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며 TV를 봤다. 이리저리 돌아가던 채널이 한 영화채널에 잠시 머물렀다. 여러모로 망조가 깃든 2021년산 한국영화였다. 배우 대사 소재 연출 모든 것이 구렸다. 술에 취한 콘텐츠 고관여층에게 망한 남의 영화만큼 좋은 먹잇감이 또 있을까. 영화와 배우와 감독을 피라냐떼처럼 찢어발기는 판이 벌어졌다. 나도 엉거주춤 동참했다. 꺼림칙한 기분을 애써 외면하면서. 창작자로서 다른 창작자를 까는 것은 리스크가 큰 악취미다. 그럼 너는 씨발 얼마나 잘났는데? 하는 뼈아픈 반격을 쓸데없이 유도하는 짓이다. 한편으론 비겁하고 무의미한 경계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당사자는 여기서 한 말 듣지도 못할 텐데 깔 거 있음 시원하게 까고 말지 뭐하러 몸을 사리는 건가. 몸 사린다고 내게 날아올 비평의 칼날이 나를 피해가디? 조신하게 칼 맞으면 좀 덜 아프디? 서로 열심히 만들고 까고 그러는 게 건강한 사회 아닌가? 뭐 그런 생각들로 한참 마음이 어수선했다.

채널은 두어 번 더 돌아가 또 다른 영화채널에 닿았다. [굿 윌 헌팅]이었다. 하도 회자되어 골백번은 본 듯하나 실은 한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내가 안(못)보고 지나친 무수한 명작 중 하나. 일행들은 일제히 크~~~하고 감탄했다. 그럴 만했다. 앞부분 다 잘라먹고 중반부만 잠깐 봤는데도 확 몰입되더라. 배우 대사 소재 연출 모든 것이 훌륭했고 화면 때깔마저 적당히 빛바랜 청바지처럼 고풍스럽게 멋졌다. 웰메이드의 정석같은 영화였다. 감동도 차고 넘쳤다. 너무 넘쳐서 이상했다.

구체적으로 뭐가 이상했냐면 윌의 성공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주변인들이 이상했다. 모두가 윌을 감동시키기 위한 필살의 명대사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너무 이상했고 단체로 미친 것 같았다. 늙은 선생이야 똘똘한 애한테 광명 찾아주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쳐도 같이 고생하던 친구는 진짜로 그러기 힘들지 않나. 그래서 남의 인생에 누가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나서냐며 특히 남 잘되는 꼴에 배아파 뒤진 귀신들이 우글대는 반도에선 친구 인생에 초를 치면 쳤지 저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코웃음을 쳤는데, 내 말에 놀란 A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예? 그건 아니죠. 우리도 잘되고 들개님도 잘되고 다 같이 잘되는 게 좋죠.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영화는 곧 끝났고 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틈만 나면 A의 말을 곱씹는다.

틀린 게 없는 말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그 때 함께 영화를 보았던 A와 B가 정말 행복하길 바란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며 건강과 행복이 가득한 삶을 살길 진심으로 바랄 뿐만 아니라 만약 내가 A와 B가 크게 도약할만한 기회를 발견한다면 지체없이 그들에게 그것을 알리고 권할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난 C에게도 D, E, F에게도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그들이 나와 다른 분야의 사람이기 때문에 맘껏 너그러울 수 있는 걸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G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글을 잘쓴다. 춤도 노래도 그림도 유머도, 내가 동경하는 모든 분야에서 나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인간이다. 나는 G가 아직 그 재능에 합당한 평가와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그 재능을 가지고도 내 눈앞에서 주저앉아버린다면 나는 그것을 내심 기뻐할까? 모르긴 몰라도 윌의 친구와 똑같은 대사를 하며 그를 더 높이 날아오르게 하기 위해 애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굿 윌 헌팅] 속 인물들의 행동은 극적으로 미화된 선행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상식적인 행동이라 보는 쪽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느 누구의 성공도 나의 성공만큼 기쁠 수는 없는 일이고 나만 빼고 다들 잘나가는 상황에서 절대로 사람 좋게 허허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며 잘되는 게 아니꼽고 진심으로 망했으면 좋겠다 싶은 인간들이 널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내면에서 수없이 솟았다 꺼지는 여러 감정 중에 시기질투열등감에게만 너무 생각없이 스피커를 갖다주고 ‘본능’ 혹은 ‘인지상정’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아닌지, 그것들을 너무 보란듯이 증폭시키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말로만 듣던 좋은 영화를 재밌게 감상했다. 격분한 윌의 얼굴을 감싸쥔 선생이 It’s not your fault를 수없이 반복하여 진정시키는 장면의 에너지는 정말 멋졌다. 와인도 아주 맛있었다. 나무늘보 모텔 또한 훌륭한 곳이었다. 1박에 4만원인데 가격 대비 방이 크고 LG스타일러와 욕조가 있었다. 무엇보다 모텔의 이름이 나무늘보라니.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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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보고 첫눈에 홀딱 반한 인왕산 숲속쉼터를 구경하러 갔다가 기생충에 나올법한 초호화대저택단지에 잘못 들어가서 한참을 헤매고 갑자기 청와대가 나타나서 식겁하고 엉뚱한 등산로를 타서 끝없는 산행지옥에 빠지는 등본의 아니게 대장정을 해버려서 정작 쉼터에 도착했을 땐 너무 배가 고파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10분만에 뛰쳐나왔다. 맨날 가는 동네 도서관에 딴생각하면서 가다가 차에 치일 뻔하고 갑자기 나타난 재래시장에 흥분해서 한바탕 구경하고 나오고 하여간 엉망진창으로 경로를 재탐색하다가(잘 가다가 옆 골목의 순대국집 간판이 멋지다는 이유로 방향을 막 꺾어버림) 정신 차려보니 웬 누룽지공장 앞. 저번엔 양말공장 앞이었지. 아침부터 헤매느라 진이 다 빠져서 하나도 집중을 못하고 엎어져 잤다. 방향감각 어떡하냐.

- 에세이 잘쓰는 자들을 한없이 부러워하다가 이제는 마케팅 잘하는 자를 신으로 섬기는 단계로 넘어갔다. 마케팅은 정말 대단한 예술이다. 책사의 노회함과 장수의 용맹함을 겸비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쭈구리 음유시인은 과연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나저나 관계자나 지인에게 책을 주며 느낀 건데 재혼 삼혼 청첩장 뿌리고 셋째놈 돌잔치 초대하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더만. 책이라는 게 워낙 취향을 타는 물건이라 자칫 잘못하면 공간만 잡아먹는 애물단지가 되기 십상인데 주는 사람이 그 책의 저자라면 더더욱 피차간에 쓸데없이 부담스러워지고 여기에 책에 싸인을 해주느냐 마느냐의 문제까지 추가되면 그야말로 치열한 심리전쟁이 펼쳐지게 되어(싸인 관련 얘기는 나중에 별도로)...그게 참 이렇게 냅다 떠안겨도 될 일인가 싶고 여하간에 입체적으로 민망하고 송구스런 것이다. 과연 나는 이런 쭈굴탱탱 심약한 마음의 모가지를 단칼에 쳐버리고 용맹한 장수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 트위터 진짜 무서운 새끼네. 가뜩이나 집중력 바닥나서 퍼석퍼석해진 뇌를 아주 짤짤 비틀어가지고 찔끔 남은 것까지 다 짜버렸어. 사람들 일거수일투족에 기분이 널뛰고 모임만 나갔다 하면 100% 했던 말을 후회하는 내 성격에 너무나도 소셜적으로 네트워크된 이 서비스는 감당이 안 되는 자극의 지옥. 하지만 창작물 홍보=SNS라는 시대의 조류에 이제라도 몸을 맡겨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하게 된 것인데, 아아 어렵구나! 홍보 목적이 빤히 보이면 너무 좀 그러니까 결국 내 일상생활이나 속마음 중에서 그나마 좀 팔릴만한 진정성을 조금씩 잘라 전시해놓게 되고...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몸통 반쪽이 불지옥에 들어간 거라! 독백은 독백이되 불특정다수의 긍정적 반응을 갈구하는 마음이 구렁이처럼 도사린 독백을 날리면서, 나의 지적능력 유머감각 등등을 자유경쟁노점상에 펼쳐놓고 처절한 호객행위를 하는 거라! 호평을 보면 너무 고맙고 기뻐서 뇌에 불붙은 느낌인데 곧 타는 듯한 갈증이 몰려오고(! ! 더 많은 호평을!), 반응이 없으면 없어서 울적해 죽는 거라! 여기에 이제 악플이 추가되면...
...까지는 좀 오바고(뭐 그렇게 처절할 정도로 열심히 호객하지도 못했음) 그냥 일단 머리를 비우고 적응하려 한다. 아 시간제한의 필요성은 진지하게 느끼고 있다. 작업 효율이 확실히 떨어진다.

- 산해진미를 즐겨버릇하면 재앙이 닥친다는 신념이 있다. 자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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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피하려고 했던 SNS를 결국 하게 됐다
그랴 이 시대에 어딜 도망가겠누

twitter.com/pyedogteeth
instagram.com/pyedogteeth

저 두 구녕에 벌써 기력을 빨려버려서
블로그에 뭘 써올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최후에 살아남을 곳은 결국 여기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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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새벽같이 도서관에 나왔으나 간발의 차로 VIP석을 빼앗김. 원통하다!

-어려운 미팅을 앞두고 왕뾰루지가 나는 징크스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터졌는데, 마스크가 그것을 완벽하게 가려주어 전염병 시국의 몇 안 되는 효용을 다시금 체감하였다. 다만 긴장하면 아무말을 지껄이며 오바싸는 기질까진 차마 가려주질 못하여…결국 나는 또 자폭. 멸망. 그러나 삶은 팥과 더덕을 먹고 다음날 개같이 부활했다. 더 이상 무의미한 반성따윈 하지 않는다…오바의 횟수를 최대한 늘려서 수치심을 마비시키는 수밖에는…!

-재채기를 좀 조용히 할 수는 없을까? 소싯적의 재채기는 이를테면 공기 90 소리 10의, 공공장소에서 존재감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는 바람 새는 소리에 불과하였으나 늙을수록 소리의 비중이 점점 커져서 지금은 재채기 소리를 한글로 명확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으에헤이!!! 이래서는 곤란하다. 또렷하게 받아쓰기가 편하면 편할수록 죄질이 나쁜 재채기이기에(나만의 양형기준). 최소한 저 으에헤이 중에서 으에만 빼도 덜 주책맞겠건만 영 고쳐지질 않는다. 재채기 볼륨조절 능력이 생기면 좋겠다.

-2010~2020년 사이에 발매된 K팝에 뇌를 저당잡힌 듯.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 파도타기하며 아아 명곡…이것은 참으로 명곡이다…!를 몇번 반복하니 세시간이 우습게 순삭됐다. 2NE1 [I love you]로 대미를 장식하고 흐느끼며 잠들었다. 들을 때마다 느끼지만 외롭고 슬픈 밤의 몸부림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불후의 명곡이다 진짜.

-책을 받아봤다. 골백번은 더 검토하고 뜯어고친 글이라 쳐다도 보기 싫을 줄 알았는데 실물을 받고 의외로 크게 감동했다. 서서 한참을 집중해서 읽었다. 심지어 재밌다고 느껴버렸어. 지가 쓴 책을 재밌어하다니 좆같은 팔불출 납셨네 싶었지만 원래 시간과 정신력을 쏟아부은 일에는 꼴사납게 집착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것을 이번에 제대로 실감했다. 여럿이서 그렇게나 마르고 닳도록 검토하고 수정했는데도 고치고 싶은 부분이 군데군데 보인다는 게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최종, 최종_2차, 최종_3차, 진짜_최종, 진짜진짜_최종, 진짜진짜최종중의_최종, 진짜진짜맹세코최종_완전끝디엔드 이지경까지 가서 편집자를 혼절하게 만든 누군가의 심정을 이제 이해한다. 이렇듯 여러 가질 깨닫고 느끼게 됐지만 앞날이 어찌될지는 전혀 모르겠다. 진인사대천명-진인사대천명-만 염불처럼 외다가 아니 솔직히 내가 하늘을 움직일만큼 뭐 대단한 저거를 했냐 하면 그건 아니지 않나, 고생한 걸로 따지면 진인사대천명을 간절히 외는 인간들 중 하위 20%급에나 간신히 속하지 않을까 싶어 시무룩해지는 것이다. 아이고 나는 모르겠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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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는 설날 중에 가장 늦은 이슬람력 설날마저 코앞에 닥쳤으므로, 미루고 미뤄뒀던 2021년 결산을 해봅니다.

인간관계
평생 같은 자리에 있어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크게 다치고 병들고 세상을 떠난 해였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이 다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거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확실히 작년을 기점으로 저는 제 자아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렸고 그로 인한 공허함이 노화와 맞물려 예전과는 다른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괴로운 일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밖에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행연습도 안 되고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미리 연습으로 단련해서 이겨냅니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거대한 불행의 파도이니 그냥 덮쳐오면 잠자코 처맞아준 뒤에 어느 정도 정신이 수습되면 세 끼 밥 잘 챙겨먹고 잠 잘 자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비관적인 생각에 골몰해있을 시간에 떠난 이들과 나눴던 행복한 시간들을 기억하고, 곁에 있는 고마운 사람들과 1초라도 더 보내며 적당히 즐거워하다 죽으면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어요.

음식
연초의 충격적인 사건과 경제적인 이유로 식습관을 엄격히 통제했었습니다. 주로 채소를 먹었고, 탄수화물은 잡곡과 고구마, 단백질은 콩과 계란과 직접 만든 무지방 요거트와 고기 중 최저가인 돼지고기 뒷다리살, 지방은 견과류와 이웃에게 얻어온 들기름으로 채웠습니다. 술은 완전히 끊고 자주 걸었습니다. 요컨대 어르신들 즐겨보는 건강 프로그램의 모범답안 같은 생활을 한 것이죠. 몸에 나쁜 건 한 숟갈도 삼키지 않겠다는 대쪽같은 결의로 똘똘 뭉쳐서는. 이게 딱 1년 가더군요. 지금의 전 완전히 망가져서는 내키는대로 술을 퍼마시고, 거대하고 육중한 맘모스빵을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치우고, 쓰레기장 같은 집에서 며칠동안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뒹구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다 큰 탈이 나면 식겁해서 또 식습관을 개선할 것이고 그러다 1년쯤 지나서 또 무너지겠죠. 샤워실의 바보처럼 살다 갈 팔자이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1년이라도 유해음식 안식년을 가지는 게 어딘가 싶고 그러네요.

문화
연초에는 뭔가를 챙겨볼 정신이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 짬을 내어 픽사의 [소울]을 보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원래 디즈니 픽사 계열 애니메이션은 봤다 하면 무조건 눈물바다였는데(어떨 땐 디즈니 마법의 성 로고가 나올 때부터 오열합니다) [소울]은 보는 내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황홀하고 행복해서 울고 싶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영화 자체의 훌륭함도 훌륭함이었지만 괴롭고 힘든 인생에 예술작품이 진짜로 위안이 되어줄 수 있다는 걸 생전 처음 겪어보고 감격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반기에는 그래도 꽤 이것저것 챙겨봤는데, 어쩐지 다 가물가물하고 그냥 재테크 책을 미친듯이 읽은 기억밖에 안 나네요. 과연 돈냄새란 독한 살충제 같은 것. 작고 섬세한 것들을 싸그리 박멸하는 데 아주 직빵이구만요. 이렇게 된 이상 재테크 관련 콘텐츠나 한번 구상해볼까 합니다. 이번에는 부디 생각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제 뭘 먹고 사나. 농사를 지으면서 짤짤이 투자라도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으나 유튜브만 틀었다 하면 !!절대로 농사짓지 말라!!폭락장에 으깨진 개미들!! 이런 식의 피맺힌 절규투성이라 완전 쫄아서는 역시 하던 도둑질만한 게 없다는 생각에 다시 맘 잡고 만화를 그리고자 했지만 뭘 그려도 저품질…절망에 빠져가던 차에 음식 에세이를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만화 그리기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고생을 하느라 아주 죽을 맛이었지만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 형편없이 서툴고 후졌던 어떤 점들이 조금씩 개선되는 느낌이 이런저런 부정적인 감정에 질식해가던 저에게 어느 정도 심폐소생을 해줬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마지못해 할 거면 아예 하지를 말고 일단 하기로 했으면 최선을 다해 홍보한다 - 를 본의 아니게 남은 인생의 모토로 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최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환골탈태할 수도 지금껏 살던 고대로 살 수도 있다는 게 함정이긴 한데…변화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현실이 피부에 와닿으니 아무리 게으른 저라도 마냥 누워있기가 좀 뭣해서 뭐라도 하기는 할 것 같습니다. 맨날천날 똑같은 걱정들을 되새김질하며 손놓고 살아왔고 덕분에 큼지막하게 골치 아픈 일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확정된 미래를 맞이할 것이 너무나 뻔하더란 말이죠. 느리지만 확실한 도태. 침몰. 지금까지는 뭐 나 하나쯤 도태되면 어떠리~~하며 팔자좋게 뒹굴거렸는데 그게 겉으로는 편해보여도 속이 시커멓게 썩는 일이었고 드디어 2021년을 기점으로 방구석에 드러누워 예정된 실패를 기다리며 산 채로 썩어가는 괴로움이 맡은 일에 매진하는 피곤함과 귀찮음을 넘어섰습니다. 어쩔 수가 읎다 인제는 하루종일 빈둥거리면 속상한 걸 넘어서 몸에 막 통증이 와.

결론적으로 2021년은 저에게 앞으로 다가올 생로병사로 인한 고통의 맛배기 튜토리얼 버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날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생겼는데 그 두려움의 크기만큼 강력한 체념과 달관의 정서도 생겨서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된 상태로 어영부영 늙어가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만 되어도 복 받은 인생입니다. 다사다난한 한해가 지난지 석달짼데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비극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어 쓰라린 한숨만 나오는 요즘입니다.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최후의 설날을 맞이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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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이 술처먹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서대문구인가 오 여기까지 오타가 0ㅓㅂㅅ군

 

+이런 미친
허벅지는 또 왜 이렇게 아픈가 했더니
취해가지고 스쿼트 300개하고 눈에 보이는 계단이란 계단은 다 올라갔던 게 어렴풋이 기억남
그래 근육이 남는 거지(근데 알코올=근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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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소식한번봤다전쟁소식한번봤다대선봤다전쟁봤다대선전쟁대선전쟁 이지랄하다 멘탈에 골다공증와서 누워있음
그리고 두 시간 전 양국이 특정 지역에서 임시 휴전 합의했다는 소식에 겨우 정신이 들어 임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곧이어 이번 산불이 일종의 증오범죄라는 소식을 듣고 눈에 흰자만 남음
그러다 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이길 수 있다”는 미 국무장관의 발언에 벌떡 일어나서 엉? 진짜? 아님 뭔가 다른 꿍꿍이가? 뭔데? 나만 안 보여? 이러고 있고…
영악한 강철멘탈들도 목숨을 부지할까말까한 난세에 나 혼자만 말미잘

-사전 투표를 했다. 우리 동네 말고 딴 동네에서.
투표소 줄이 너무 길어서 차라리 본 투표날이 더 한산하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데 딴 동네에서 온 사람은 대기없이 바로 투표할 수 있다는 안내요원님(바쁜 와중에 정말 친절하셨음)의 말에 후딱 하고 왔다.
몇년에 한번 투표로 지도자를 갈아치우는 시스템이 그나마 고맙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어찌됐건 선량하고 품위있게 살려는 노력을 놔버리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이 추악함에 잠식돼버린 반면교사 양반을 보고 한바탕 개식겁을 한 후 얻은 교훈이다.
늙으면 좀 추해져도 된다고 생각한 내가 안일했다 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좆될 수 있음.
증오 혐오 탐욕 시기질투 열등감 좌절감을 장기간 방치하지 말자.
분명 또 방치하고 싶어지겠지만 그럴 땐 그 반면스승의 눈빛을 떠올리자.

-반면교사라는 말을 마오쩌둥이 처음 썼다네. 처음 알았다.
갈등이라는 단어가 칡 갈+등나무 등이라는 두 덩굴식물의 조합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어.
근데 칡꽃의 꽃말이 ‘사랑의 한숨’이더구만 어이구 사랑이 웬말이여 농사꾼 입장에서 니는 지옥의 한숨이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말도 이번에 처음 듣고 놀랐다.
이승과 저승의 이상향이 진천과 용인이었다니 새까맣게 몰랐네. 현재 저승 집값이 더 높은 것도.
말한 사람은 내가 그 말을 처음 들었다는 사실에 더 놀라더라.

-2월 한달간 쥬시팡을 끊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약간 여유가 생겨서 쥬시팡을 좀 해볼까 했으나 그동안 끊었던 시간이 아까워 손이 가지 않았다.
빵은 두 번쯤 폭식했다.
개인적 결론: 게임 중독보다 빵 중독이 더 고치기 힘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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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 써서 넘겼다. 홍녀도 끝이 보인다. 마냥 기쁘지 않을 거란 예상은 했다. 두 일에서 해방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면서도 줄곧 두려워했다. 일의 끝이란 각종 신체적 육체적 고통과 입금의 끝을 의미하기에. 하지만 두렵기로 치자면 귀한 자유의 시간을 같잖은 일로 펑펑 써버릴 스스로와 대면하는 일을 따라올 게 없다. 마감 때는 시발 내가 이것만 끝내면 당장 100개국어 마스터하고 맨발로 부산까지 마라톤해버릴 거라며 이를 득득 갈았건만 역시나 어영부영 뒹굴면서 유튜브만 보고 있고…자기계발 동기부여 재테크 성공사례 따위를 열심히 골라보고 있는데 가만 보면 이게 더 나쁘다. 본질적으로는 시간낭비와 다를 바 없는 짓인데 생산적으로 산다는 착각에 빠지기 딱 좋다는 점에서. 멍하니 영상물을 시청할 때 뇌의 인지기능이 제일 빨리 감퇴된다더만. 한심함을 견딜 수 없어서 홧김에 뛰쳐나가 부스터샷 맞고 왔다. 백신 맞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그 핑계로 또 일 안 하고 침대에 늘어붙을 게 뻔하니 이왕 누울 거 백신접종이라는 명분 위에 드러눕는 게 자괴감이 덜할 것 같아서. 그나마 최근 내가 홧김에 저지른 짓 중에서는 제일 현명했다. 버려지는 시간에 육체적 고통이 추가되자 한결 덜 아깝게 느껴진다.

‘XX분들 비하하는 거 아닙니다!’라고 속 보이는 방어막을 쳐놓고는 지역, 성별, 소득수준에 대한 차별의식을 집값과 엮어 정당화하는 부동산방송. 전쟁통에 몇백명이 죽고 다쳤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얼마 안 죽었고 주가가 막판에 반등했다는 소식을 깔끔하고 신속하게 전달하는 주식방송. 이런 걸 하루종일 들으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 일단 나는 심란해졌다. 돈의 흐름에 집중하지 않고 팔자좋게 심란해져버린 나는 그들에 따르면 부자의 마인드 장착에 실패한 인간이겠지. 그렇다고 내가 뭐 딱히 선량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푹 썩은 속물인데, 하여간 이도저도 아니고 애매하게 덜 썩은 양심이 군데군데 알박기를 하고 있어 골치가 아픈 것이다. 피구할 때 반쯤 금밟고 서있는데 아직 아무도 나를 발견 못한 불편하고 조마조마한 기분. 경기에 확 뛰어들지 아예 금 밖으로 나가버릴지 결정은 좀 미뤄두고 우선은 찌꺼기 양심이라도 긁어모아 많은 희생이 없기를 빌어야겠다.

방금 과거의 수치스런 기억이 떠올라서 벌떡 일어났다 앉았다. 근데 그걸 누가 지워주겠다고 하면 거절할 것 같다. 기억은 남기고 벌떡 일어나는 증상만 없애고 싶다.

이번에야말로 집을 싹 뒤집어엎고 샌프란시스코 여행수첩을 찾아내서 남은 여정을 기록하고 말 거다. 하지만 과연 집을 뒤엎을 수 있을까? 청소 생각만 해도 너무 싫어서 호흡이 가빠지는 내가!? 다방면으로 무능하지만 그중 최악이 청소능력이다.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치우다 말고 어디로 분류해야할지 모르겠는 물건을 든 채 방 한가운데 멍하니 서있는 걸로 시간 다 잡아먹는다. 싹 갖다버릴까도 했지만 전에 한번 그랬다가 크게 후회했다. 아니 뭘 꼭 버리고 나면 귀신같이 쓸 일이 생기더라고. 청소업체에 의뢰하면 5만원에 끝내주게 잘 치워준다던데, 그래도 집 상태가 이 지경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찾아야 할 물건이 있는 경우는 더더욱 남에게 맡기기 힘들 것 같고. 업체 직원이 오기 전에 남부끄럽지 않게 치워놔야 할 것 같은데 그럴 거면 그냥 내가 치우는 게 낫지 싶고. 암튼 누가 치우든 치워야지 이건 사람 사는 집이 아니다.

‘맘모스빵 폭식’에 이어 ‘단팥빵 폭식’하신 분들까지 여기 유입되시고…그밖에 ’몸이 않좋나’와 ‘백신 맞고 이빨이 아파요’ 등도 마음에 박힌 키워드. 질병과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괴로워진다. 절박한 검색을 통하여 이 블로그에 흘러들어온 그들이 아무런 해결책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더욱 죽을맛. 나도 멋쟁이 지식인이 되고 싶지만…‘몸이 않좋나’에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빨 통증은 비전문자로서 부디 일시적인 것으로 지나가길 빌겠고 폭식에 대해서는 엊그저께 또 맘모스빵을 잔뜩 먹은 입장으로서 할말이 없네. 부디 전문가의 도움을 적절히 받아가며 무탈한 삶 최대한 이어나가시기를. 이것저것 빌어야 할 게 참 많다. 인간이 육신을 달고 사는 한 기복신앙은 영원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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