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여벌옷 하나에 기초세면도구만 챙기고 집에 있는 작업도구(오래된 평판 스캐너, A4 연습장, 펜마우스, 이면지 약간, 태블릿PC, 스마트폰 공기계)를 싹 다 구겨넣으니 배낭 하나가 꽉 찼다. 여기다 추가로 뭘 더 달고 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이걸로 끝냈다. 가방 깊숙이 여권과 허가서류를 밀어넣었다. 한국여권은 쓸모가 많아 노리는 자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_공항철도에서 시선을 잡아채는 미모의 소유자들은 대개 한국 승무원이다. 인천공항의 미모 또한 대단하다. 있는 힘껏 화려하고 쾌적하고 매끄럽고 반짝인다. 한국 공항 정말 좋지? 아마 미국 도착하면 실망할지도 몰라. 공항이 너무 작고 초라해서. 영구의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이라면 그게 진정한 멋이네. 예쁘장할 의무를 못 느끼는 존재의 자유와 위엄. 근데 그런 자유야 아직 뭐 딴나라 얘기고, 당장은 눈앞에 펼쳐진 내 조국의 가련한 으리으리함에 혹하고 봐야겠다. 면세점 술담배 선물용 초콜릿 영양제 미니자개장 색동치마저고리를 입은 구닥다리 인형 따위를 대충 둘러보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길안내 로봇을 쫓아다니며 말 몇 마디 걸어보고 VR체험카페에서 게임을 좀 하다가 기계팔뚝이 내려준 2천원짜리 커피를 마셨다. 맛있었다. 엄청 미래인간된 기분이었다.

내심 걱정했던 건 공항 내 음식값이었다. 성의없는 국밥 비빔밥따위를 이삼만원주고 사먹어야 되면 어쩌지. 차라리 굶자. 나름 비장하게 각오했는데, 눈앞에 떡하니 편의점이 나타났다. 쌍수들고 달려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익숙한 공장제 저가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인천공항이 이루어낸 최고의 진보라고 느낄 정도였다. 체류지에서 먹을 가능성이 가장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부초밥을 사먹었다.


_영구와는 좌석이 떨어져있었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영구는 정말 착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주저없이 꼽을만큼 무골호인이지만 죽고 못사는 사이라도 10시간 붙어있는 건 부담된다. 머리 위 선반에 배낭을 밀어넣고 선반 뚜껑을 힘껏 닫는데 콱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놀랐다. 다들 선반에 짐을 놓고 뚜껑을 슬쩍 누르듯 닫는 걸 보니 큰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잘 잠기게끔 설계되어있나보다. 그런 걸 나는 무슨 찦차 트렁크문마냥 후려닫았으니...... 내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미숙하게 느껴졌지만 괘념치 않으려 애썼다. 자학하지 말자. 자학하지 말자.


_십몇년 전 이코노미석은 상당히 불편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의외로 편했다. 십몇년 전 이륙 땐 기체 진동이 심해서 이대로 공중분해되겠다 싶었는데 이번엔 덜 무서웠다. 미국행 비행기가 더 좋은 건가 나이 탓에 적당히 무뎌져 그런 건가. 다 나름 영향을 미쳤겠지만 인간의 집중력을 빨아먹는 데 갈수록 능숙해지는 IT기술이 주된 원인인 것 같다. 영화/TV/다큐/스포츠/게임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체 전방과 하방의 실시간 상황도 관찰 가능했다. 이것저것 눌러보다 영화에 안착했다. 라인업이 좋았다. 궁금하긴 한데 극장 가서 볼만큼의 강렬한 끌림은 없었던 영화들이 알차게 모여있었다.

​[그린북] 양아치 백인과 교양있는 흑인의 로드무비라는 시놉시스를 듣자마자 자동연상되는 모든 장면이 담겨있다. 어처구니없을 지경으로 뻔했지만 누누히 말했듯 뻔한 건 잘 먹힐 확률이 높다. 막판의 크리스마스 장면 진짜 최고로 뻔하고 역하고 근지러웠는데 보다 울었다. 다른 인종끼리 막 정을 나누고...상부상조하고...그런 거 너무 흐뭇하잖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기만적인 영화였다. 현실의 불미스런 잡음을 알고 보니 더더욱.​ [미스터 스마일]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영화를 각잡고 본 건 처음인데 하필 그게 은퇴작. 와 근데 너무나 곱고 우아한 할아버지다. 할배가 웃으면 정말 사방천지가 봄햇살 내리쬐듯 환해지며 뭐든 퍼주고 싶어진다. 젊었을 때 영화를 더 찾아봐야겠다. 상대 할매의 관상도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헉 76년작 캐리의 주인공 양반이었다!)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 악평에 비해선 그럭저럭 괜찮다 싶더니만 갈수록 좆같았다. 남의 집 자식 롯데월드 놀러간 홈비디오 보는 느낌이었다. 존나 지겨웠는데 한번 재생한 영화는 끝장을 봐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8배속으로 봤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 [퍼스트맨] 때 라이언 고슬링보다 인상적으로 봤던 클레어 포이 실컷 봐서 좋았다. 영화는 차갑고 슬펐다. 복지천국 북유럽 다 쓸모없다 그저 계집들은 국적불문 고생인 것을. ​[스타 이즈 본] 극장에서 봤는데 둘이 눈맞는 장면이랑 shallow 공연장면 다시 보고 싶어서 봤다. 레이디가가 몇번을 다시 봐도 멋지다. ​[한국인의 밥상] 그치 한국인이라면 이거 미국 가기 전에 꼭 봐줘야지. 이번 편은 남도의 해초와 조개밥상이었다. 내 동포들 왜케 칼로리 낮은 것들로만 연명했는지 진짜 맥앤치즈를 위시한 온갖 칼로리폭탄 정크푸드의 나라로 향하는 한마리 후손으로서 정말 너무나 면목없고 송구스러워 눈물이 났다.


_잠이 들락말락하는 비행 네다섯시간째, 기체가 크게 진동했고 안전벨트를 매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요란하게 울려퍼져 벌떡 일어났다. 몇 시간동안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초긴장상태로 있었다. 옆자리 인도남자가 앞자리에 얼굴을 파묻고 기도하기에 불안감은 한층 더 심해졌다. 진짜 여기서 죽나보다, 태평양 한가운데가 내 무덤자린가보다 했는데, 곧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하는 자세로만 숙면이 가능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기체는 곧 안정을 되찾았지만 한숨도 못 잤다.


_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 기내에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가 울려퍼졌다. 비몽사몽 중에도 전율이 일었다. 진짜 창작자들 중 뮤지션만큼 즉각적으로 사람 미치게 하는 종족이 없다. 부러워 죽겠다.


_남들 다 하는 여행에 들떠서 온갖 것들을 상세히 적는 행위 자체가 너무 촌스러운 것 아닌가 싶지만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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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출국날이 갑자기 정해졌다. 여권 만료된지 기십년이라 부랴부랴 구청에 달려갔다. 귀찮고 돈아깝고 시간없어서 만원짜리 지하철 즉석사진을 찍었다. 기계에 현금구멍 카드구멍이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카드는 멕이는 족족 토해내고 현금 만원권만 얄밉게 날름 삼켰다. 순식간에 사진이 나왔다. 못 나올 줄은 알고 있었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쁘게 나오든말든 관심없어진지 오래다. 그런데 이거는 어...잘나오고 못나오고는 둘째치고 얼굴이 너무 크다. 이렇게 커도 되나? 사진에 여백이 거의 없다. 시커멓게 산발한 머리에 하필 또 검정폴라티를 입고 찍어서 목조차 없다. 거대한 쌍판만이 공중부양중이었다. 규정위반 아냐? 아 뭐 얼굴만 크게 강조되면 식별하기 좋지 않겠어 출입국 직원들 가뜩이나 구별도 안되는 동양인들 얼굴 뜯어보느라 눈도 침침할 텐데 마 내가 친절하게 확대해줬으니까 잔말말고 통과시키라고 자빠져버리면 지들이 어쩔 건데. 재촬영으로 돈과 시간을 또 날리기 싫은 마음이 대책없는 허세를 빚어냈다. 이런 건 대부분의 여행기에서 불행의 복선이 된다. 어쩌긴 뭘 발포하겠지.


_선생님 이거는, 얼굴이 너무 크고 어둡게 나온데다 목도 없어서 출입국에서 문제삼을 수가 있거든요. 가급적 새로 찍으셨음 하는데, 굳이 이 사진으로 하시겠다면, 이 사진을 선생님 본인 의지로 선택해서 한 거라고 서명을 하시고 진행하셔야 돼요.
그래서 서명했다. 여권 민원 창구 전체가 선생님이, 선생님께서는, 선생님도, 선생, 선생, 선생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모든 민원인의 호칭은 성별 연령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부 선생님으로 통일하는 것이 불만의 소지가 가장 적다는 공직사회의 합의가 있었던 듯하다. 한국 호칭 문화의 골치아픔에 대해 생각하며 구청을 나서다가 근처 사진관 창문에 붙은 문구를 보고 비명을 꽥 질렀다.

[여권사진 9천원]

푼돈에 벌벌 떠는 나에게 이만한 귀싸대기가 없다. 뺨을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귀가했다.


_여권은 제때 나왔다. 신상정보가 적힌 면을 펼치니 문제의 사진이 나왔는데 얼굴 크기는 둘째치고 피부가 완전 구리색이다. 구리도 탐스러운 구리가 아니라 지명수배전단 특유의 어떤 음산-한. 그런 구릿빛. 어릴 때 수배전단 붙은 길은 쳐다도 안 보고 멀리 돌아갔다. 사진에 감도는 기운이 너무 무서워서. 그 기운의 정체를 알겠다. 피사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진이란 으레 그런 느낌인 것이다. 근데 자꾸 보니 사진에 정이 가서 뭐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됐다. 남는 여권사진 막 이마 뺨 턱 옆통수 뒤통수에 붙이고 티셔츠에다 크게 프린트해서 입고 가면 입국심사자도 정들지 않곤 못 배기겠지 하는 쿠소망상을 끝으로 사진에 대한 더 이상의 관심을 끊었다. 이제 ESTA가 문제다. 내가 무해한 관광객임을 증명받는 절차인데 허가가 나기까지 최대 7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96시간 뒤 출국인데...신상정보 체류지 주소 등을 쓰고 마약 테러 전염병 등과 관련있냐는 질문에 모두 아니오를 누르고 수수료 14달러를 지불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웬만하면 허가가 나지만 오타 때문에 거절당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한다. 뽕쟁이 테러범 좀비조차 아니오를 누를 저 뻔한 마약 테러 전염병 관련 질문도 마우스 스크롤 실수로 아니오가 예로 바뀐 채 제출되어 망하는 경우가 꽤 있단다. 14달러 카드결제시 지불국가를 택할 때 Korea Republic과 Korea Democratic Peoples Republic 두 개가 나오는데 후자인 북한을 고르는 사람도 적지 않단다. 데모크라틱 저거 민주주읜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까 맞겠지 싶어서(이 실수는 허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저런 실수들을 했으면 어쩌지 불안해하며 다섯시간 뒤 진행상황을 조회해보니


안도감과 설렘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마음에 조금씩 불안의 싹이 돋았다.

이 여행엔 어떤 지뢰가 숨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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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통이 날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렇게까지 티 낼 필요는 없었는데 참지를 못해서 기어이 몇 사람의 기분을 잡쳐놨다. 내가 뱉은 말에 상대의 낯빛이 변하는 순간이 수시로 떠올라 괴롭고 우울하다. 우울감 심할 때 남의 잘된 작업물을 보면 진짜로 죽도록 우울해지니까 되도록 피하는데 어제오늘은 뭔 날인지 고립감과 위기감까지 질식해 죽을 지경으로 심해져서 최근 입소문난 어떤 작품을 냅다 몰아봤고, 우려대로 기분이 완전 쑥대밭됐다. 나는 쓰레기 좆방맹이만도 못한 무능력자고 내가 손대는 건 죄다 망할 것이다. 이런 유치한 파국적 사고의 종착지는 단 하나. 지뢰찾기다. 손대는 족족 폭탄이 터져도 몇번이고 새출발이 가능한 이 미친 희망의 게임에서 나는 이제 벗어나기를 포기했다. 총 게임횟수 만 판이 목전이다. 저 숫자는 자기혐오의 무게다(단위는 근이 좋겠다). 나 자신이 너무 지겹고, 이렇게 살면 저 폭망의 자기예언이 실현될 게 뻔해 너무 무섭고 떨리는데, 한편으로는 게임성에 감탄하는 마음도 있다. 정말 잘 만든 게임 아닌가? 간결하며 철학적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숫자힌트를 잘 취합하면 네모판에 흩어진 99개의 지뢰 가운데 90개 이상을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다. 노력하면 대부분의 난관이 해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개 중 하나를 그냥 냅다 찍어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찾아온다. 내 힘으론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50%의 확률로 생사가 갈리는 순간. 직전까지 암만 잘했어도 운 없으면 끝장이라는 거. 요컨대 지뢰찾기는 능력으로 해나갈 수 있는 영역과 도박의 쪼는 맛이 더없이 절묘하게 결합된 인생의 축소판이다! 쓰레기가 되어가는 길에 이거라도 깨달아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나저나 게임중독과 알콜중독 중에 그나마 전자가 건강에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게임도 보통일이 아니다. 허리랑 눈깔이 세트로 빠지게 생겼다. 차라리 술이 낫겠다 싶어 다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뢰찾기하는 주정뱅이가 됐다. 아무데나 막 눌러서 지뢰가 펑펑 터지고 승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심신이 돌이킬 수 없이 썩어버리기 전에 지뢰찾기의 원산지나 한번 밟아보고 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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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장터국수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 영업하는 곳이 남아있더라. 너무 반가웠다. 초등학생 때 다니던 치과 건물 1층에 장터국수가 있었다. 치료 끝나고 거기서 가끔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장터국수 간판만 봐도 뜨겁고 찝찔한 국물과 치과 냄새와 드릴 썩션 소리에 오감을 두들겨맞는 것 같았다. 그 느낌 여전했다. 신기하고 이가 시렸다.



_말로만 가봐야지 가봐야지 했던 감자탕집에 드디어 가봤다. 생각보다 한적했다. 팔천원짜리 뼈해장국을 먹었는데 고기양은 적었지만 국물 고기 배추김치 무김치 모두 내가 생각하는 국밥집의 이데아에 가까운 맛이었다. 접객도 적절했다. 공기밥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데 운을 떼자마자 신속히 처리해줬다. 날씨마저 좋았다. 활짝 열어둔 매장 입구로 훈풍이 살랑살랑 들어왔다. 봄바람 맞으며 돼지등뼈를 젓가락으로 힘껏 비틀어 짜개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도 꿈결같아 슬퍼질 지경이었다. 반쯤 먹었을 때 등산객 몇 팀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매장이 꽉 찼는데 나처럼 단품 뚝배기 먹는 사람 아무도 없고 죄다 대중소가 붙은 메뉴들 그것도 웬만하면 다 대짜에 떡수제비감자사리 추가는 기본이고 소주도 쉴새없이 추가했다. 다 먹고 계산하고 신발 찾아신는 내내 여기저기서 등뼈추가를 외쳤다. 뼈추가는 만구천원이다. 감자탕집의 등산객 객단가란 정말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_대형고깃집을 볼 때면 저게 과연 유지가 잘 될까 괜히 걱정하게 된다. 내가 고기굽는 식당에 잘 가지 않으니 왠지 남들도 다 안 간다고 생각해버리는 것 같은데 너무 자기중심적 착각이지 싶다가도 실제로 그 왜 건물 외벽에 장독대 막 박혀있고 소돼지가 그려진 몇층짜리 고깃집들이 많이 사라진 걸 보면 마냥 근거없는 착각은 아닌 듯하고. 그러다 우연히 외식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끼리 하는 얘길 주워들었다. 사람들이 이제 예전만큼 고기 구워먹으러 다니는 걸 선호하지 않는단다. 케첩의 원조 크래프트하인즈가 건강식 선호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고 몰락하여 이 기업의 대주주인 워렌버핏이 3조를 손해봤다는 뉴스가 돈다. 그런 시대인가보다. 



_밥도 잘 안해먹는 주제에 뭔 배짱으로 잡곡을 사재기했는지 모르겠다. 하염없이 묵히느니 마른팬에 볶아서 과자 대신 씹어먹기로 했다. 두어 번 씻고 30분쯤 불린 다음 전체적으로 황갈색이 돌 때까지 약불에 볶았다. 타지 않게 나무주걱으로 계속 저어줘야 하는 게 약간 성가셨지만 의외로 즐거움이 컸다. 곡물이 열에 은근히 익을 때 나는 특유의 향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도 좋았고 중간중간 팝콘처럼 하얗게 튀겨지는 애들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이 행위를 많이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다 볶은 곡물을 밀폐용기에 넣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왔다가 초미세먼지 농도가 600 넘게 치솟은 공기청정기를 보고 기절초풍했다. 요리는 진정 생명을 살리고 갉아먹는 행위임을 실감했다. 볶은 곡물은 정말 맛있었다.



_쇼핑몰에서 서리태 사려다 너무 비싸서 중국산을 검색했는데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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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수론은 내가 수학과 다닐 때도

학교에서 강의도 안 했어

커리큘럼에도 없었어

그건 그냥 거의 장난식으로 치부하는 거지

해석학 이런 게 많았지


B        대학에선 해석학이 제일 많이 쓰이는 것 같아요

문과쪽에서조차도


A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장난만은 아닌 것 같애


B        뭔가 쓰임새가 있겠죠


A        어 컴퓨터 이런 거에 활용되지

천재들이 뭔가를 해놓으면

3백년쯤 지나서 그게 막 쓰여


C        그 천재들 괜히 3백년을 앞서가지고 힘들었겠네

돈도 못 벌고


B        생각해보면 역사에서 3백년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닌데

인간한테는 너무...


C        올리브 맛있다 올리브 좀 먹어


B        음~


A        수론은 인제 수학과 다니면서도

학교에서 강의를 안 해주니까

그냥 각자 수론책을 사가지고 공부를 했지

혹시 내가 천재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으로

근데 아니었어

아무도 천재가 아니야! (웃음)


B        그래도 막 공부를 해서 자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도 멋있네요

한계까지 가본 거잖아요

아 씨 나도 공부 좀 해야 되는데 게을러갖고


A        아냐 하지 마 공부할 필요없어 그냥 놀아


C        그건 아니지 공부를 해야지 뇌가 안 늙어

근데 너 요새 똥은 잘 누니


B        아 네 뭐


A        대화를 할라그러면 갑자기 껴들어서

올리브 얘기하고 똥 얘기하고

집중을 할 수가 없어


C        이런 것도 다 대화야

야채주스 갈은 거 꼭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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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샐러드팩 10개를 선택하고 주문버튼을 누르려다 '이 상품을 본 고객이 많이 본 상품목록'에 스테이크가 껴있는 거 보고 웃었다.



_쭈꾸미볶음에도 부대찌개에도 심지어 동태탕에도 고르곤졸라 피자를 끼워준다. 치즈 쬐끔 붙은 허여멀건한 종잇장 같은 게 나오는 거 뻔히 알면서도 '서비스로 피자 한 판'이라는 파격엔 이상하게 매번 속고 싶어진다. 그 점이 이 마케팅의 포인트인 듯하다. 고르곤졸라 피자란 판매자 입장에서 얇은 도우에 변변한 토핑 하나 안 올리고도 피자라는 이름이 지닌 푸짐함의 아우라를 써먹을 수 있는 아이템인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물건너온 5음절짜리 난해한 명칭과 확 친해졌다. 길고 생소한 외래어를 입에 올릴라치면 으레 피어나는 멋쩍고 주눅든 웃음이 고르곤졸라를 말할 땐 잘 안 보인다. 고유명사에 취약한 연령층조차 매끄럽게 발음한다. 이쯤되면 업신여기게 된다. 얼마전 처음 가본 피자집에서 메뉴판을 보는데 웬일로 고르곤졸라 피자가 최상단에 있었다. 형광색 BEST 마크까지 붙었다. 평소였으면 바로 택했을 조건이었으나 주저없이 제끼고 다른 걸 골랐다. 친숙함을 평가절하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온당한가.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 곧 식사에 집중했다. 특이했다. 이탈리안인데 사찰음식 같았다. 맛집될 의욕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맛.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어쩌면 업주의 모든 세속적 야망을 박박 긁어 만든 단 하나의 메뉴가 고르곤졸라 피자였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_고구마를 향한 사랑은 조금 식었고(너무 비싸다) 지금은 계란에 미쳤다. 그나저나 방송자막은 왜 그렇게 계란을 악착같이 달걀로 고쳐놓는 걸까. 순우리말 권장 차원에서 그러는 건가.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데. 암튼 계란 30구짜리 세 판을 싸게 파는 마트가 있다기에 득달같이 달려가 샀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한 판일 땐 별 생각 없었는데 세 판을 묶어놓으니 무게가 만만찮았다. 또 알다시피 계란은 잘 깨지는데 무게가 늘면 그만큼 다루기 어려워지니 파손우려가 더 높아지고, 이런 물리적 심리적 부담감이 체감무게를 대여섯배 증폭시켰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금세 팔근육이 떨렸다. 집까지는 1Km도 넘게 남았는데. 눈앞이 깜깜했다. 택시? 고작 몇 백원 아끼자고 멀리 떨어진 마트까지 걸어왔는데 미쳤다고 택시를 타? 그냥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저렇게 자세를 바꿔가며 몇 발짝 걷다 쉬기를 반복했다. 재래시장에서 잔뜩 산 떨이재료를 미련하게 이고지고 걷다가 건널목에 주저앉아서 한숨을 몰아쉬던 엄마 생각이 났다. 몸서리가 쳐졌다. 맞은편에서 할머니가 걸어왔다. 머리에 2리터짜리 올리브오일병을 얹은 채 기적처럼 곁을 스쳐 지나가는 할머니. 왜 저런 기예를 익혀야만 했는지 너무 이해됐다. 정수리에 수직으로 가해지는 압력이 팔의 통증보다는 견디기 쉬우니까. 나도 한 번 해보려다 바로 단념했다. 90알의 깨진 계란 위에 엎어져 통곡하는 내 미래가 선히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온갖 자세들을 처절하게 전전하며 계속 걸었다. 그러다 마침내.......최적에 가까운 자세를 찾았다. 지면과 평행한 계란판의 한쪽 변을 배꼽 아래쯤에 단단히 붙이고 쭉 뻗은 양팔로 그 맞은편 변을 잡는다. 그러니까 계란판(밑변)과 내 몸통(높이)과 팔(빗변)이 직각삼각형을 이루도록 하고, 계란판 잡은 손에서 몸통 방향으로 힘을 가하며 걷는 것이다. 어떤 과학원리가 숨어있는지는 몰라도 이 자세가 그나마 가장 편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지만.




_우울감을 잊기 위해 빵을 굽는다니 소름돋게 쪽팔리는 클리셰이긴 한데 그런 걸 또 굳이 유난스럽게 쪽팔려하는 꼴도 우스웠다. 나까짓게 뭔데 감히 클리셰같이 근사한 걸 거부하느냔 말이다. 그렇게 구워낸 통밀식빵은, 꼬인 심보가 섞인 탓인지 위는 타고 속은 덜 익고 모양은 뒤틀리고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실체가 분명한 결과물을 맨손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확실한 위안이 됐다. 방금 전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향과 온도와 무게를 지닌 덩어리. 그걸 한입에 먹어치움으로써 감쪽같이 존재감을 삭제할 수 있다는 것이 또 괴상망측하게 멋진 지점이다. 먹고 사는 건 대체로 슬프고 피곤하고 끔찍하지만 가끔 단순명쾌한 쾌감을 준다. 그래도 못생긴 빵은 이제 좀 그만 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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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초품아 마래푸 고래힐 마용성 노도강이 뭐의 줄임말인지 알아들어봤자 뭐하나. 부동산과 주식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 멍청해지는 느낌이고 내 정신머리로는 절대로 큰 돈을 만질 수 없다는 확신만 강해진다. 누군가 인생은 자기를 믿고 나아가는 거라 하던데 맨정신에 그게 가능한가. 진짜 부럽다. 내 보기에 세상에서 제일 믿어서는 안 될 인간은 나 자신이다. 확고한 자기불신 하나라도 건져서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 너무 속단하는 건가? 비관의 탈을 쓴 고질적 게으름이 또 또 나를 과장되게 부정적인 결론에 주저앉히려드는 것 같다. 내 안에 잠재할지도 모를 천재적인 투자재능을 발굴하기 귀찮으니까. 근데 솔직히 말해서 이 나이 먹도록 발굴되지 않은 재능이면 없다고 봐도 되지 않나? 내가 괜히 게으른 게 아니다. 이 또한 수십년간 축적된 빅데이터의 결과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올해로 구십먹은 투자왕 워렌버핏도 아직 배울게 많다고 그러는 판에 나이 운운하며 포기하는 것도 좀 저거하지 않나. 여기까지 쓰고 또 지뢰찾기했다. 지뢰 한번 찾을 때마다 시신경이 썩는 것 같다. 투자천재는 시발 얼어죽을 적어도 워렌버핏은 내 나이에 지뢰찾기로 시간낭비하며 자학하진 않았겠지. 잠재된 재능이고 나발이고 그냥 지금 하는 짓이 곧 나 자신이다. 나는 지뢰찾기 폐인이여.



_혹시나 해서 '워렌버핏 지뢰찾기'로 검색해봤다. 역시나 아무것도 안 나오고 무슨 명언 퍼레이드만 쏟아졌다(아 이 할배 명언 진짜 많이 했다). 심지어 구글에서 'Warren Buffett minesweeper'로도 찾아봤는데 건질 게 없었다. 그러다 눈이 번쩍 뜨였다. Bill Gates was so addicted to Minesweeper, he used to sneak into a colleague's office after work to play 빌게이츠가 지뢰찾기 중독자였다는 2015년 기사. 세계적 떼부자와 같은 게임중독자라는 억지동질감을 쥐어짜내는 데 기어이 성공했다!



_지하철 옆자리 노인이 아무래도 불안했다. 체취며 몸동작이며 간헐적 소음이며 모든 분야의 암묵적 에티켓을 쪼끔쪼끔 아주 소극적으로 위반하고 있었다. 거슬렸지만 어렵게 잡은 구석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긴 애매했다. 한 십여분쯤 지났을까 노인이 푸르르르 한숨을 쉬었고, 그 서슬에 큰 침방울이 내 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신발끝에 떨어졌다. 바로 튕겨져일어났다. 노인은 내가 떠난 자리에 스윽 엉덩이를 밀고 들어갔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앞에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는 노인이 있었다(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고개를 팩 돌리고 토를 했다. 속력을 전혀 줄이지 않고 걸어가며 토했다. 사실 구토인지 뭔지도 모르겠다. 토사물치고는 묽고 소량인데 침이라 하기엔 또 양이 많았다. 액체의 성질이 뭐든간에 문제는 그게 뒤따르던 날 덮치게 생겼다는 거. 생선처럼 몸을 휘어 간신히 봉변을 피했다. 집에 잠깐 들렀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다 다시 열렸다. 이웃노인이었다. 낭패라고 생각했다. 타인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탈 바에는 생수통을 지더라도 계단을 택하는 편이다. 하지만 애매한 면식관계의 웃어른과 함께 타버린 지금 휙 내려버리긴 곤란하지 않나. 생수통보다도 무거운 유교의 압박. 하는 수 없이 목례하고 앞을 보는데 노인이 들고 있던 전단지를 바닥에 툭 던지더니 아고고고 죽겠다 하며 그 위에 주저앉았다. 놀라서 어디 편찮으시냐고 묻자 다리가 아파서 서있질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어." 식겁해서 아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 하자 아니 사실이 그런데 뭐 얼른 죽어야지, 라는 답이 돌아왔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을 때까지 늙으면 죽어야지, 아이고 그런 말씀 마세요, 시들어빠진 두 문장만 공허하게 오갔다. 날아오는 분비물을 피할 민첩성과 계단을 오르내릴 힘이 사라지기 전에 사이보그기술이 상용화되기를 간절히 빈다.



_그 어떤 SNS도 안하고 고민하던 유튜브도 안하고 한물갔다 말하기도 뭣한 블로그에 돌아와 요즘 트렌드치곤 긴 잡담을 쓰고 연필로 그림그리고 종이책을 읽고 게임마저 윈도우에 내장된 지뢰찾기를 하면서 IT·과학계의 최신뉴스를 열심히 찾아보는 삶. 뭘 좀 알고 도태되면 덜 슬플까. 추가적인 신규진입이 잘 발생하지 않는 오래된 산업(예를 들어 시멘트, 전통공예 등)의 수익률이 생각보다 상당히 좋다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는데, 이 상황에 맞는 얘긴 아닌 것 같다. 내가 주워들은 얘기란 대개 이런 식으로 어딘가 미묘하게 부적절한 시공간을 방황하다 사라진다.



_올봄에도 [내 나이가 어때서] 순회공연이 또 열릴까 모르겠다. 작년 재작년 봄에 사람들이 집앞에서 하루 온종일 저 노랠 불러제끼는 통에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는데 (특히 그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에서 딱!이 너무 싫다) 지금은 그 주책없는 에너지가 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또 하루종일 그걸 듣고 앉아있으면 생각이 바뀔 게 뻔하지만, 지금 심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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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4일_지뢰찾기하다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서 냅다 뛰쳐나왔다. 우울하게 방황하다 습관처럼 먹자골목으로 향했다. 가게들이 죄다 문닫은 골목은 회색으로 죽어있었다. 더 우울해졌다. 동네 재래시장에 갔다. 한적하고 규모도 작고 이렇다할 명물이나 매스컴 탄 맛집도 없고 상인들마저 약간 내성적인 시장인데(그래서 좋아하지만) 설은 설이었다. 온 시장통이 사람들로 새까맣게 북적였다. 야 다행히 여기도 명절 특수를 누리는구나. 잘되는 동네 자영업을 보면 기분이 좋다. 반찬집과 고깃집과 떡집이 특히 붐볐다. 갓 뽑은 가래떡을 뚝뚝 떼어 시식으로 나눠주는 손길과 정신없이 전 부치는 뒤집개에서 엄청난 흥이 느껴졌다. 그런데 (당연히도) 모든 점포가 잘되는 건 아니었다. 빵집과 속옷가게는 그 앞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숙연해질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속옷이야 두고두고 팔면 된다쳐도 빵집은 같은 음식장사하는 입장에서 속 좀 타겠다 싶었다. 그런데 맘모스와 상투과자와 소시지피자빵과 잘게 썬 양배추와 엉성한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갖춘 전형적인 시장빵집에 인파가 몰리는 걸 본 기억이 있던가. 발렌타인 크리스마스같은 시즌에 붐벼터지는 건 대개 시장 바깥의 '베이커리'다. 그래도 시장빵집 특유의 예스러운 빵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층은 분명 존재하니 내 걱정이 무색하게 사시사철 큰 기복없이 갈지도 모르겠다. 시장 하늘을 덮은 캐노피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설맞이 가래떡썰기대회 제기차기대회' 진지하게 나가볼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놀라버렸다. 어릴 땐 저딴 걸 대체 누가 나가냐며 코웃음을 쳤는데 시발 그게 미래의 나였어. 신청일자가 지났음에 슬퍼하고 안도했다.





5일_한번 명절 시장맛을 보니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 또 나왔다. 마침 시사인의 신년기획 [대림동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http://daerim.sisain.co.kr/도 읽었겠다 대림중앙시장에 가기로 했다. 12번 출구 밖으로 나가자마자 검은 인파가 먹물처럼 흘렀다. 검은색 패딩은 동북아시아인의 겨울철 유니폼 같다. 나도 먹물 한방울. 냉큼 섞여들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추석의 중앙시장을 봤다. 골목 가득 넘쳐나는 월병 구경하는 게 너무너무 즐거웠다. 설날에는 어떤 풍경일지 궁금했다. 둘러보니 의외로 월병 같은 시그니처 품목이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스팸이나 과일 같은 한국적 선물세트와 중국술 세트, 그리고 보리수나무 열매로 만든 열쇠고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보리수열매에 관심이 갔다. 먹어만 봤지 장신구로 만든 건 처음 봐서 좀더 자세히 구경하고 싶었지만 돈없는 처지에 판매자에게 희망을 주기 두려워 멀찍이서 기웃거리기만 했다. 흥미를 보이며 다가와 열매를 만지작대는 객에게 싹싹하게 효험을 설명하던 판매자는 객이 떠나자 다시 열매들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알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쓰다듬던 그 손이 마음에 남았다. 아무래도 사올 걸 그랬다. 가족단위로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여유로운 표정의 부모와 볼 통통한 애들이 손에손에 호떡이며 꼬치를 들고 웃으며 가고 있었다. 날 따뜻한 연휴라는 게 이렇게나 정신건강에 유익하다. 중국말이 많이 들렸지만 생각보다 한국말의 비중이 높다고 느꼈다. "한국인은 1등시민, 조선족은 2등시민, 한족은 3등시민" "한국에서 '언어(한국어)'는 일종의 권력이고 자산이 된다"는 기사내용이 생각났다. 안쪽길로 더 들어갔다. 고수 당콩 오리알 영채 두리안 그리고 조그만 파란무와 그을렸는지 절였는지 삭혔는지 모를 새까만 사과같이 익숙하고도 생소한 식재료들이 줄지어 있었다. 꽈배기 호빵 만두를 비롯해 닭 메추리통구이 돼지의 온갖 부위로 만든 요리들도 존재감 여전했다. 이번엔 도가니로 추정되는 부위를 하얗게 쪄서 파는 곳이 많았다. 거깄는 내장이란 내장들 종류별로 싹 다 사오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6일_연휴 막날의 시장이라면 명절 당일 뼛속까지 상혼을 태우고 황량하기 그지없을 터였다. 하지만 재래시장 폐인 돼버린 나는 어디라도 가야했다. 청량리도매시장에 붙은 통닭골목은 왠지 연휴에도 성업중일 것 같았다.





하지만 잘못내림




어디야




어디냐고



결국 못찾았다. 통닭은 뼈한조각 못 보고 황량함만 스케일 크게 느끼다 돌아가게 생겼다. 그런데 어쩌다 접어든 약초골목에서 의외의 활기를 접했다. 평소만큼은 아니지만 상인과 객들로 제법 북적였다. 덩달아 들떴다가......곧 슬퍼졌다. 객의 태반이 고령자들. 즉 이 골목의 활기는 노인의 육체적 고통이 연중무휴임을 의미한다. 행자는 청량리를 싫어했다. 노인들이 뿜어내는 기이한 생의 에너지에 질식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런 청량리가 싫지 않다 말하며 이 일대에 예정된 개발호재 주워들은 얘기 몇 가질 덧붙였다. 행자는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네. 우리는 어떻게 늙어갈까. 조만간 통닭골목 다시 찾으러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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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지뢰찾기 게임 횟수 현재 5154판. 이 글을 올릴 때쯤이면 분명 더 늘어있겠지.



_순대국집 옆자리에 초로의 운수업 종사자 둘이 앉았다. 마침 TV 뉴스에선 우버 등 차량공유경제와 이에 따른 일자리급감 화두가 나왔다. 곧 엄청난 비분강개의 언어가 쏟아질 거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그들은 차분히 자신들의 예정된 퇴장과 소멸을 얘기했다. 기품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자기 존재가치의 소멸을 관조하는 것만이 AI시대에서 인간이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인가 싶어 스산해졌다.



_순대국집 만두국집 국수집 사이시옷 아직도 너무 쓰기 싫다. 근데 귀갓길은 아무렇지 않게 쓴다. 나는 먹을것에 감히 시옷이 끼어드는 걸 용서할 수 없는 것 같다.



_버스 앞자리 노인이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는 눈치인데 하차준비가 좀 많이 늦었다. 역시나 버스는 노인이 하차단말기에 카드를 찍기도 전에 문닫고 출발. "내려줘요!!! 기사양반 내려주시요!!!" 노인의 외침에 기사는 뭘 씨 아무데서나 내려달라 그래, 하고 짜증내며 차를 세웠다. 순간 내 바로 뒤에 앉은 사람이 낮게 숨죽여 웃었다. "후후훗쿠쿠쿸쿠쿸" 굼뜬 노인이 면박당한 걸 고소해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웃음. 섬뜩했다.



_마음에 담은 몇몇 사람들이 더는 고생하지 않았으면 한다. 제발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즐겁게 살길 바란다. 언뜻언뜻 떠오르는 몇몇 사람들은 망했으면 좋겠다. 너무 폭삭 망하지는 말고 딱 내 죄책감을 자극하지 않을 만한 선에서, 한달에 두어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며 술자리에서 푸념하는 여유쯤은 누릴 수 있도록 인간답게 망하기를 빈다. 하지만 이들의 건강만은 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디 튼튼한 육체와 말짱한 정신으로 볼품없는 삶을 오래도록 견디길 기원한다. 



_방금 엄마가 이런 카톡을 보냈다. 조금 웃다가 왠지 슬퍼지면서 맴씨를 곱게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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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겪는 문제의 원인은 나도 알고 A도 알고 다 알았다. A는 사람을 너무 잘 믿고 좋아했다. 현재 A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 둘은 누가 봐도 상종 못할 부류였다. 하지만 A는 자꾸만 정을 줬고 그들은 그걸 새새끼처럼 처먹곤 더 달라며 A를 쥐어짰다. 너 같으면 어떻게 할 거야? A의 물음에 답했다. 일단 절대 안 만날 거고, 계속 귀찮게 하면 녹취 뜬 거 보여주면서 고소한다고 아주 거품물고 팔팔 날뛸 거야. 그쪽이 먼저 질려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듣던 A가 말했다.


그러면 외롭잖아.


할말이 없어졌다. 너는 안 외로워? 외로울 때 어떻게 해? A는 알까. 아 당연히 나도 사람인데 외롭지, 외로운데, 사람 때문에 귀찮고 괴로운 게 외로운 것보다 훨씬 싫으니까 어느 시점부턴 그냥 별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안 만나지더라고. 우리가 지금 이 질문과 답변을 몇 번째 고대로 되풀이하고 있는지를. 한동안 잠자코 있던 A가 말했다. 너는 참 쿨하다. 하긴 옛날부터 쿨하고 시원시원했지 너는. 귀를 의심했다. 이건 새로운 패턴이다. 아니 내 대답이 쿨해? 딱 봐도 어디에 크게 데인 유리멘탈 인간 특유의 호들갑스런 방어태세 아닌가. 애시당초 내가 인간관계 앞에서 쿨하고 시원시원하게 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관계에든 질척임과 망신과 후회의 지뢰가 점점이 박혀있다. A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우리는 서로의 정신과 육체가 특출나게 추했던 시절을 함께 겪었다. 아.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A가 이런 접대성 왜곡을 하는 것도 같다. 미친 쿨은 무슨 아까 한참을 말했잖아 나 관계쓰레기라고. 아냐 너는 늘 멋졌어. 멋지기는 씨발 솔직히 네가 백만 배는 더 멋지다. 아니지 진짜 멋진 건 너지. 아니라니까 너라니까. 너 진짜 멋지다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게 문제다. 가뜩이나 없는 친구마저 적어지는 처지에 서로 아픈 구석이 어딘지를 너무 잘 아니까 필사적으로 상대의 장점을 찾아내 핥아주고, 그러다 덕담배틀 일어나고, 하다하다 결국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멋짐대폭발사태로 치닫는 것이다. 멱살잡을 기세로 서로의 멋짐을 찬양하던 우리는 뒤늦게 신성한 술상머리에서 이게 다 뭔짓인가 싶어 조용히 술을 퍼마시고 콩나물처럼 꾸부러졌다.


돌아오는 길은 한숨으로 뒤덮였다. 내 이미지를 터무니없이 고평가하는 것에 화들짝 놀라 그걸 깎아내리는 데에만 급급해서 A의 고통과 외로움엔 신경도 안 썼다. 참 나답게 철딱서니없는 행동이었다. 해서 귀가내내 육성으로 아이고!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는 요란한 퍼포먼스를 하긴 했는데, 실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의 원인인 외로움을 견디는 방법을 대충 정리하면 1) 진정한 사랑과 관심과 시간을 꾸준히 투입해주는 사람 만나기 2) 체념. 나같은 2지망에게 1지망의 A가 원하는 고급자원이 있을 리 있나. 설령 있다해도 내가 그걸 기꺼이 내어줄 인간인가. 모르겠다. A와 내가 서로 친하기를 원하는 한, 아마도 우리는 잊을 만하면 만나서 같은 질문 같은 답을 하고 서로의 멋짐을 칭찬하는 데 머리를 쥐어짜다 탈진해 쓰러지고 다음날 쑥스럽게 헤어지겠지. 그 시간동안만이라도 다른 골치아픈 걸 잊을 수 있다면 솔직히 그게 어딘가 싶다. 내가 해도 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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