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며 TV를 봤다. 이리저리 돌아가던 채널이 한 영화채널에 잠시 머물렀다. 여러모로 망조가 깃든 2021년산 한국영화였다. 배우 대사 소재 연출 모든 것이 구렸다. 술에 취한 콘텐츠 고관여층에게 망한 남의 영화만큼 좋은 먹잇감이 또 있을까. 영화와 배우와 감독을 피라냐떼처럼 찢어발기는 판이 벌어졌다. 나도 엉거주춤 동참했다. 꺼림칙한 기분을 애써 외면하면서. 창작자로서 다른 창작자를 까는 것은 리스크가 큰 악취미다. 그럼 너는 씨발 얼마나 잘났는데? 하는 뼈아픈 반격을 쓸데없이 유도하는 짓이다. 한편으론 비겁하고 무의미한 경계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당사자는 여기서 한 말 듣지도 못할 텐데 깔 거 있음 시원하게 까고 말지 뭐하러 몸을 사리는 건가. 몸 사린다고 내게 날아올 비평의 칼날이 나를 피해가디? 조신하게 칼 맞으면 좀 덜 아프디? 서로 열심히 만들고 까고 그러는 게 건강한 사회 아닌가? 뭐 그런 생각들로 한참 마음이 어수선했다.

채널은 두어 번 더 돌아가 또 다른 영화채널에 닿았다. [굿 윌 헌팅]이었다. 하도 회자되어 골백번은 본 듯하나 실은 한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내가 안(못)보고 지나친 무수한 명작 중 하나. 일행들은 일제히 크~~~하고 감탄했다. 그럴 만했다. 앞부분 다 잘라먹고 중반부만 잠깐 봤는데도 확 몰입되더라. 배우 대사 소재 연출 모든 것이 훌륭했고 화면 때깔마저 적당히 빛바랜 청바지처럼 고풍스럽게 멋졌다. 웰메이드의 정석같은 영화였다. 감동도 차고 넘쳤다. 너무 넘쳐서 이상했다.

구체적으로 뭐가 이상했냐면 윌의 성공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주변인들이 이상했다. 모두가 윌을 감동시키기 위한 필살의 명대사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너무 이상했고 단체로 미친 것 같았다. 늙은 선생이야 똘똘한 애한테 광명 찾아주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쳐도 같이 고생하던 친구는 진짜로 그러기 힘들지 않나. 그래서 남의 인생에 누가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나서냐며 특히 남 잘되는 꼴에 배아파 뒤진 귀신들이 우글대는 반도에선 친구 인생에 초를 치면 쳤지 저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코웃음을 쳤는데, 내 말에 놀란 A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예? 그건 아니죠. 우리도 잘되고 들개님도 잘되고 다 같이 잘되는 게 좋죠.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영화는 곧 끝났고 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틈만 나면 A의 말을 곱씹는다.

틀린 게 없는 말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그 때 함께 영화를 보았던 A와 B가 정말 행복하길 바란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며 건강과 행복이 가득한 삶을 살길 진심으로 바랄 뿐만 아니라 만약 내가 A와 B가 크게 도약할만한 기회를 발견한다면 지체없이 그들에게 그것을 알리고 권할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난 C에게도 D, E, F에게도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그들이 나와 다른 분야의 사람이기 때문에 맘껏 너그러울 수 있는 걸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G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글을 잘쓴다. 춤도 노래도 그림도 유머도, 내가 동경하는 모든 분야에서 나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인간이다. 나는 G가 아직 그 재능에 합당한 평가와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그 재능을 가지고도 내 눈앞에서 주저앉아버린다면 나는 그것을 내심 기뻐할까? 모르긴 몰라도 윌의 친구와 똑같은 대사를 하며 그를 더 높이 날아오르게 하기 위해 애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굿 윌 헌팅] 속 인물들의 행동은 극적으로 미화된 선행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상식적인 행동이라 보는 쪽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느 누구의 성공도 나의 성공만큼 기쁠 수는 없는 일이고 나만 빼고 다들 잘나가는 상황에서 절대로 사람 좋게 허허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며 잘되는 게 아니꼽고 진심으로 망했으면 좋겠다 싶은 인간들이 널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내면에서 수없이 솟았다 꺼지는 여러 감정 중에 시기질투열등감에게만 너무 생각없이 스피커를 갖다주고 ‘본능’ 혹은 ‘인지상정’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아닌지, 그것들을 너무 보란듯이 증폭시키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말로만 듣던 좋은 영화를 재밌게 감상했다. 격분한 윌의 얼굴을 감싸쥔 선생이 It’s not your fault를 수없이 반복하여 진정시키는 장면의 에너지는 정말 멋졌다. 와인도 아주 맛있었다. 나무늘보 모텔 또한 훌륭한 곳이었다. 1박에 4만원인데 가격 대비 방이 크고 LG스타일러와 욕조가 있었다. 무엇보다 모텔의 이름이 나무늘보라니.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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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들어간 게 이것보다 훨씬 유용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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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흫ㅎㅎㅎ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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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보고 첫눈에 홀딱 반한 인왕산 숲속쉼터를 구경하러 갔다가 기생충에 나올법한 초호화대저택단지에 잘못 들어가서 한참을 헤매고 갑자기 청와대가 나타나서 식겁하고 엉뚱한 등산로를 타서 끝없는 산행지옥에 빠지는 등본의 아니게 대장정을 해버려서 정작 쉼터에 도착했을 땐 너무 배가 고파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10분만에 뛰쳐나왔다. 맨날 가는 동네 도서관에 딴생각하면서 가다가 차에 치일 뻔하고 갑자기 나타난 재래시장에 흥분해서 한바탕 구경하고 나오고 하여간 엉망진창으로 경로를 재탐색하다가(잘 가다가 옆 골목의 순대국집 간판이 멋지다는 이유로 방향을 막 꺾어버림) 정신 차려보니 웬 누룽지공장 앞. 저번엔 양말공장 앞이었지. 아침부터 헤매느라 진이 다 빠져서 하나도 집중을 못하고 엎어져 잤다. 방향감각 어떡하냐.

- 에세이 잘쓰는 자들을 한없이 부러워하다가 이제는 마케팅 잘하는 자를 신으로 섬기는 단계로 넘어갔다. 마케팅은 정말 대단한 예술이다. 책사의 노회함과 장수의 용맹함을 겸비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쭈구리 음유시인은 과연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나저나 관계자나 지인에게 책을 주며 느낀 건데 재혼 삼혼 청첩장 뿌리고 셋째놈 돌잔치 초대하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더만. 책이라는 게 워낙 취향을 타는 물건이라 자칫 잘못하면 공간만 잡아먹는 애물단지가 되기 십상인데 주는 사람이 그 책의 저자라면 더더욱 피차간에 쓸데없이 부담스러워지고 여기에 책에 싸인을 해주느냐 마느냐의 문제까지 추가되면 그야말로 치열한 심리전쟁이 펼쳐지게 되어(싸인 관련 얘기는 나중에 별도로)...그게 참 이렇게 냅다 떠안겨도 될 일인가 싶고 여하간에 입체적으로 민망하고 송구스런 것이다. 과연 나는 이런 쭈굴탱탱 심약한 마음의 모가지를 단칼에 쳐버리고 용맹한 장수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 트위터 진짜 무서운 새끼네. 가뜩이나 집중력 바닥나서 퍼석퍼석해진 뇌를 아주 짤짤 비틀어가지고 찔끔 남은 것까지 다 짜버렸어. 사람들 일거수일투족에 기분이 널뛰고 모임만 나갔다 하면 100% 했던 말을 후회하는 내 성격에 너무나도 소셜적으로 네트워크된 이 서비스는 감당이 안 되는 자극의 지옥. 하지만 창작물 홍보=SNS라는 시대의 조류에 이제라도 몸을 맡겨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하게 된 것인데, 아아 어렵구나! 홍보 목적이 빤히 보이면 너무 좀 그러니까 결국 내 일상생활이나 속마음 중에서 그나마 좀 팔릴만한 진정성을 조금씩 잘라 전시해놓게 되고...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몸통 반쪽이 불지옥에 들어간 거라! 독백은 독백이되 불특정다수의 긍정적 반응을 갈구하는 마음이 구렁이처럼 도사린 독백을 날리면서, 나의 지적능력 유머감각 등등을 자유경쟁노점상에 펼쳐놓고 처절한 호객행위를 하는 거라! 호평을 보면 너무 고맙고 기뻐서 뇌에 불붙은 느낌인데 곧 타는 듯한 갈증이 몰려오고(! ! 더 많은 호평을!), 반응이 없으면 없어서 울적해 죽는 거라! 여기에 이제 악플이 추가되면...
...까지는 좀 오바고(뭐 그렇게 처절할 정도로 열심히 호객하지도 못했음) 그냥 일단 머리를 비우고 적응하려 한다. 아 시간제한의 필요성은 진지하게 느끼고 있다. 작업 효율이 확실히 떨어진다.

- 산해진미를 즐겨버릇하면 재앙이 닥친다는 신념이 있다. 자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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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들어간 게 이거보다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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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피하려고 했던 SNS를 결국 하게 됐다
그랴 이 시대에 어딜 도망가겠누

twitter.com/pyedogteeth
instagram.com/pyedogteeth

저 두 구녕에 벌써 기력을 빨려버려서
블로그에 뭘 써올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최후에 살아남을 곳은 결국 여기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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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세상에 제가
몸과 마음과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는 실용서를
내버렸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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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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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새벽같이 도서관에 나왔으나 간발의 차로 VIP석을 빼앗김. 원통하다!

-어려운 미팅을 앞두고 왕뾰루지가 나는 징크스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터졌는데, 마스크가 그것을 완벽하게 가려주어 전염병 시국의 몇 안 되는 효용을 다시금 체감하였다. 다만 긴장하면 아무말을 지껄이며 오바싸는 기질까진 차마 가려주질 못하여…결국 나는 또 자폭. 멸망. 그러나 삶은 팥과 더덕을 먹고 다음날 개같이 부활했다. 더 이상 무의미한 반성따윈 하지 않는다…오바의 횟수를 최대한 늘려서 수치심을 마비시키는 수밖에는…!

-재채기를 좀 조용히 할 수는 없을까? 소싯적의 재채기는 이를테면 공기 90 소리 10의, 공공장소에서 존재감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는 바람 새는 소리에 불과하였으나 늙을수록 소리의 비중이 점점 커져서 지금은 재채기 소리를 한글로 명확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으에헤이!!! 이래서는 곤란하다. 또렷하게 받아쓰기가 편하면 편할수록 죄질이 나쁜 재채기이기에(나만의 양형기준). 최소한 저 으에헤이 중에서 으에만 빼도 덜 주책맞겠건만 영 고쳐지질 않는다. 재채기 볼륨조절 능력이 생기면 좋겠다.

-2010~2020년 사이에 발매된 K팝에 뇌를 저당잡힌 듯.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 파도타기하며 아아 명곡…이것은 참으로 명곡이다…!를 몇번 반복하니 세시간이 우습게 순삭됐다. 2NE1 [I love you]로 대미를 장식하고 흐느끼며 잠들었다. 들을 때마다 느끼지만 외롭고 슬픈 밤의 몸부림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불후의 명곡이다 진짜.

-책을 받아봤다. 골백번은 더 검토하고 뜯어고친 글이라 쳐다도 보기 싫을 줄 알았는데 실물을 받고 의외로 크게 감동했다. 서서 한참을 집중해서 읽었다. 심지어 재밌다고 느껴버렸어. 지가 쓴 책을 재밌어하다니 좆같은 팔불출 납셨네 싶었지만 원래 시간과 정신력을 쏟아부은 일에는 꼴사납게 집착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것을 이번에 제대로 실감했다. 여럿이서 그렇게나 마르고 닳도록 검토하고 수정했는데도 고치고 싶은 부분이 군데군데 보인다는 게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최종, 최종_2차, 최종_3차, 진짜_최종, 진짜진짜_최종, 진짜진짜최종중의_최종, 진짜진짜맹세코최종_완전끝디엔드 이지경까지 가서 편집자를 혼절하게 만든 누군가의 심정을 이제 이해한다. 이렇듯 여러 가질 깨닫고 느끼게 됐지만 앞날이 어찌될지는 전혀 모르겠다. 진인사대천명-진인사대천명-만 염불처럼 외다가 아니 솔직히 내가 하늘을 움직일만큼 뭐 대단한 저거를 했냐 하면 그건 아니지 않나, 고생한 걸로 따지면 진인사대천명을 간절히 외는 인간들 중 하위 20%급에나 간신히 속하지 않을까 싶어 시무룩해지는 것이다. 아이고 나는 모르겠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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