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그렇게 작고 초라하지 않더만 샌프란시스코 공항. ​​다만 조금 어두침침했다.


_입국심사대에 줄을 섰다. 하도 흉흉한 사례를 많이 주워들은 탓인가. 시키는 거 다 했고 허가도 다 받았고 체류지 체류기간 목적 등등 누가 봐도 모든 항목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있으니 별일이야 있겠냐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지뢰를 클릭하기 직전과 비슷한 불안감이 들었다. 대기인원이 상당히 많았고 진행속도도 더뎌서 지겹기 짝이 없었으나 앞사람이 줄어들면 줄어드는대로 식은땀이 났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잖아......​맴! 갑자기 웬 경찰이 나를 불러 화들짝 놀랐다. ESTA허가를 받았냐고 묻고는 무인기계코너를 가리키는 경찰. 허리춤의 권총에 얼핏 시선이 갔다.

알고 보니 그냥 정해진 절차를 지시하는 거였는데 첫빠따가 나였을 뿐이었다. 괜히 긴장했네. 뒷사람들과 함께 우루루 기계로 몰려갔다. 여권정보를 스캔하고 얼굴사진을 찍고 지문날인을 하면 영수증 같은 데 내 신상정보가 출력돼 나오고 그걸 심사창구에 가져가면 인터뷰가 시작되는 거다. 그런데 지문이 안 찍힌다. 손가락을 서너 번 뗐다 붙여도 기계가 지문인식을 못 한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관공서에서 지문 찍을 일이 있을 때 종종 듣는다. 선생님 지문이 좀 흐리시네요. 지문이 흐리다는데 뭐라 대꾸할 말도 참 마땅찮어. 그러게요...하고 쓴웃음짓는 거 말곤 뭐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 내게 원래 흐린 사람들이 있어요, 하고 짐짓 자비로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몇번이고 지문을 다시 찍게 했던 조국의 친절공무원이 생각났다. 과연 미국도 흐리멍텅헌 지문을 가진 동양여자에게 짐짓 자비를 베풀어줄 것인가. 의문에 화답하듯 네다섯번째 시도에서 마침내 지문이 인식됐다. 쾌재를 부르며 출력된 결과를 확인하는데, 내 신상정보 전체에 대문짝만한 엑스표가 그어져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건 원숭이도 알겠다.


_구글에서 검색해보니 이 엑스표는 지문인식에 문제가 있거나 추가적인 서류 체크가 필요하거나 무작위 심사가 들어갈 경우 등등에 표시될 수 있다며 짐짓 자비롭게 위로한다. Don’t panic. 그랴......덕분에 덜 불안해졌다. 곧 인터뷰다. 드디어 영어를 입에 올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시 식은땀이 났다. 야 이렇게 새가슴이어서야. 저짝에 저 영어 한마디 못하는 인도 중국 할매들도 잘만 통과하던데 나라고 못할 게 뭐여. ​Next! 심호흡을 하고 심사관 앞에 섰다. 히스패닉으로 추정되는 울적하고 피곤한 표정의 중년남자.

질문이 시작됐다. 윽 씨발. 첫 질문부터 못 알아들었다. 송구스런 표정으로 익스큐즈 미?하고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하니 남자가 아주 그냥 지긋지긋하다는 듯 천천히 반복했다. ​하우, 아, 유. 세상에. 그렇게 부정적인 표정으로 내 안부를 물어봐주는 인간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허둥지둥 답했다. 파인, 땡큐. 앤유?를 붙일까말까 고민하다 입을 닫았다. 그것까지 붙이면 그야말로 한국식 영어공교육에 세뇌된 얼간이 인공지능처럼 보일 것 같았거니와 심사관의 안부 따위 진짜 털끝만큼도 궁금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무탈히 벗어나고픈 마음이 너무너무 커서 실성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따위에 관심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애써 물어봐줬으니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한가롭게 자문할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질문공세가 시작됐는데 한번에 이해한 게 반도 안 됐다. 발음과 억양과 스피드 전부 낯설었다. 미안한데 못 알아들었다는 말을 반복했고 심사관은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즈려밟듯 다시 물어봤다. 그제야 좀 들렸다. ​너 어디 사니. 어디서 지낼 거니. 미국에 얼마나 있을 거니. 아는 사람 있니. 그 사람 미국시민이니. 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니. 짐은 그게 다니. 달러는 몇푼 가져가니. 신용카드는 있니. 알아듣은 질문엔 제깍제깍 답했고 적절한 단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을 땐 나의 성실함과 무해함을 당신께 온전히 전해드리지 못해 속터져 죽겠다는 듯 찌푸린 미간에 손을 짚었다. 솔직한 답변에 심사관이 석연찮은 반응을 보일 때마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뒤쪽의 조사실로 끌려갈까 두려웠다. 이것저것 계속 묻고 했던 질문도 몇번씩 더 반복하던 심사관의 새로운 질문. ​너 직업이 뭐니. 순간 멈칫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Writer? Artist?(윽!!) 잠깐만 만화가가 뭐였더라......아. Cartoonist. Cartoonist. 심사관이 눈을 찌푸렸다. ​What? 카 투 니 스 트. ​Oh, you draw? 예아... 심사관은 잠시 흠, 하더니 내 여권과 기타서류를 시뻘건 주머니에 쓸어담고 주둥이에 자물쇠를 철컥 잠갔다. 헉?! ​이 주머니 가지고 A구역으로 가. 안녕. Next!

좆된 거 맞지 이거.
​​​




_A구역 입구에 infection 어쩌구 씨앗 및 식품 등 반입금지 품목 저쩌구 써놨던데 나 무슨 감염위험군으로 분류된 건가. 혼란과 공포. 그런데 담당 직원들의 분위기는 어째 아까보다 화기애애하다. 그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빨간 주머니를 건네니 가져온 짐을 전부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으란다. 배낭을 올려놓자 직원의 눈썹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과장되게 휘었다. ​Only one backpack? 예아... 짐이 진짜 하나뿐임을 확인한 직원은 동료를 돌아보며 ​one backpack~하고 피식 웃었다. 아니 다들 대체 짐을 얼마나 싸짊어지고 다니길래 저래. 일만 아니었음 비닐봉지 하나로도 충분했어 이 양반아.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한 가방이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직원이 가방을 좀 뒤져보겠단다. 슈어 하고 한발짝 물러서있는데 직원이 가방 밑바닥에서 작은 비닐뭉치를 꺼내더니 천천히 자기 눈높이로 올려들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니......??

씨발 진짜 좆됐구나.

큰엄마가 준 단감 까먹고 남은 씨앗 몇 알과 500ml 물병에 뚜껑 대신 꽂아두면 서서히 찻물이 우러나오는 원뿔형 플라스틱 티백 쓰레기였다. 지퍼락에 넣고 돌돌 말아 배낭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직원은 봉지에서 끄집어낸 씨앗을 살펴보며 다시 물었다. ​이거 뭔데? 그것은 과일...과일 씨앗... ​무슨 과일? 감인데...아 감...가만있자 감이 영어로...? 와 씨발 이걸 어쩌냐 감......감이 영어로 뭐지??!? 나는 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먹지만 내 돈 내고 사먹을 생각은 들지 않는 과일이다. 따라서 영어명에도 전혀 관심없었다. 석류! 석류는 안다! 좋아하니까! 퍼머그래냇! 아 내가 진짜 석류도 아는 사람인데...제발 석류를 물어봐줘...!!! 내 맘도 몰라주는 야속한 직원. 감씨에 시선을 박은 채 다시 묻는다. ​너 이거 심을 거야?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노우! 네버! ​흐음. 이번엔 녹차 플라스틱 티백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관찰한다. ​이건 또 뭐니? 혹시 땅에 꽂으면 싹이 나는 거니? 노우!! 그거 코리안 녹차 티백이고, 사용한 거고, 그냥 쓰레기야!! 다 쓰레기야!!! 까먹고 있었어!!! ​​​흐음... 잠깐 생각하던 직원이 짐짓 자비롭게 말했다. ​그럼 다 버려도 되지? 이것들을 갖고 있는 건 좋지 않아. 오 물론이지...땡큐...! 감씨와 티백을 쓰레기통에 버린 직원은 빨간 주머니의 자물쇠를 열어 내 여권과 서류를 꺼내줬다. 와. 긴장이 탁 풀렸다. 살았구나. ​잘 가. 땡큐를 외치며 꾸벅 인사했다.


_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영구와 상봉하고 바로 우버를 호출했다. 2분도 안 되어 빨간 토요타가 왔다. 영구의 집으로 출발. 뭐라고 표현할까. 그냥 이게 다 뭔가 싶고 모든 게 현실감이 없었다. 퍼뜩 정신차리고 네이버 검색창을 켰다. ‘감을 영어로’ 아. persimmon. 퍼시먼이라고 하는구나. 되게 감같지 않네. persimmon. persimmon.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숱하게 보아왔던 주택, 상점, 도로, 간판과 광고판의 폰트, 나무와 수풀이 차창 밖에 흐르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persimmon. persimmon. 평생 까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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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mkwak1220 2019.03.15 12:14 신고

    전 9년째 미국을 왔다갔다하는데 그 넓은 땅 어딜가도 입국심사는 언제나 한결같이 사람은 미어터지고 느려터지고 속터지고 축축 쳐지고 암울하죠 ㅜㅠ 안 그래도 우울증 걸릴 것 같은 분위기에 미국이라는 최강국을 모국으로 뒀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산적같은 얼굴을 한 심사관들이 이 대단한 나라에 오려고 기를쓰는 미개한 제 3세계 사람들에게 가진 미묘한 우월감과 멸시가 가득 서린 짜증을 팍팍내며 특히 영어가 서투른 외국인들을 벌레보듯이 매도하는데 아주 미치고 팔딱 뛰겠더군요. 초기엔 뭣모르고 눈이 해까닥 뒤집혀서 내가 니 꽥꽥소리나 쳐들어려 13시간 반이나 엉덩이에 땀띠나게 태평양 건너온줄 아냐 하면서 헛소릴 짓껄였다가 추방당할것 같은 상황에 처한적도 있어요 ㅠㅜ 물론 지금은 예쓰예쓰 쏘리 땡큐하며 설설 기지만 심사관들이 ♩♫♫떨때마다 입을 아주 명주실로 꼬매주고 싶네요. 하기야 하루 몇시간씩 닭장같은 유리벽 뒤에 앉아 남들 지문이나 들여다보며 이 사람이 불법체류하지는 않을까 테러리스트는 아닐까 온갖 걱정을 사서하는 노동이라는게 쉽진 않겠죠. 뭐 노동의 본질은 먹고살 양식을 얻는데 있다지만 최소한의 보람이나 성취감, 즐거움 하나 없이 생계에 쫒겨 죽지못해 하는 일이 심사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아직 학생이고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몇년뒤에 취업난에 못이겨 죽도록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면 저렇게 변해버리지 않을까 생각하면 너무너무너무 서글프고 빨리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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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여벌옷 하나에 기초세면도구만 챙기고 집에 있는 작업도구(오래된 평판 스캐너, A4 연습장, 펜마우스, 이면지 약간, 태블릿PC, 스마트폰 공기계)를 싹 다 구겨넣으니 배낭 하나가 꽉 찼다. 여기다 추가로 뭘 더 달고 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이걸로 끝냈다. 가방 깊숙이 여권과 허가서류를 밀어넣었다. 한국여권은 쓸모가 많아 노리는 자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_공항철도에서 시선을 잡아채는 미모의 소유자들은 대개 한국 승무원이다. 인천공항의 미모 또한 대단하다. 있는 힘껏 화려하고 쾌적하고 매끄럽고 반짝인다. 한국 공항 정말 좋지? 아마 미국 도착하면 실망할지도 몰라. 공항이 너무 작고 초라해서. 영구의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이라면 그게 진정한 멋이네. 예쁘장할 의무를 못 느끼는 존재의 자유와 위엄. 근데 그런 자유야 아직 뭐 딴나라 얘기고, 당장은 눈앞에 펼쳐진 내 조국의 가련한 으리으리함에 혹하고 봐야겠다. 면세점 술담배 선물용 초콜릿 영양제 미니자개장 색동치마저고리를 입은 구닥다리 인형 따위를 대충 둘러보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길안내 로봇을 쫓아다니며 말 몇 마디 걸어보고 VR체험카페에서 게임을 좀 하다가 기계팔뚝이 내려준 2천원짜리 커피를 마셨다. 맛있었다. 엄청 미래인간된 기분이었다.

내심 걱정했던 건 공항 내 음식값이었다. 성의없는 국밥 비빔밥따위를 이삼만원주고 사먹어야 되면 어쩌지. 차라리 굶자. 나름 비장하게 각오했는데, 눈앞에 떡하니 편의점이 나타났다. 쌍수들고 달려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익숙한 공장제 저가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인천공항이 이루어낸 최고의 진보라고 느낄 정도였다. 체류지에서 먹을 가능성이 가장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부초밥을 사먹었다.


_영구와는 좌석이 떨어져있었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영구는 정말 착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주저없이 꼽을만큼 무골호인이지만 죽고 못사는 사이라도 10시간 붙어있는 건 부담된다. 머리 위 선반에 배낭을 밀어넣고 선반 뚜껑을 힘껏 닫는데 콱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놀랐다. 다들 선반에 짐을 놓고 뚜껑을 슬쩍 누르듯 닫는 걸 보니 큰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잘 잠기게끔 설계되어있나보다. 그런 걸 나는 무슨 찦차 트렁크문마냥 후려닫았으니...... 내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미숙하게 느껴졌지만 괘념치 않으려 애썼다. 자학하지 말자. 자학하지 말자.


_십몇년 전 이코노미석은 상당히 불편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의외로 편했다. 십몇년 전 이륙 땐 기체 진동이 심해서 이대로 공중분해되겠다 싶었는데 이번엔 덜 무서웠다. 미국행 비행기가 더 좋은 건가 나이 탓에 적당히 무뎌져 그런 건가. 다 나름 영향을 미쳤겠지만 인간의 집중력을 빨아먹는 데 갈수록 능숙해지는 IT기술이 주된 원인인 것 같다. 영화/TV/다큐/스포츠/게임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체 전방과 하방의 실시간 상황도 관찰 가능했다. 이것저것 눌러보다 영화에 안착했다. 라인업이 좋았다. 궁금하긴 한데 극장 가서 볼만큼의 강렬한 끌림은 없었던 영화들이 알차게 모여있었다.

​[그린북] 양아치 백인과 교양있는 흑인의 로드무비라는 시놉시스를 듣자마자 자동연상되는 모든 장면이 담겨있다. 어처구니없을 지경으로 뻔했지만 누누히 말했듯 뻔한 건 잘 먹힐 확률이 높다. 막판의 크리스마스 장면 진짜 최고로 뻔하고 역하고 근지러웠는데 보다 울었다. 다른 인종끼리 막 정을 나누고...상부상조하고...그런 거 너무 흐뭇하잖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기만적인 영화였다. 현실의 불미스런 잡음을 알고 보니 더더욱.​ [미스터 스마일]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영화를 각잡고 본 건 처음인데 하필 그게 은퇴작. 와 근데 너무나 곱고 우아한 할아버지다. 할배가 웃으면 정말 사방천지가 봄햇살 내리쬐듯 환해지며 뭐든 퍼주고 싶어진다. 젊었을 때 영화를 더 찾아봐야겠다. 상대 할매의 관상도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헉 76년작 캐리의 주인공 양반이었다!)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 악평에 비해선 그럭저럭 괜찮다 싶더니만 갈수록 좆같았다. 남의 집 자식 롯데월드 놀러간 홈비디오 보는 느낌이었다. 존나 지겨웠는데 한번 재생한 영화는 끝장을 봐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8배속으로 봤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 [퍼스트맨] 때 라이언 고슬링보다 인상적으로 봤던 클레어 포이 실컷 봐서 좋았다. 영화는 차갑고 슬펐다. 복지천국 북유럽 다 쓸모없다 그저 계집들은 국적불문 고생인 것을. ​[스타 이즈 본] 극장에서 봤는데 둘이 눈맞는 장면이랑 shallow 공연장면 다시 보고 싶어서 봤다. 레이디가가 몇번을 다시 봐도 멋지다. ​[한국인의 밥상] 그치 한국인이라면 이거 미국 가기 전에 꼭 봐줘야지. 이번 편은 남도의 해초와 조개밥상이었다. 내 동포들 왜케 칼로리 낮은 것들로만 연명했는지 진짜 맥앤치즈를 위시한 온갖 칼로리폭탄 정크푸드의 나라로 향하는 한마리 후손으로서 정말 너무나 면목없고 송구스러워 눈물이 났다.


_잠이 들락말락하는 비행 네다섯시간째, 기체가 크게 진동했고 안전벨트를 매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요란하게 울려퍼져 벌떡 일어났다. 몇 시간동안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초긴장상태로 있었다. 옆자리 인도남자가 앞자리에 얼굴을 파묻고 기도하기에 불안감은 한층 더 심해졌다. 진짜 여기서 죽나보다, 태평양 한가운데가 내 무덤자린가보다 했는데, 곧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하는 자세로만 숙면이 가능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기체는 곧 안정을 되찾았지만 한숨도 못 잤다.


_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 기내에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가 울려퍼졌다. 비몽사몽 중에도 전율이 일었다. 진짜 창작자들 중 뮤지션만큼 즉각적으로 사람 미치게 하는 종족이 없다. 부러워 죽겠다.


_남들 다 하는 여행에 들떠서 온갖 것들을 상세히 적는 행위 자체가 너무 촌스러운 것 아닌가 싶지만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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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출국날이 갑자기 정해졌다. 여권 만료된지 기십년이라 부랴부랴 구청에 달려갔다. 귀찮고 돈아깝고 시간없어서 만원짜리 지하철 즉석사진을 찍었다. 기계에 현금구멍 카드구멍이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카드는 멕이는 족족 토해내고 현금 만원권만 얄밉게 날름 삼켰다. 순식간에 사진이 나왔다. 못 나올 줄은 알고 있었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쁘게 나오든말든 관심없어진지 오래다. 그런데 이거는 어...잘나오고 못나오고는 둘째치고 얼굴이 너무 크다. 이렇게 커도 되나? 사진에 여백이 거의 없다. 시커멓게 산발한 머리에 하필 또 검정폴라티를 입고 찍어서 목조차 없다. 거대한 쌍판만이 공중부양중이었다. 규정위반 아냐? 아 뭐 얼굴만 크게 강조되면 식별하기 좋지 않겠어 출입국 직원들 가뜩이나 구별도 안되는 동양인들 얼굴 뜯어보느라 눈도 침침할 텐데 마 내가 친절하게 확대해줬으니까 잔말말고 통과시키라고 자빠져버리면 지들이 어쩔 건데. 재촬영으로 돈과 시간을 또 날리기 싫은 마음이 대책없는 허세를 빚어냈다. 이런 건 대부분의 여행기에서 불행의 복선이 된다. 어쩌긴 뭘 발포하겠지.


_선생님 이거는, 얼굴이 너무 크고 어둡게 나온데다 목도 없어서 출입국에서 문제삼을 수가 있거든요. 가급적 새로 찍으셨음 하는데, 굳이 이 사진으로 하시겠다면, 이 사진을 선생님 본인 의지로 선택해서 한 거라고 서명을 하시고 진행하셔야 돼요.
그래서 서명했다. 여권 민원 창구 전체가 선생님이, 선생님께서는, 선생님도, 선생, 선생, 선생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모든 민원인의 호칭은 성별 연령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부 선생님으로 통일하는 것이 불만의 소지가 가장 적다는 공직사회의 합의가 있었던 듯하다. 한국 호칭 문화의 골치아픔에 대해 생각하며 구청을 나서다가 근처 사진관 창문에 붙은 문구를 보고 비명을 꽥 질렀다.

[여권사진 9천원]

푼돈에 벌벌 떠는 나에게 이만한 귀싸대기가 없다. 뺨을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귀가했다.


_여권은 제때 나왔다. 신상정보가 적힌 면을 펼치니 문제의 사진이 나왔는데 얼굴 크기는 둘째치고 피부가 완전 구리색이다. 구리도 탐스러운 구리가 아니라 지명수배전단 특유의 어떤 음산-한. 그런 구릿빛. 어릴 때 수배전단 붙은 길은 쳐다도 안 보고 멀리 돌아갔다. 사진에 감도는 기운이 너무 무서워서. 그 기운의 정체를 알겠다. 피사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진이란 으레 그런 느낌인 것이다. 근데 자꾸 보니 사진에 정이 가서 뭐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됐다. 남는 여권사진 막 이마 뺨 턱 옆통수 뒤통수에 붙이고 티셔츠에다 크게 프린트해서 입고 가면 입국심사자도 정들지 않곤 못 배기겠지 하는 쿠소망상을 끝으로 사진에 대한 더 이상의 관심을 끊었다. 이제 ESTA가 문제다. 내가 무해한 관광객임을 증명받는 절차인데 허가가 나기까지 최대 7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96시간 뒤 출국인데...신상정보 체류지 주소 등을 쓰고 마약 테러 전염병 등과 관련있냐는 질문에 모두 아니오를 누르고 수수료 14달러를 지불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웬만하면 허가가 나지만 오타 때문에 거절당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한다. 뽕쟁이 테러범 좀비조차 아니오를 누를 저 뻔한 마약 테러 전염병 관련 질문도 마우스 스크롤 실수로 아니오가 예로 바뀐 채 제출되어 망하는 경우가 꽤 있단다. 14달러 카드결제시 지불국가를 택할 때 Korea Republic과 Korea Democratic Peoples Republic 두 개가 나오는데 후자인 북한을 고르는 사람도 적지 않단다. 데모크라틱 저거 민주주읜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까 맞겠지 싶어서(이 실수는 허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저런 실수들을 했으면 어쩌지 불안해하며 다섯시간 뒤 진행상황을 조회해보니


안도감과 설렘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마음에 조금씩 불안의 싹이 돋았다.

이 여행엔 어떤 지뢰가 숨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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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통이 날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렇게까지 티 낼 필요는 없었는데 참지를 못해서 기어이 몇 사람의 기분을 잡쳐놨다. 내가 뱉은 말에 상대의 낯빛이 변하는 순간이 수시로 떠올라 괴롭고 우울하다. 우울감 심할 때 남의 잘된 작업물을 보면 진짜로 죽도록 우울해지니까 되도록 피하는데 어제오늘은 뭔 날인지 고립감과 위기감까지 질식해 죽을 지경으로 심해져서 최근 입소문난 어떤 작품을 냅다 몰아봤고, 우려대로 기분이 완전 쑥대밭됐다. 나는 쓰레기 좆방맹이만도 못한 무능력자고 내가 손대는 건 죄다 망할 것이다. 이런 유치한 파국적 사고의 종착지는 단 하나. 지뢰찾기다. 손대는 족족 폭탄이 터져도 몇번이고 새출발이 가능한 이 미친 희망의 게임에서 나는 이제 벗어나기를 포기했다. 총 게임횟수 만 판이 목전이다. 저 숫자는 자기혐오의 무게다(단위는 근이 좋겠다). 나 자신이 너무 지겹고, 이렇게 살면 저 폭망의 자기예언이 실현될 게 뻔해 너무 무섭고 떨리는데, 한편으로는 게임성에 감탄하는 마음도 있다. 정말 잘 만든 게임 아닌가? 간결하며 철학적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숫자힌트를 잘 취합하면 네모판에 흩어진 99개의 지뢰 가운데 90개 이상을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다. 노력하면 대부분의 난관이 해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개 중 하나를 그냥 냅다 찍어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찾아온다. 내 힘으론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50%의 확률로 생사가 갈리는 순간. 직전까지 암만 잘했어도 운 없으면 끝장이라는 거. 요컨대 지뢰찾기는 능력으로 해나갈 수 있는 영역과 도박의 쪼는 맛이 더없이 절묘하게 결합된 인생의 축소판이다! 쓰레기가 되어가는 길에 이거라도 깨달아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나저나 게임중독과 알콜중독 중에 그나마 전자가 건강에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게임도 보통일이 아니다. 허리랑 눈깔이 세트로 빠지게 생겼다. 차라리 술이 낫겠다 싶어 다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뢰찾기하는 주정뱅이가 됐다. 아무데나 막 눌러서 지뢰가 펑펑 터지고 승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심신이 돌이킬 수 없이 썩어버리기 전에 지뢰찾기의 원산지나 한번 밟아보고 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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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장터국수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 영업하는 곳이 남아있더라. 너무 반가웠다. 초등학생 때 다니던 치과 건물 1층에 장터국수가 있었다. 치료 끝나고 거기서 가끔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장터국수 간판만 봐도 뜨겁고 찝찔한 국물과 치과 냄새와 드릴 썩션 소리에 오감을 두들겨맞는 것 같았다. 그 느낌 여전했다. 신기하고 이가 시렸다.



_말로만 가봐야지 가봐야지 했던 감자탕집에 드디어 가봤다. 생각보다 한적했다. 팔천원짜리 뼈해장국을 먹었는데 고기양은 적었지만 국물 고기 배추김치 무김치 모두 내가 생각하는 국밥집의 이데아에 가까운 맛이었다. 접객도 적절했다. 공기밥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데 운을 떼자마자 신속히 처리해줬다. 날씨마저 좋았다. 활짝 열어둔 매장 입구로 훈풍이 살랑살랑 들어왔다. 봄바람 맞으며 돼지등뼈를 젓가락으로 힘껏 비틀어 짜개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도 꿈결같아 슬퍼질 지경이었다. 반쯤 먹었을 때 등산객 몇 팀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매장이 꽉 찼는데 나처럼 단품 뚝배기 먹는 사람 아무도 없고 죄다 대중소가 붙은 메뉴들 그것도 웬만하면 다 대짜에 떡수제비감자사리 추가는 기본이고 소주도 쉴새없이 추가했다. 다 먹고 계산하고 신발 찾아신는 내내 여기저기서 등뼈추가를 외쳤다. 뼈추가는 만구천원이다. 감자탕집의 등산객 객단가란 정말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_대형고깃집을 볼 때면 저게 과연 유지가 잘 될까 괜히 걱정하게 된다. 내가 고기굽는 식당에 잘 가지 않으니 왠지 남들도 다 안 간다고 생각해버리는 것 같은데 너무 자기중심적 착각이지 싶다가도 실제로 그 왜 건물 외벽에 장독대 막 박혀있고 소돼지가 그려진 몇층짜리 고깃집들이 많이 사라진 걸 보면 마냥 근거없는 착각은 아닌 듯하고. 그러다 우연히 외식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끼리 하는 얘길 주워들었다. 사람들이 이제 예전만큼 고기 구워먹으러 다니는 걸 선호하지 않는단다. 케첩의 원조 크래프트하인즈가 건강식 선호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고 몰락하여 이 기업의 대주주인 워렌버핏이 3조를 손해봤다는 뉴스가 돈다. 그런 시대인가보다. 



_밥도 잘 안해먹는 주제에 뭔 배짱으로 잡곡을 사재기했는지 모르겠다. 하염없이 묵히느니 마른팬에 볶아서 과자 대신 씹어먹기로 했다. 두어 번 씻고 30분쯤 불린 다음 전체적으로 황갈색이 돌 때까지 약불에 볶았다. 타지 않게 나무주걱으로 계속 저어줘야 하는 게 약간 성가셨지만 의외로 즐거움이 컸다. 곡물이 열에 은근히 익을 때 나는 특유의 향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도 좋았고 중간중간 팝콘처럼 하얗게 튀겨지는 애들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이 행위를 많이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다 볶은 곡물을 밀폐용기에 넣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왔다가 초미세먼지 농도가 600 넘게 치솟은 공기청정기를 보고 기절초풍했다. 요리는 진정 생명을 살리고 갉아먹는 행위임을 실감했다. 볶은 곡물은 정말 맛있었다.



_쇼핑몰에서 서리태 사려다 너무 비싸서 중국산을 검색했는데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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