞아 다 그래
나 - IT기술발달이 모든 산업의 사이클을 단축시키는 거 같애 내 수명도 덩달아 단축되는 기분이야
영구 - 소비자와 창작자의 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라잖아 이러다 진짜 뇌를 서로 직접연결하는 시대도 먼 일이 아니겠어
나 - 만인의 만인에 대한 콘텐츠 전쟁 시대인 거지 으 존나 피곤하게 진짜
몇년 전에 어떤 강연에서 청중 하나가 질문을 하는데, 자기가 아이디어는 끝내주는데 그려만 놨다하면 너무 구려서 못 봐주겠으니 상상한 게 그대로 출력되면 좋겠다는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강사가 딱 그러더라. 그럼 우린 다 좆된다고. 창작물을 내놓기까지 상당기간 지겹고 고통스런 수련을 해야 한다는 게 이 바닥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데 그게 없어지면 어쩌냐는 거야. 근데 진짜 어쩜 좋냐 점점 좆되는 방향으로 가는 게 확실시되는데
영구 - 그러니까 옛날엔 인간의 미숙함 뭐 비합리성 이런 걸로 인한 시장의 변동을 잘 이용해서 돈벌 기회가 꽤 있었는데 인제는 그런 게 점점 줄고 있어서
나 - 저새끼들 때문에

창밖에 흘러가는 나사 구글 애플 본사건물을 노려보며 그런 대화를 했다.

나 - 똑똑한 새끼들


_세이프웨이에 다시 갔다. 식료품 쇼핑은 언제든 대환영이다! 옐로우스쿼시(노란애호박) 망고 6알 IPA맥주 6병묶음(여기 세트들은 왜 이렇게 6의 배수가 많지) 전부터 궁금했던 콩으로 만든 비건 요거트를 샀다. 건강식 먹고 늘린 수명 음주로 깎아먹자는 의지가 돋보이는 구매목록이었다. 그런데 100% organic임을 어필하는 상품이 정말 많다. 신선식품은 말할 것도 없고 가공식품, 과자류, 심지어 맥주조차 오가닉 맥주가 있다. 몸에 좋고 자연친화적일 듯한 상품을 소비하고픈 욕구와 상품을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고자 하는 욕구의 야합대잔치는 여기나 저기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쿠키들을 구경하는데 왼쪽에서 감지되는 강렬한 시선. 고개를 돌리니 금발 벽안의 꼬맹이 하나가 팔짱을 딱 끼고 서있었다. 6살쯤 됐을까. 그 또래 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동작 - 찢어지는 영업미소와 함께 안녕~! 하며 두 손 흔들기 - 을 해놓고 아차싶었다. 에고 안녕이 아니라 Hi였지 참. 내 행동을 지켜보던 꼬마는 같잖다는 듯 썩소를 짓곤 제 엄마 쪽으로 달려갔다. 허허 저 맹랑한 것이 저...! 인종차별 쪽으로 잠시잠깐 생각을 뻗치려다가 쯧 뭐 굳이, 하고 돌아섰다.


_잠자코 계산만 하고 넘어가는 점원이 드물다. 가벼운 농담과 적당히 따사로운 관심을 대화에 자꾸 섞어준다. 아이구 정말 너무나도 고맙고 스윗한데, 듣기평가 실력이 엉망진창인 내게 봉투 줄까? 영수증 줄까? 이외의 말은 아무리 호의가 넘쳐도 점수깎일 위기로밖에 안 느껴진다. 자꾸만 영구의 뒤로 한발짝 물러나는 내가 싫다! 영어왕이 되고 싶다!! 하지만 저녁에 들른 중동음식점에서 나는 팔라펠 영구는 슈와마를 각기 다른 창구에서 받아와야 하는 상황이 됐고, 서버가 소스 국자를 들어올리며 나한테 뭐라고 물어본 걸 또 못 알아들었다. 진땀을 흘리며 쏘리? 하고 있는데, 내 바로 뒤 인도인이 spicy? 라고 알려줘서 다급히 끄덕끄덕 OK. 덕분에 향신료를 잘 머금은 팔라펠이 완성됐다. 음식 받고 돌아서며 뒷사람에게 개미만한 목소리로 땡큐를 날렸는데 못 들었겠지.


_배도 채웠겠다 미국에서의 첫 여흥은 뭘로 스타트를 끊을까. 영구가 이것저것 제안을 해줬는데 보아하니 영화관에 가고 싶은 눈치다. 업무와 육아에 지쳐 영화에 온전히 집중한 게 기백년 전일 테니 그럴 만하다. [알리타:배틀엔젤]을 보기로 했다. 이미 본 영화지만 자막없이 봐야 하는 점을 생각하면 한 번 봤던 게 훨씬 낫겠고 몇몇 액션시퀀스를 다시 보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미국의 관람환경이 궁금했다. Amc라는 체인영화관에 갔다. 티켓값은 보통이 대략 16달러쯤으로 한국보다 훨씬 비싼데 시간관계상 그보다 더 비싼 돌비 특별관(21달러)에서 보게 됐다. 돈값을 하더만. 안락한 좌석 앞뒤로 두꺼운 벽이 놓여있어 뒷좌석 인간의 발차기가 완벽히 차단되는 구조에 몸통이 울릴 정도로 육중한 사운드(격한 장면에서 좌석이 진동하는데 그건 몰입에 방해됐다). 영화는 2차관람이 더 좋았다. 사운드 훌륭했고 원작팬 특유의 이상한 심통과 초조함 아니꼬움 같은 것도 다 휘발됐고 자막을 거치는 과정에서 손실됐던 감정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혹시 상당수의 대사를 놓칠 각오하고 자막없이 영화관람하는 것보다 화면->자막->화면으로 정신없이 눈알을 굴리는 와중에 놓치는 영화적 재미가 더 큰 것일까. 그나저나 미국의 알리타 관객들은 한국보다 흥겹고 웃음이 많네. 강아지 나올 때 다 같이 ‘어우~❤️’ 알리타가 초콜릿 먹고 좋아할 때 ‘와하하깔깔깔’ 알리타의 전투력에 쫄아붙은 남자들의 표정이 클로즈업 될 때 ‘크핬하핬하핬하하!!’ 참 미국 극장광고는 영화예고편만 잔뜩 나오더라. 그것도 영화에 따라서는 거의 한편 다 보여줄 기세로 길게. 덕분에 궁금했던 개봉예정작 샘플러 실컷 맛봤다. 실은 무엇보다 영구가 영화에 만족해서 다행이다.


_소비대국에서 하루종일 소비하고 노닥거리니 천국이 따로 없구나. 귀가하는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메일함을 열자마자 피가 얼어붙었다. 작업물의 사이즈가 기존보다 축소되고 고료가 깎인다는 통보였다. 들떴던 기분이 바로 시궁창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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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너무도 아름다운 햇살아래 납작하고 정갈한 디자인의 주택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가로수의 나뭇가지들은 더없이 복잡하고 대담한 형세로 허공을 수놓는다. 숱많은 할머니의 파마머리 같다. 인도를 질펀하게 침범한 관목들도 많았다. 저 호방한 기세를 좀 봐. 한국의 도시식물들은 가지모양도 규칙적이고 규격을 준수하고...암튼 뭐랄까 좀 조신하게 제자리를 지키게끔 강요받지 않나. 지독히 인간편의적인 억측이겠지만 솔직히 그 강요를 그리 힘들어하는 것 같아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얌전한 정물로 기능하다 도저히 못 견딜 땐 조용히 죽어버린다. 아이구 나 지금 벌써부터 자학모드+천조국의 모든 것에 알아서 감탄할 준비가 너무 잘 돼버렸구만. 그게 좀 아무래도...기획부동산의 농간에 놀아나 덜컥 한반도를 사버린 단군X쑥마늘로 연명한 미련곰탱이의 후손이라서요.


_영구가 사는 타운하우스는 정말 아름답다. 좁지 않은 집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있고 코앞에 공용수영장, 바베큐 그릴, 헬스장, 그리고 거위가 노니는 호수가 있다. 헌데 정갈하디 정갈한 이 동네의 그 어떤 골목에도,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비친다. 유일한 보행자는 나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는데, 사람이 나타나면 그건 또 그거대로 공포였다. 저새끼는 정체가 뭔데 평일 근무시간에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야. 그쪽에서도 나를 보면 같은 생각으로 무서우려나. 아니겠지. 가장 만만한 사냥감은 겁에 질린 동양여자일 것이다. 아 씨발 빨간색 쿵후 도복이랑 황비홍 변발가발 가져올걸. 도복입고 가발쓰면 세상 다시없을 또라이 미친년처럼 보일 자신 있는데. 아 그럼 체포되려나.


_ 한국이었으면 골백번 걷고도 남았을 거리를 무조건 차로 이동했다. 사실상 차 없이는 북미 문화권을 사람답게 즐기는 것이 불가능한 듯했다. 어쩌면 총기소지가 허용된 나라에서의 자동차란 더없이 쓸만한 방탄조끼 아닌가 싶기도 했다.


_ 코스트코에서 흰계란(희한하게 한판 24개였음)과 귤 한봉지와 우유와 양고기를 사고 세이프웨이Safeway에서 펜넬과 엄청나게 뚱뚱한 가지와 겨자잎과 주전부리 약간과 맥주를 샀다. 아하 미국 마트 이런 거였구나. 이런 거였어. 내가 원했던 모든 고기 채소 맥주 향신료가 흐드러지게 진열돼있었다. 너무 황홀해 얼이 나갈 뻔했다. 코너를 도니 베이커리 파트가 나왔는데, 와 이건 그냥 천국의 풍경이로구나. 크고 먹음직한 갈색 덩어리의 향연. 어떻게 이런 압도적인...아...하여간 이들의 식료품 진열방식엔 뭔가 정말 압도적인 데가 있다. 다 먹어치우고 싶은 나머지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나왔다. 알다시피 풍요 앞에 몸둘 바를 모르는 쑥마늘의 후손이라니까요 글쎄.


_그리고 어마어마한 비닐 휴지 플라스틱 쓰레기와 음식물찌꺼기를 한데 뒤섞어 버리는 극악무도함에 기절했다. 님들 부디 저승에선 무색플라스틱 색깔플라스틱 스티로폼 종이 비닐과 게 조개 굴 새우 수박 자몽 오렌지 귤껍데기 등등을 골빠지게 분리하여 정해진 요일에 내놓아야 하는 수거지옥에 빠지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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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그렇게 작고 초라하지 않더만 샌프란시스코 공항. ​​다만 조금 어두침침했다.


_입국심사대에 줄을 섰다. 하도 흉흉한 사례를 많이 주워들은 탓인가. 시키는 거 다 했고 허가도 다 받았고 체류지 체류기간 목적 등등 누가 봐도 모든 항목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있으니 별일이야 있겠냐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지뢰를 클릭하기 직전과 비슷한 불안감이 들었다. 대기인원이 상당히 많았고 진행속도도 더뎌서 지겹기 짝이 없었으나 앞사람이 줄어들면 줄어드는대로 식은땀이 났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잖아......​맴! 갑자기 웬 경찰이 나를 불러 화들짝 놀랐다. ESTA허가를 받았냐고 묻고는 무인기계코너를 가리키는 경찰. 허리춤의 권총에 얼핏 시선이 갔다.

알고 보니 그냥 정해진 절차를 지시하는 거였는데 첫빠따가 나였을 뿐이었다. 괜히 긴장했네. 뒷사람들과 함께 우루루 기계로 몰려갔다. 여권정보를 스캔하고 얼굴사진을 찍고 지문날인을 하면 영수증 같은 데 내 신상정보가 출력돼 나오고 그걸 심사창구에 가져가면 인터뷰가 시작되는 거다. 그런데 지문이 안 찍힌다. 손가락을 서너 번 뗐다 붙여도 기계가 지문인식을 못 한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관공서에서 지문 찍을 일이 있을 때 종종 듣는다. 선생님 지문이 좀 흐리시네요. 지문이 흐리다는데 뭐라 대꾸할 말도 참 마땅찮어. 그러게요...하고 쓴웃음짓는 거 말곤 뭐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 내게 원래 흐린 사람들이 있어요, 하고 짐짓 자비로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몇번이고 지문을 다시 찍게 했던 조국의 친절공무원이 생각났다. 과연 미국도 흐리멍텅헌 지문을 가진 동양여자에게 짐짓 자비를 베풀어줄 것인가. 의문에 화답하듯 네다섯번째 시도에서 마침내 지문이 인식됐다. 쾌재를 부르며 출력된 결과를 확인하는데, 내 신상정보 전체에 대문짝만한 엑스표가 그어져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건 원숭이도 알겠다.


_구글에서 검색해보니 이 엑스표는 지문인식에 문제가 있거나 추가적인 서류 체크가 필요하거나 무작위 심사가 들어갈 경우 등등에 표시될 수 있다며 짐짓 자비롭게 위로한다. Don’t panic. 그랴......덕분에 덜 불안해졌다. 곧 인터뷰다. 드디어 영어를 입에 올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시 식은땀이 났다. 야 이렇게 새가슴이어서야. 저짝에 저 영어 한마디 못하는 인도 중국 할매들도 잘만 통과하던데 나라고 못할 게 뭐여. ​Next! 심호흡을 하고 심사관 앞에 섰다. 히스패닉으로 추정되는 울적하고 피곤한 표정의 중년남자.

질문이 시작됐다. 윽 씨발. 첫 질문부터 못 알아들었다. 송구스런 표정으로 익스큐즈 미?하고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하니 남자가 아주 그냥 지긋지긋하다는 듯 천천히 반복했다. ​하우, 아, 유. 세상에. 그렇게 부정적인 표정으로 내 안부를 물어봐주는 인간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허둥지둥 답했다. 파인, 땡큐. 앤유?를 붙일까말까 고민하다 입을 닫았다. 그것까지 붙이면 그야말로 한국식 영어공교육에 세뇌된 얼간이 인공지능처럼 보일 것 같았거니와 심사관의 안부 따위 진짜 털끝만큼도 궁금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무탈히 벗어나고픈 마음이 너무너무 커서 실성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따위에 관심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애써 물어봐줬으니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한가롭게 자문할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질문공세가 시작됐는데 한번에 이해한 게 반도 안 됐다. 발음과 억양과 스피드 전부 낯설었다. 미안한데 못 알아들었다는 말을 반복했고 심사관은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즈려밟듯 다시 물어봤다. 그제야 좀 들렸다. ​너 어디 사니. 어디서 지낼 거니. 미국에 얼마나 있을 거니. 아는 사람 있니. 그 사람 미국시민이니. 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니. 짐은 그게 다니. 달러는 몇푼 가져가니. 신용카드는 있니. 알아듣은 질문엔 제깍제깍 답했고 적절한 단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을 땐 나의 성실함과 무해함을 당신께 온전히 전해드리지 못해 속터져 죽겠다는 듯 찌푸린 미간에 손을 짚었다. 솔직한 답변에 심사관이 석연찮은 반응을 보일 때마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뒤쪽의 조사실로 끌려갈까 두려웠다. 이것저것 계속 묻고 했던 질문도 몇번씩 더 반복하던 심사관의 새로운 질문. ​너 직업이 뭐니. 순간 멈칫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Writer? Artist?(윽!!) 잠깐만 만화가가 뭐였더라......아. Cartoonist. Cartoonist. 심사관이 눈을 찌푸렸다. ​What? 카 투 니 스 트. ​Oh, you draw? 예아... 심사관은 잠시 흠, 하더니 내 여권과 기타서류를 시뻘건 주머니에 쓸어담고 주둥이에 자물쇠를 철컥 잠갔다. 헉?! ​이 주머니 가지고 A구역으로 가. 안녕. Next!

좆된 거 맞지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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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A구역 입구에 infection 어쩌구 씨앗 및 식품 등 반입금지 품목 저쩌구 써놨던데 나 무슨 감염위험군으로 분류된 건가. 혼란과 공포. 그런데 담당 직원들의 분위기는 어째 아까보다 화기애애하다. 그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빨간 주머니를 건네니 가져온 짐을 전부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으란다. 배낭을 올려놓자 직원의 눈썹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과장되게 휘었다. ​Only one backpack? 예아... 짐이 진짜 하나뿐임을 확인한 직원은 동료를 돌아보며 ​one backpack~하고 피식 웃었다. 아니 다들 대체 짐을 얼마나 싸짊어지고 다니길래 저래. 일만 아니었음 비닐봉지 하나로도 충분했어 이 양반아.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한 가방이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직원이 가방을 좀 뒤져보겠단다. 슈어 하고 한발짝 물러서있는데 직원이 가방 밑바닥에서 작은 비닐뭉치를 꺼내더니 천천히 자기 눈높이로 올려들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니......??

씨발 진짜 좆됐구나.

큰엄마가 준 단감 까먹고 남은 씨앗 몇 알과 500ml 물병에 뚜껑 대신 꽂아두면 서서히 찻물이 우러나오는 원뿔형 플라스틱 티백 쓰레기였다. 지퍼락에 넣고 돌돌 말아 배낭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직원은 봉지에서 끄집어낸 씨앗을 살펴보며 다시 물었다. ​이거 뭔데? 그것은 과일...과일 씨앗... ​무슨 과일? 감인데...아 감...가만있자 감이 영어로...? 와 씨발 이걸 어쩌냐 감......감이 영어로 뭐지??!? 나는 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먹지만 내 돈 내고 사먹을 생각은 들지 않는 과일이다. 따라서 영어명에도 전혀 관심없었다. 석류! 석류는 안다! 좋아하니까! 퍼머그래냇! 아 내가 진짜 석류도 아는 사람인데...제발 석류를 물어봐줘...!!! 내 맘도 몰라주는 야속한 직원. 감씨에 시선을 박은 채 다시 묻는다. ​너 이거 심을 거야?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노우! 네버! ​흐음. 이번엔 녹차 플라스틱 티백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관찰한다. ​이건 또 뭐니? 혹시 땅에 꽂으면 싹이 나는 거니? 노우!! 그거 코리안 녹차 티백이고, 사용한 거고, 그냥 쓰레기야!! 다 쓰레기야!!! 까먹고 있었어!!! ​​​흐음... 잠깐 생각하던 직원이 짐짓 자비롭게 말했다. ​그럼 다 버려도 되지? 이것들을 갖고 있는 건 좋지 않아. 오 물론이지...땡큐...! 감씨와 티백을 쓰레기통에 버린 직원은 빨간 주머니의 자물쇠를 열어 내 여권과 서류를 꺼내줬다. 와. 긴장이 탁 풀렸다. 살았구나. ​잘 가. 땡큐를 외치며 꾸벅 인사했다.


_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영구와 상봉하고 바로 우버를 호출했다. 2분도 안 되어 빨간 토요타가 왔다. 영구의 집으로 출발. 뭐라고 표현할까. 그냥 이게 다 뭔가 싶고 모든 게 현실감이 없었다. 퍼뜩 정신차리고 네이버 검색창을 켰다. ‘감을 영어로’ 아. persimmon. 퍼시먼이라고 하는구나. 되게 감같지 않네. persimmon. persimmon.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숱하게 보아왔던 주택, 상점, 도로, 간판과 광고판의 폰트, 나무와 수풀이 차창 밖에 흐르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persimmon. persimmon. 평생 까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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