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는 설날 중에 가장 늦은 이슬람력 설날마저 코앞에 닥쳤으므로, 미루고 미뤄뒀던 2021년 결산을 해봅니다.

인간관계
평생 같은 자리에 있어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크게 다치고 병들고 세상을 떠난 해였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이 다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거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확실히 작년을 기점으로 저는 제 자아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렸고 그로 인한 공허함이 노화와 맞물려 예전과는 다른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괴로운 일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밖에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행연습도 안 되고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미리 연습으로 단련해서 이겨냅니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거대한 불행의 파도이니 그냥 덮쳐오면 잠자코 처맞아준 뒤에 어느 정도 정신이 수습되면 세 끼 밥 잘 챙겨먹고 잠 잘 자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비관적인 생각에 골몰해있을 시간에 떠난 이들과 나눴던 행복한 시간들을 기억하고, 곁에 있는 고마운 사람들과 1초라도 더 보내며 적당히 즐거워하다 죽으면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어요.

음식
연초의 충격적인 사건과 경제적인 이유로 식습관을 엄격히 통제했었습니다. 주로 채소를 먹었고, 탄수화물은 잡곡과 고구마, 단백질은 콩과 계란과 직접 만든 무지방 요거트와 고기 중 최저가인 돼지고기 뒷다리살, 지방은 견과류와 이웃에게 얻어온 들기름으로 채웠습니다. 술은 완전히 끊고 자주 걸었습니다. 요컨대 어르신들 즐겨보는 건강 프로그램의 모범답안 같은 생활을 한 것이죠. 몸에 나쁜 건 한 숟갈도 삼키지 않겠다는 대쪽같은 결의로 똘똘 뭉쳐서는. 이게 딱 1년 가더군요. 지금의 전 완전히 망가져서는 내키는대로 술을 퍼마시고, 거대하고 육중한 맘모스빵을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치우고, 쓰레기장 같은 집에서 며칠동안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뒹구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다 큰 탈이 나면 식겁해서 또 식습관을 개선할 것이고 그러다 1년쯤 지나서 또 무너지겠죠. 샤워실의 바보처럼 살다 갈 팔자이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1년이라도 유해음식 안식년을 가지는 게 어딘가 싶고 그러네요.

문화
연초에는 뭔가를 챙겨볼 정신이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 짬을 내어 픽사의 [소울]을 보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원래 디즈니 픽사 계열 애니메이션은 봤다 하면 무조건 눈물바다였는데(어떨 땐 디즈니 마법의 성 로고가 나올 때부터 오열합니다) [소울]은 보는 내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황홀하고 행복해서 울고 싶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영화 자체의 훌륭함도 훌륭함이었지만 괴롭고 힘든 인생에 예술작품이 진짜로 위안이 되어줄 수 있다는 걸 생전 처음 겪어보고 감격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반기에는 그래도 꽤 이것저것 챙겨봤는데, 어쩐지 다 가물가물하고 그냥 재테크 책을 미친듯이 읽은 기억밖에 안 나네요. 과연 돈냄새란 독한 살충제 같은 것. 작고 섬세한 것들을 싸그리 박멸하는 데 아주 직빵이구만요. 이렇게 된 이상 재테크 관련 콘텐츠나 한번 구상해볼까 합니다. 이번에는 부디 생각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제 뭘 먹고 사나. 농사를 지으면서 짤짤이 투자라도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으나 유튜브만 틀었다 하면 !!절대로 농사짓지 말라!!폭락장에 으깨진 개미들!! 이런 식의 피맺힌 절규투성이라 완전 쫄아서는 역시 하던 도둑질만한 게 없다는 생각에 다시 맘 잡고 만화를 그리고자 했지만 뭘 그려도 저품질…절망에 빠져가던 차에 음식 에세이를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만화 그리기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고생을 하느라 아주 죽을 맛이었지만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 형편없이 서툴고 후졌던 어떤 점들이 조금씩 개선되는 느낌이 이런저런 부정적인 감정에 질식해가던 저에게 어느 정도 심폐소생을 해줬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마지못해 할 거면 아예 하지를 말고 일단 하기로 했으면 최선을 다해 홍보한다 - 를 본의 아니게 남은 인생의 모토로 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최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환골탈태할 수도 지금껏 살던 고대로 살 수도 있다는 게 함정이긴 한데…변화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현실이 피부에 와닿으니 아무리 게으른 저라도 마냥 누워있기가 좀 뭣해서 뭐라도 하기는 할 것 같습니다. 맨날천날 똑같은 걱정들을 되새김질하며 손놓고 살아왔고 덕분에 큼지막하게 골치 아픈 일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확정된 미래를 맞이할 것이 너무나 뻔하더란 말이죠. 느리지만 확실한 도태. 침몰. 지금까지는 뭐 나 하나쯤 도태되면 어떠리~~하며 팔자좋게 뒹굴거렸는데 그게 겉으로는 편해보여도 속이 시커멓게 썩는 일이었고 드디어 2021년을 기점으로 방구석에 드러누워 예정된 실패를 기다리며 산 채로 썩어가는 괴로움이 맡은 일에 매진하는 피곤함과 귀찮음을 넘어섰습니다. 어쩔 수가 읎다 인제는 하루종일 빈둥거리면 속상한 걸 넘어서 몸에 막 통증이 와.

결론적으로 2021년은 저에게 앞으로 다가올 생로병사로 인한 고통의 맛배기 튜토리얼 버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날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생겼는데 그 두려움의 크기만큼 강력한 체념과 달관의 정서도 생겨서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된 상태로 어영부영 늙어가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만 되어도 복 받은 인생입니다. 다사다난한 한해가 지난지 석달짼데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비극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어 쓰라린 한숨만 나오는 요즘입니다.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최후의 설날을 맞이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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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이 술처먹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서대문구인가 오 여기까지 오타가 0ㅓㅂㅅ군

 

+이런 미친
허벅지는 또 왜 이렇게 아픈가 했더니
취해가지고 스쿼트 300개하고 눈에 보이는 계단이란 계단은 다 올라갔던 게 어렴풋이 기억남
그래 근육이 남는 거지(근데 알코올=근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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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소식한번봤다전쟁소식한번봤다대선봤다전쟁봤다대선전쟁대선전쟁 이지랄하다 멘탈에 골다공증와서 누워있음
그리고 두 시간 전 양국이 특정 지역에서 임시 휴전 합의했다는 소식에 겨우 정신이 들어 임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곧이어 이번 산불이 일종의 증오범죄라는 소식을 듣고 눈에 흰자만 남음
그러다 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이길 수 있다”는 미 국무장관의 발언에 벌떡 일어나서 엉? 진짜? 아님 뭔가 다른 꿍꿍이가? 뭔데? 나만 안 보여? 이러고 있고…
영악한 강철멘탈들도 목숨을 부지할까말까한 난세에 나 혼자만 말미잘

-사전 투표를 했다. 우리 동네 말고 딴 동네에서.
투표소 줄이 너무 길어서 차라리 본 투표날이 더 한산하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데 딴 동네에서 온 사람은 대기없이 바로 투표할 수 있다는 안내요원님(바쁜 와중에 정말 친절하셨음)의 말에 후딱 하고 왔다.
몇년에 한번 투표로 지도자를 갈아치우는 시스템이 그나마 고맙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어찌됐건 선량하고 품위있게 살려는 노력을 놔버리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이 추악함에 잠식돼버린 반면교사 양반을 보고 한바탕 개식겁을 한 후 얻은 교훈이다.
늙으면 좀 추해져도 된다고 생각한 내가 안일했다 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좆될 수 있음.
증오 혐오 탐욕 시기질투 열등감 좌절감을 장기간 방치하지 말자.
분명 또 방치하고 싶어지겠지만 그럴 땐 그 반면스승의 눈빛을 떠올리자.

-반면교사라는 말을 마오쩌둥이 처음 썼다네. 처음 알았다.
갈등이라는 단어가 칡 갈+등나무 등이라는 두 덩굴식물의 조합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어.
근데 칡꽃의 꽃말이 ‘사랑의 한숨’이더구만 어이구 사랑이 웬말이여 농사꾼 입장에서 니는 지옥의 한숨이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말도 이번에 처음 듣고 놀랐다.
이승과 저승의 이상향이 진천과 용인이었다니 새까맣게 몰랐네. 현재 저승 집값이 더 높은 것도.
말한 사람은 내가 그 말을 처음 들었다는 사실에 더 놀라더라.

-2월 한달간 쥬시팡을 끊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약간 여유가 생겨서 쥬시팡을 좀 해볼까 했으나 그동안 끊었던 시간이 아까워 손이 가지 않았다.
빵은 두 번쯤 폭식했다.
개인적 결론: 게임 중독보다 빵 중독이 더 고치기 힘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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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음식과 메뉴가 많이 겹쳐서 괴롭고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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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 써서 넘겼다. 홍녀도 끝이 보인다. 마냥 기쁘지 않을 거란 예상은 했다. 두 일에서 해방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면서도 줄곧 두려워했다. 일의 끝이란 각종 신체적 육체적 고통과 입금의 끝을 의미하기에. 하지만 두렵기로 치자면 귀한 자유의 시간을 같잖은 일로 펑펑 써버릴 스스로와 대면하는 일을 따라올 게 없다. 마감 때는 시발 내가 이것만 끝내면 당장 100개국어 마스터하고 맨발로 부산까지 마라톤해버릴 거라며 이를 득득 갈았건만 역시나 어영부영 뒹굴면서 유튜브만 보고 있고…자기계발 동기부여 재테크 성공사례 따위를 열심히 골라보고 있는데 가만 보면 이게 더 나쁘다. 본질적으로는 시간낭비와 다를 바 없는 짓인데 생산적으로 산다는 착각에 빠지기 딱 좋다는 점에서. 멍하니 영상물을 시청할 때 뇌의 인지기능이 제일 빨리 감퇴된다더만. 한심함을 견딜 수 없어서 홧김에 뛰쳐나가 부스터샷 맞고 왔다. 백신 맞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그 핑계로 또 일 안 하고 침대에 늘어붙을 게 뻔하니 이왕 누울 거 백신접종이라는 명분 위에 드러눕는 게 자괴감이 덜할 것 같아서. 그나마 최근 내가 홧김에 저지른 짓 중에서는 제일 현명했다. 버려지는 시간에 육체적 고통이 추가되자 한결 덜 아깝게 느껴진다.

‘XX분들 비하하는 거 아닙니다!’라고 속 보이는 방어막을 쳐놓고는 지역, 성별, 소득수준에 대한 차별의식을 집값과 엮어 정당화하는 부동산방송. 전쟁통에 몇백명이 죽고 다쳤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얼마 안 죽었고 주가가 막판에 반등했다는 소식을 깔끔하고 신속하게 전달하는 주식방송. 이런 걸 하루종일 들으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 일단 나는 심란해졌다. 돈의 흐름에 집중하지 않고 팔자좋게 심란해져버린 나는 그들에 따르면 부자의 마인드 장착에 실패한 인간이겠지. 그렇다고 내가 뭐 딱히 선량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푹 썩은 속물인데, 하여간 이도저도 아니고 애매하게 덜 썩은 양심이 군데군데 알박기를 하고 있어 골치가 아픈 것이다. 피구할 때 반쯤 금밟고 서있는데 아직 아무도 나를 발견 못한 불편하고 조마조마한 기분. 경기에 확 뛰어들지 아예 금 밖으로 나가버릴지 결정은 좀 미뤄두고 우선은 찌꺼기 양심이라도 긁어모아 많은 희생이 없기를 빌어야겠다.

방금 과거의 수치스런 기억이 떠올라서 벌떡 일어났다 앉았다. 근데 그걸 누가 지워주겠다고 하면 거절할 것 같다. 기억은 남기고 벌떡 일어나는 증상만 없애고 싶다.

이번에야말로 집을 싹 뒤집어엎고 샌프란시스코 여행수첩을 찾아내서 남은 여정을 기록하고 말 거다. 하지만 과연 집을 뒤엎을 수 있을까? 청소 생각만 해도 너무 싫어서 호흡이 가빠지는 내가!? 다방면으로 무능하지만 그중 최악이 청소능력이다.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치우다 말고 어디로 분류해야할지 모르겠는 물건을 든 채 방 한가운데 멍하니 서있는 걸로 시간 다 잡아먹는다. 싹 갖다버릴까도 했지만 전에 한번 그랬다가 크게 후회했다. 아니 뭘 꼭 버리고 나면 귀신같이 쓸 일이 생기더라고. 청소업체에 의뢰하면 5만원에 끝내주게 잘 치워준다던데, 그래도 집 상태가 이 지경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찾아야 할 물건이 있는 경우는 더더욱 남에게 맡기기 힘들 것 같고. 업체 직원이 오기 전에 남부끄럽지 않게 치워놔야 할 것 같은데 그럴 거면 그냥 내가 치우는 게 낫지 싶고. 암튼 누가 치우든 치워야지 이건 사람 사는 집이 아니다.

‘맘모스빵 폭식’에 이어 ‘단팥빵 폭식’하신 분들까지 여기 유입되시고…그밖에 ’몸이 않좋나’와 ‘백신 맞고 이빨이 아파요’ 등도 마음에 박힌 키워드. 질병과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괴로워진다. 절박한 검색을 통하여 이 블로그에 흘러들어온 그들이 아무런 해결책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더욱 죽을맛. 나도 멋쟁이 지식인이 되고 싶지만…‘몸이 않좋나’에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빨 통증은 비전문자로서 부디 일시적인 것으로 지나가길 빌겠고 폭식에 대해서는 엊그저께 또 맘모스빵을 잔뜩 먹은 입장으로서 할말이 없네. 부디 전문가의 도움을 적절히 받아가며 무탈한 삶 최대한 이어나가시기를. 이것저것 빌어야 할 게 참 많다. 인간이 육신을 달고 사는 한 기복신앙은 영원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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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 보름만에 맘모스빵을 꾸역꾸역 먹어버렸다. 검정콩 막걸리의 흑갈색 병 색깔이 너무 유혹적이어서 냉큼 사들고 와서는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그리고 지옥을 겪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이제 맛있고 해로운 음식을 견뎌내는 맷집이 완전 망가졌나보다. 막걸리 살 때 같이 충동구매한 생굴은 무서워서 차마 날로 먹지 못했다. 굴 먹고 지옥행 열차 탄 이웃이 요즘 너무 많다. 그러다 부엌선반 구석에 굴러다니는 올리브오일을 발견하고 마늘이랑 같이 넣고 끓여봤는데 꽤 그럴싸했다. 올리브오일 요리는 웬만하면 그럴싸한 느낌이 나서 좋다. 그럴싸한 걸 소화해줄 여유 정도는 몸에 아직 남아있어 다행이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배우고 싶은 기술이 머릿속을 미친듯이 빙빙 맴돌아 두개골에 벌통을 집어넣고 사는 기분이다. 너무 이러면 막상 시간날 때 아무것도 안하고 드러누워 쥬시팡만 할 텐데…빵도 술도 못 끊었는데 여기다 쥬시팡까지 다시 손을 대면 진짜 빨개벗겨서 무인도에 떨어뜨려놔야된다 나자신을

부동산 매물검색에 정신 나가서 도서관 좌석 이용시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앉아있다 쫓겨났다. 결국 스터디카페행. 괜히 재테크한다고 깝치다가 피같은 쌩돈 몇천원만 더 까인 것이다. 근데 스터디카페 옆자리 퇴근남자 부동산 책이랑 자기계발서를 완전 산처럼 쌓아놓고 노트북으로 경매물건 엄청 열심히 검색하더만. 저 열정. 투지. 어흐 무서워. 얼치기 상태로 재테크 정글에 뛰어들면 저런 불꽃카리스마한테 싹 털리겠지.

생각해보니 불꽃카리스마랑 만능열쇠한테 이미 영혼 탈탈 탈곡당했네. 백만년만에 찾아온 썩은 감정 어떻게 주체하질 못하고 혼자서 순대국을 사먹었다(쌩돈 또 나감). 잊을 만하면 새삼 느끼는 점이지만 아이돌은 대단하다. 정말 대단한 직업이다. 인간의 반짝이는 순간을 무한정 복제해서 공중에 전쟁같이 뿌려대는 일이라니 내 멘탈로는 그 원본으로 살아가는 심정 짐작도 못 하겠고.

저를 믿으셔도 됩니다, 라는 말을 자신있게 하는 사람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존나 멋있는 여자다 B.
남들의 멋짐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참 짧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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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10도의 한낮이 이렇게 좋은 거였어. 동네 산책로의 활력이 다르다. 사람들이 앞뒤로 휘두르는 팔의 각도가 하늘을 찌르고 다 웃고 다니고...나도 덩달아 신나서 힘차게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보도블럭에 피가 뿌려져있다. 아무리 봐도 피였다. 뭐지? 어쨌든 지금은 다시 최저기온 영하 11도. 피 다 얼었겠다.

-지나가는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트로트가 나오는데 가사가 “친구야~우리집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네~” 감동했다. 언젠가부터 유행하는 트로트 가사란 대체로 이런 식인 듯. 뭔가 소박하게 기복적이랄까 약간 중장년층의 마려운 부분을 대신 눠주는 해우소의 메아리 같은…맞어 친구가 집 근처 살면 좋긴 좋지…하고 나도 모르게 수긍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을 콕 꼬집어 읊어줘서 재미있게 생각한다.

-H도서관 부근 기사식당에서 돌솥비빔밥을 먹고 대단히 알차게 행복해졌다. 맛 자체는 중위권이었다. 죽에 가까운 진밥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미식계에서는 절대로 용납 못할 비빔밥. 하지만 싼값에 채소가 듬뿍 들어간 뜨거운 곡기로 배를 꽉 채웠다는 만족감이 굉장했다. 이제는 식당에서 내어주는 1인분을 다 먹는 게 힘들지 않다.

-고통을 호소하는 발을 무시하며 만원대의 하자있는 신발만을 고집한지 어언 20년. 그간 용케도 탈없이 장거리를 걷고 뛰어다녔지만 이제 운이 다한 듯하다. 오른발에서 불길한 통증이 느껴져 정형외과 진료상담신청. 그런데 신청이 씹힌 듯. 병원에서 연락이 없다. 이렇게 또 E병원을 향한 원한은 쌓여만 가고…

-스터디카페 몇 군데를 이용했다. 유료공간인만큼 공공도서관보다 강박적인 고요함에 지배받는 곳이었고 그점이 쾌적하면서도 숨이 막혔다. 그 와중에 예나 지금이나 도서관이나 스터디카페나 퇴실을 결심한 이용자들이 내는 소음은 다른 소음과 느낌이 확 다르다는 것, 다만 나 어릴 적과 다르게 요즘의 퇴실 소리엔 퀅! 하고 콘센트 뽑는 소리가 꼭 추가된다는 것을 느꼈다. 할일에 전혀 집중 안했단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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