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8x90

'그림 >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뢰밥(08)  (1) 2019.03.26
지뢰밥(07)  (0) 2019.03.25
고구마사랑  (0) 2019.03.20
지뢰밥(06)  (0) 2019.03.19
지뢰밥(05)  (0) 2019.03.17

728x90

'그림 >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뢰밥(07)  (0) 2019.03.25
삶은 슬픈 계란  (0) 2019.03.21
지뢰밥(06)  (0) 2019.03.19
지뢰밥(05)  (0) 2019.03.17
지뢰밥(04)  (0) 2019.03.14

​​

728x90

'그림 >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은 슬픈 계란  (0) 2019.03.21
고구마사랑  (0) 2019.03.20
지뢰밥(05)  (0) 2019.03.17
지뢰밥(04)  (0) 2019.03.14
지뢰밥(03)  (0) 2019.03.13

_영구는 엔지니어다. 모든 엔지니어의 집에는 데스크탑이 있다. 따라서 평소 사용하던 스캐너와 와콤 펜마우스를 가져가서 영구의 데스크탑에 연결하면 한국과 동일한 작업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영구와 상의 한마디 않고 대충 짜버린 이 허술한 삼단논법. 초장부터 처참히 박살났다. 첫째. 영구는 데스크탑이 없었다. 회사에서 제공한 노트북으로 일했다. 둘째. 펜마우스를 안 가져왔다. 이로써 내 그림작업 청사진은 몽땅 수포로 돌아갔다. 방바닥에 등신같이 누워있는 무용지물 구형 스캐너를 노려봤다. 저 집채만한 고물을 10시간 넘게 싸짊어지고 여기까지 온 게 완벽한 삽질이 된 것도 모자라 또다시 10시간을 넘게 싸짊어지고 돌아가야 한다. 말도 못하게 화가 났다. 씨발 미친 머저리가 바보천치멍청이같이...뒤져라뒤져라뒤져...! 분노로 터질듯한 내 면상을 보고 영구가 말했다. 괜찮으면...BESTBUY 가볼래?


_보다 재밌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최첨단에 보다 저렴한 하이마트. 그게 베스트바이BESTBUY의 첫인상이었다. 축구장의 두 배쯤 되는 면적에 온갖 기계들이 탐스럽게 들어차있었다. 헤드폰 낀 젊은 남자 그러니까 속칭 geek으로 분류될만한 자들의 단위면적당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으나 가족단위 방문객도 적지 않았다. 모두가 비치된 전자제품을 자유롭게 주무르며 놀고 있다. 영구도 벌써 눈깔이 생선떼 만난 상어처럼 돌변해서는 이 랩탑 저 랩탑을 광속으로 넘나들며 우와 해상도가! 터치가! 커서 반응속도가! 감탄하는 데 여념이 없다. 나도 미쳐가지고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북으로 지뢰찾기를 하려다가 뭐 도와줄 거 없냐는 직원의 말에 흠칫 놀라 도망쳤다.

기술혁신에 대단히 관심 많지만 정작 기기 구매는 쓰던 게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시중의 제품 중 최저가를, 꼭 필요한지 아닌지를 수천 번 자문한 뒤, 죽지못해 지갑을 여는 구두쇠의 습속에 단단히 묶여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근검절약이란 최고로 시대착오적인 소비행태가 아닌가. 이렇게 살다 현존 최고의 기술을 단 1초도 못 누리고 죽으면 실리콘밸리의 원혼 되지 않겠나. 집 떠난 지 열흘도 안 돼서 자꾸 이런 생각이 들고 지갑 든 손끝이 달아오르는 걸 보니 여긴 진짜 소비로 미쳐돌아가는 용광로가 맞긴 맞는 모양이다. 그 열기에 나는 지금 뇌가 녹은 거다. 저 아이맥에 저 가래떡같이 미끈하게 빠져나온 초소형 스캐너를 갖추면 쾌적한 책상에서 신나게 일할 수 있을 거란 생각. 하지 말쟈. 녹은 뇌가 만들어낸 착각. 허상. 다 허상이댜.

싱거운 싸움이었다. 돈생각을 하자마자 허상은 즉각 때려잡혔다. 데스크탑에 종이그림을 스캔해 올리고 일일이 잡티를 보정하는 원시적인 작업방식에 집착하는 주된 이유는 돈이다. 추가비용 없이 집에 있는 도구만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굳이 비싼 돈주고 그 환경을 재현하는 건 청렴하게 살겠다며 삼백만원짜리 짚신을 맞춰신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다. 적절한 비유인가? 암튼 갑자기 정수리에 벼락맞듯 새삼 내 정체성을 자각했고 ‘​나는 구두쇠다’ 현재 손에 쥐고 있는 도구로 추가비용 없이 작업함으로써 구두쇠라이프의 일관성을 지켜내는 것이 유일한 지상과제로 급부상했다. 나에게는 영칠이가 넘겨준 태블릿PC와 펜슬이 있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영구에게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했다. 혹시 돈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실컷 쓰고 나서 귀국할 때 환불하면 된다고 영구가 말했다. 이들의 환불정책은 지극히 관대해서 60일 내라면 별다른 사유도 묻지 않고 막 물러준단다. 혀를 내둘렀다. 사람을 어떻게든 일단 쓰고 보게 만들려고 작정한 동네다. 혹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허상의 마지막 일격을 막아냈다!​



_켄지스시라는 곳에 갔다. 차창문 깨고 귀중품 훔쳐가는 도둑들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주차장 곳곳에 붙어있다. 소지품을 전부 배낭에 쓸어담아멨다. 홀에 들어서자마자 인조 벚꽃 장식이 눈에 띄었다. 이자카야 인테리어의 전형미가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영구가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는다. 알고 보니 음식을 갖다주는 미국 식당은 손님이 아무 자리나 가서 앉으면 안 되고 입구 쪽에서 담당직원의 안내를 기다려야 한다. 1분쯤 멀뚱히 서있다가 안내를 받고 착석했다. 롤 두 종류를 주문했다. 생각해보니까 미국에서 처음으로 크게 유행한 초밥의 형태가 캘리포니아 롤 아니었나. 캘리포니아. 이걸 또 본의아니게 원조동네에서 먹게 됐네. 허허 재밌구려~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커플, 가족 단위의 비동양인이 많았다. 대부분 젓가락질이 능숙했고(난 아직도 부끄러운 X자다!) 이 공간에서의 식사를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게 느껴졌다. 와 일본외식문화 진짜 많이들 좋아하는구나. 근데 밥이 좀 늦네. 뭐라도 나와야 옆테이블 애의 뜨거운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을 텐데. 금발 벽안의 3세쯤 된 꼬마. 아까부터 나와 영구를 번갈아 빤히 쳐다본다. 애를 향해 힘껏 미소를 보내던 영구가 입꼬리에 웃음기를 그대로 매단 채 말했다. 설마 인종차별...그런 건 아니겠지. 사실 나도 그 의심부터 들었는데 뭐 저 나이 애들은 제 부모랑 자기 얼굴과 다르게 생긴 걸 보면 “신기”하지 않겠냐. 동양인을 신기해하는 그 감각 자체가 문제고 대수롭지 않게 봐넘길 건 아니라 보지만 안 넘기면 여기서 뭘 어쩔...이라고 말하는 와중에 밥이 나왔다. 맛있었다!


_식사 후 산타나 로Santana Row라는 곳에 갔다. 뭔지 모를 유럽풍 건축양식에 야자나무 폭포수 조경 노천카페 레스토랑 명품샵 특급호텔 등 아름답고 값비싼 것들이 밀집된 고급상점가였다. 패션피플의 단위면적당 인구밀도가 확 높아졌다. 꽤 큰 돈을 지불한 자만을 이 아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신호가 거리 전체에서 뿜어져나오는 듯했다. 그 신호에 압도당하는 것만으로도 내 분에 넘치도록 재밌었다. 어둡고 인적 드문 여느 주택가와 다르게, 이 밤거리는 아름답고 따뜻한 빛덩이가 사방에 떠다니고 무방비하게 깔깔 웃으며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서들 노느라 집 근처에 아무도 없었구먼. 어디든 그렇겠지만 미국은 돈이 도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온도차가 굉장히 극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하던 차, 한참 앞에서 걸어가던 남녀가 점점 느릿느릿 끈적끈적 흐느적흐느적 사랑의 2인3각을 벌이더니만 우리 코앞까지 거리가 좁혀졌다. 서로의 얼굴을 감싸쥐고 불같은 눈빛을 나누던 그들은 곧 키스를 했다. 잡아먹을 기세로 미친듯이. 영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보대회 출전한 듯 그들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한블록쯤 지난 후 우리는 서로 엄지를 치켜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굿. 미 대중문화에서 숱하게 봐온 풍경을 드디어 실제로 봤다는 생각에 주책없이 흥이 났다. 드라마란 역시 술과 돈을 먹고 피어나는 꽃.



_집에 돌아와 할일을 팽개친 채 냉장고의 맥주를 전부 퍼마셨다.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큰일이다. 라거 에일 필스너 포터 스타우트 다 맛있어 미쳐버리겠다.



728x90

' >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뢰찾기의 나라로(+09①)  (0) 2019.03.28
지뢰찾기의 나라로(+08)  (0) 2019.03.23
지뢰찾기의 나라로(+06)  (0) 2019.03.15
지뢰찾기의 나라로(+05)  (0) 2019.03.13
지뢰찾기의 나라로(+04)  (0) 2019.03.12

728x90

'그림 >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마사랑  (0) 2019.03.20
지뢰밥(06)  (0) 2019.03.19
지뢰밥(04)  (0) 2019.03.14
지뢰밥(03)  (0) 2019.03.13
지뢰밥(02)  (0) 2019.03.11

_고요한 새벽 세 시. 몇 시간째 뒤척이다 와불처럼 비스듬히 머리를 받치고 누워 멍하니 천장을 봤다. 잠도 안 오고 일도 안 되고 놀지도 못하겠네. 이놈의 시차적응 대체 언제쯤 되는 거지. 머릿속에 스모그 같은 게 잔뜩 낀 느낌 너무 더럽고 싫다. 해외출장에 대한 로망이 꽤 컸는데 노는 게 이 정도로 고되면 일하는 건 얼마나 좆같을지 상상도 안 된다. 하긴 조물주가 어떤 년인데 아무 대가없이 그냥 멋있기만 한 걸 헤프게 허용해줄 리가. 억지로 잠을 청해봐야 소용도 없을 테니 가계부 정리하고 내일 외출 동선이랑 냉장고 식재료로 만들 수 있는 식단이나 짜볼까 하고 있는데,

​​​아이휴~

어린애의 한숨소리. 펄쩍 뛰어 일어나 앉았다. 뭔 소리지? 웅크리고 앉아 고막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또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휴~ 목덜미가 쭈뼛 섰다. 씨발 뭐여 이게. 좀처럼 머리에 담을 일 없었던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귀신...? 여태껏 한 번도 귀신을 못 봤다. 귀신 이야기에도 정서적 영향을 받은 일이 거의 없다. 재미도 없고 무섭지도 않고 한마디로 나한테 귀신이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가치가 매우 낮은 소재다. 까무러치게 무서운 건 예외없이 피와 욕구가 흐르는 인간의 이야기, 인간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기십년간 기별없던 귀신을 미국에서 만나? 이야 낮엔 없는 게 없는 식재료 마트로 사람 혼을 쏙 빼놓고 밤중엔 뭔 귀신 찌꺼기같은 걸 보내서 생전 처음 맛보는 공포를 선사하다니 대단하구나 미국.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있는데 또다시 들려온 아이휴~

처음과 똑같은 음량과 어조. 유아에 가까운 어린아이의 애교섞인 음색. 기성품. 공장제 목소리. 아 이거는 방에 있는 뭔가가 고장났을 확률이 크겠다. 여기가 원래 영구의 아이가 쓰던 방이니 아마도 인형, 음성장치가 망가진 채로 어디 구석에 처박힌 인형 같은 데서 나는 소리겠지. 잠시나마 귀신 운운하며 겁에 질렸던 게 쪽팔렸다. 근데 진짜 귀신이 맞는대도 뭐. 단순노동이 빠르게 기계로 대체되는 시대라지만 녹음된 멘트를 틀어놓고 영업하는 안일한 정신상태의 귀신이 무섭겠냐. 소리의 원인에 대한 확신이 빠르게 안도감을 불러왔고...


_눈을 뜨니 오전 여섯 시. 자는 줄도 모르고 잤네. 어제 내가 굉장히 중요한 생각을 하다 말았는데. 아 맞다 냉장고 식재료. 냉장고에 계란이랑 베이컨이랑 아스파라거스가 있었지. 아침 만들 생각에 신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타국에서의 요리는 어쩐지 더 재밌다. 흔한 재료를 다룰 때조차. 베이컨을 굽고 같은 팬에 아스파라거스와 계란을 지지고 냉동실에 있던 빵을 꺼내 토스트기에 넣었다. 기름진 베이컨향이 온집안에 가득하고 연기가 막 모락모락. 엉...? 뭘 했다고 연기가 모락모락씩이나. 어이구야. 가만 보니 토스트기가 정상이 아니다 싶을 만큼의 회색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식겁해서 빵을 꺼내보니 빵은 또 하얘. 그럼 이 연기의 원인은 대체...

때르르르르릉 ​파이어. 파이어. 때르르르르릉 ​파이어. 파이어.

지축을 뒤흔들 기세로 울려대는 화재경보음에 완전히 혼비백산했다. 공항 입국심사 때 여권이 자물쇠로 잠겼을 때보다 세 배는 더한 당혹감. ​​파이어. 파이어. 감정을 전혀 담지 않은 여자의 ​불이야 경고음성이 하도 묵직하고 파워풀해서 한번 들을 때마다 둔기로 심장을 후려맞는 기분이다. 미치겠네. 몰려든 동네주민과 타운하우스 관리인과 소방수들 앞에서 더듬더듬 해명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피가 말랐다. 몇초간 어영부영하다 전기렌지에 붙은 환기팬을 틀고(팬 돌아가는 소리도 엄청나다) 창문을 열고 영구를 깨워말어 일단 한글로 해명문을 쓰고 구글번역기를 돌려말어 하고 있는데...경보음이 멈췄다. 아! 조물주어머니 감사합니다!!

영구의 방문이 열렸다. 아침부터 괜히 시키지도 않은 베이컨이니 빵같은 걸 굽는다고 설치다가 화재경보 작동시켜 미안하다는 내게 영구가 말했다. 엉? 아~아까 무슨 소리난 게 그거였구나 괜찮아 우리도 전에 삼겹살 구워먹다 몇 번 소리 났어 괜찮아괜찮아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러더니 내가 차려놓은 걸 보고는 으와~~~진짜 맛있겠다!! 고생하셨네!! 너무 고마워!! 하더니 순식간에 그걸 다 때려먹고 출근했다. 진정 리트리버같은 놈이다.


_타운하우스의 주요 공용시설로는 스파가 딸린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미국의 웬만한 공동주택의 기본옵션이라 한다. 엄마는 너 거기서 수영 실컷 하고 오라는 카톡을 틈만 나면 보내는데 아니 한떨기 수줍은 동양인인 나한테 왜 자꾸... 닭장같은 헬스장에서 묵묵히 앞만 보고 달리는 게 훨씬 더 취향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찾아간 헬스장. 슬쩍 문을 열고 발을 디밀었는데, 어우 분위기가. 다들 엄청 살벌하게 운동하다 흘끗 나를 쳐다보곤 이내 자기의 움직임에 몰두한다. 여긴 뭐 하이 헬로우 이런 거 전혀 없네. 안도하면서도 약간 허전해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런닝머신 싸이클론 같은 인기기계들은 이미 만석이라 제일 소외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런데 다리 굴리기가 쉽지 않다. 자전거 안장의 위치가 미대륙의 건장한 인간들의 신체조건에 맞춰진 탓에 곧게 편 두 팔로 자전거손잡이를 잡고 최대한 뒤로 뺀 둔부를 안장에 걸치고 다리를 앞으로 힘껏 뻗어야 겨우 페달에 발이 닿는다. 이러면 몸통이 새우처럼 접힌다. 잠시 작동을 멈추고 안장을 옮겨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도로 안장에 앉아 새우자세로 자전거를 탔다. 너무 불편했다. 10분쯤 지나니 런닝머신 이탈자가 생겨 그쪽에 얼른 올라탔다. 여기 사람들도 런닝할 때 옆사람과 신경전을 벌이며 속력을 높이는 짓을 할까 궁금해하며 20여분을 달렸다. 운동을 마친 사람들이 자기 몸이 닿았던 기계를 휴지로 닦고 가기에 나도 따라했다.


_영구가 퇴근했다. H마트에 갔다. 한인마트다. 전직대통령 누구의 비자금이 이쪽으로 유입됐다는 말이 돌았다 한다(마트측은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거 참. 말 듣고 보니 간판의 H가 괜히 도드라져 보이잖아. 입구에서부터 시선을 잡은 건 또 불닭볶음면. 중국마트 한인마트 모두 불닭볶음면을 상석에 진열해놓은 게 재밌다. 오히려 본토보다 취급이 좋은 듯. 또다시 마트귀신에 씌어 이 코너 저 코너를 한없이 서성이다 전부터 궁금했던 미국 고구마 두 덩이를 골랐다. 한인마트에서 미국 고구마라니. 멍청한 소비였다.

코스트코에 갔다. 사람이 꽤 많았지만 뒷사람의 카트에 발뒤꿈치를 찍히기 일쑤인 지옥같은 코스트코 양재점에 비하면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무염 견과류믹스를 영구는 아이패드를 골랐다. 70달러 정도 할인된 가격. 코스트코에서 종종 애플 이월상품을 싸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계산을 하는데 점원이 당황하는 눈치다. 알고 보니 우리 물건이 우리 바로 전에 계산하고 간 사람의 카드로 결제되는 실수가 있었다. 상급자가 왔고 말 몇 마디가 오가고 문제 해결. 각종 장애 지체 돌발상황에서 ‘화’나 ‘짜증’ ‘역정’ 등의 독한 감정을 터뜨리는 인간을 아직 목격하지 못했다. 낮은 인구밀도만이 쾌적함의 원인은 아니었을 거다.

간판을 보자마자 절로 육성이 터졌다. 뭐?! 파리바게트!?! 너무나 친숙한 푸른빛 에펠탑 실루엣. 한국과 얼마나 다른가 궁금했다. 크로와상류가 약간 더 크고 과일장식도 약간 더 먹음직...탐스러운 듯도...? 잘 모르겠다. 곡물식빵 한봉지를 샀다. 한국보다 가격이 더 비싼 건 잘 알겠다. 영구가 저기도 유명하다며 가보잔다. 85도씨 베이커리. 소금커피가 유명한 대만계 체인이라 한다. 한국을 짧게 휩쓸고 간 대만 카스테라에 대한 모종의 연민과 그리움이 발동했다. 빵 세 덩이를 샀다.

728x90

' >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뢰찾기의 나라로(+08)  (0) 2019.03.23
지뢰찾기의 나라로(+07)  (0) 2019.03.18
지뢰찾기의 나라로(+05)  (0) 2019.03.13
지뢰찾기의 나라로(+04)  (0) 2019.03.12
지뢰찾기의 나라로(+03)  (0) 2019.03.10



728x90

'그림 >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뢰밥(06)  (0) 2019.03.19
지뢰밥(05)  (0) 2019.03.17
지뢰밥(03)  (0) 2019.03.13
지뢰밥(02)  (0) 2019.03.11
지뢰밥(01)  (0) 2019.03.09

_자동차 파는 곳이 정말 많다.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어지간한 동네는 덮고도 남을 면적에 반짝반짝한 차들이 쫙 깔렸다. 미국생활에서 차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풍경이겠다. 신발가게 같은 거지. 면허는 있지만 차가 없고 도로주행 한번을 안 해본 나는 맨발로 미국에 뛰어든 셈이다. 영구가 신발신고 일일이 들어다 놔줘야 한다. 미안해 죽겠다. 참고로 영구의 신발메이커는 혼다. 처음에는 H마크가 붙었길래 현대찬줄 알았는데 특유의 각도로 슬쩍 기울어져야 할 H가 미국선 왜 저리 펑퍼짐하게 서있나 의아해하던 차였다. 그게 혼다 마크였다. 다들 안 헷갈리나?


_내 암만 집귀신이어도 맘대로 아무렇게나 쏘다닐 기회 자체가 원천봉쇄된 건 별로 달갑지 않았다. 퇴근한 영구한테 자꾸 아쉬운 소리하기도 싫었다. 내가 백번천번 나가쟤도 영구는 천번만번 좋다고 자기도 재밌다고 하나도 안 힘들다고 할 위인이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일방적으로 부탁만 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게 유쾌해질 리 없잖아. 도보와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얼추 해결되는 관광지였다면 괜찮았을 텐데 음......그런데, 누가 나더러 나가지 말랬나? 비록 자동차위주에 총기소지가 허용된 낯선 땅이지만 인도와 신호체계를 갖춘 문명국이거늘 아무렴 벌건 대낮에 아예 나다니질 못할까. 겁 좀 작작 먹자. 심지어 구글맵을 보니 상점가가 집에서 3Km밖에 안 된다. 뭬? 3키로!? 경로도 엄청 단순해! 당장 배낭을 멨다.


_열 발짝도 못 가서 도로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마주오는 사람을 겨우 피할 수 있을 너비의 인도가 차 쌩쌩 달리는 도로 옆에 소면가닥처럼 붙어있었다. 왼쪽은 담벼락. 제발로 걷는 생물은 사방천지 나 하나였다. 총알같은 저 차들 중 하나가 인도를 덮치거나 차창을 열고 따발총을 갈기거나 칼든 놈이 다가와서 나를 해치려든대도  속수무책으로 뒤지게 생겼구나.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1/3 지점까지 개미새끼 한마리를 못 봤다. 누가 먹다버린 액티비아 플레인 요거트 껍데기가 그 길에서 발견한 유일한 인간의 흔적이었다. 그래 이왕 아무도 없을 거면 끝까지 없어라. 그때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뭘 잔뜩 싸짊어진 대추같은 동양계 할머니였다. 곁눈으로 날 재빨리 스캔한 할머니는 조금 안도한 뒤 무표정하게 갈길을 갔다. 내 행동도 거울처럼 똑같았겠지. 이곳에서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계층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_자동차천국이라지만 보행자에 대한 배려는 희한하게 한국보다 나았다. 신호등 없는 건널목이라도 보행자가 길 건널 의사를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차들이 제깍 멈춰선다. 차량의 흐름이 신호로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건너는 습관이 밴 나에겐 다소 황송한 매너였다. 운전자에게 엉거주춤 목례하고 건너편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되게 한국적 제스처네 자조하면서. 신호등이 설치된 건널목이 나왔다. 한참을 기다려도 보행신호가 안 나 주변을 둘러보니 신호등 기둥에 웬 버튼이 하나 달려있다. 이걸 눌러야 적당한 때 ‘가시오’ 신호가 떨어지는 방식이구나. 근데 미국 신호등의 가시오 인간은 자세가 좀 굽었다.


리듬을 타는 듯도...?




_처음보다는 공포가 꽤 사그라들었긴 했어도 산책을 즐길 여유를 누리긴 어려웠다. 그럴 환경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차들 매너좋고 거리도 뭐 그렇게 미친듯이 황량하고 험악하지는 않았지만 애시당초 맨몸뚱이의 도보인간을 위해 설계된 공간은 아니므로, 그로 인한 근본적인 소외감이 있다. 사람들 막 개 끌고 다니고 풀밭에 드러눕고 조깅하는 그런 곳은 대체 어딘지 그런 평화의 땅이야말로 차없으면 못 가는 곳인지 궁금해하며 길을 건너다가, 헉, 하고 놀랐다. 선명한 초록빛 잔디와 이끼의 카펫 위에 두 줄로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길. 나무 사이 탐스럽게 피어있는 형형색색의 꽃. 예고없이 펼쳐진 판타지적 장관에 어리둥절해서 이거 사람 가는 길 맞아? 하며 주춤거리고 있는데 귀에 에어팟 꽂은 조깅자가 옆을 획 지나친다. 굵은 나무뿌리를 사뿐사뿐 건너뛰며 사라지는 조깅자의 뒷모습. 와 내가 바라던 산책로를 여기서 만나는구나. 황홀경에 취해 걷다 곧 알게 되었다. 이곳이 애플 본사로 들어가는 길이었음을. 하여간 진짜 뭐든 예쁘게 연출하는 건 끝내주게 잘하는 집단이다. 길이 곧 끝나버려 아쉬웠지만.




_목적지인 중국 식료품 마트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눈을 사로잡은 불닭볶음면. “근데 여긴 껍질 깐 거밖에 없는데?” 등뒤에서 들려오는 한국말. 으 반가운 거 티내지 말자 민망하다. 한바퀴 둘러봤다. 베트남시금치 중국샐러리 용안 그외 생소한 과일채소와 소간 돼지간 닭간 소혀 돼지혀 각종내장 알 수 없는 민물생선 등등 정말 사고 싶은 것들이 너무, 너무, 너무 많았다. 간과 혀를 종류별로 사고 싶었지만 요리할 자신이 없어서 다 조리된 돼지간 통조림 하나를 골랐다. 너무 몸 사리고 있나. 한국서 구하기 힘든 파격적인 무언가 하나쯤은 사야 할 텐데. 고민하며 냉동육 코너를 살피다가 악어고기를 발견하고 멈칫. 이거다. 주저없이 바구니에 넣었다. 계산대로 갔다. 눈 한번 안 마주치고 필요한 몇 마디 단어만으로 계산을 끝낸 중년의 중국인 점원. 허허 이런...너무 좋잖아. 혈연 및 보증된 우호관계가 아닌 자에게 딱히 살갑게 굴지 않는 그 익숙한 배타성에 어쩔 수 없는 편안함을 느껴버렸다.


728x90

' >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뢰찾기의 나라로(+07)  (0) 2019.03.18
지뢰찾기의 나라로(+06)  (0) 2019.03.15
지뢰찾기의 나라로(+04)  (0) 2019.03.12
지뢰찾기의 나라로(+03)  (0) 2019.03.10
지뢰찾기의 나라로(+02)  (0) 2019.03.0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